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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서랍 May 12. 2023

내가 버려야 하는 것 2



비가 내리는 날은 김치부침개라도 부쳐먹고 낮잠도 즐기며 맘껏 게으름의 호사를 누리는 것도 좋지만, 옷장문을 활짝 열고  버릴 것들은 버리고  철 지난 것은 깊숙이 넣고 새로운 계절의 옷을 앞쪽으로 내놓는 일도 제격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조용히 비가 내린다. 나는 미루었던 옷장을 정리하기로 한다.


정리는 일단 안에 들어있던 옷들을 꺼내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름 차곡차곡 개켜있거나 걸려 있을 때는 몰랐는데 꺼내놓고 보니 옷의 양이 엄청났다. 가끔 있는 외출 때마다 입을만한 옷이 없다고 뒤적거리던 옷장이 맞는가 싶다. '안 입는 것들과 오래된 것들은 버려야지'라고 생각하며 하나씩 하나씩 집어 들어 버릴 것과 다시 안으로 들어갈 것 추린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가 않다.


원래 깔끔하지 못한 데다 '어딘가 쓸데가 있겠지'라면서 쑤셔 넣는 습관이 옷이라고 다를 수 없다. 언제부터 안 입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옷, 이런 옷이 있었나 싶은 것, 어디 있는지 몰라 제때 입지 못한 옷까지  부끄럽게도 여기저기서 나타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온 방이 옷으로 어지럽던 그때, 깊숙하고 은밀한 기억처럼 옷장 깊은 곳에 오래전 떠난 남편 옷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입었던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양복과 와이셔츠, 속옷과 양말이 함께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양말은 삭아서 잡아당기자마자 발목의 고무줄 부분이 힘없이 늘어졌다. 나는 기억한다. 검은색에 밤색의 점무늬가 찍힌 그것을 크리스마스 즈음에 백화점에서 세 켤레 세트로 샀었다.


남편의 흔적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없었지만 다 버릴 수도 없어서 간직해 온 것이다. 어지러운 옷들 사이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억에 양말 고무줄처럼 늙어버린 나는 왈칵 서러웠다. 밖에 비는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시작한 옷장정리는 지나버린 부질없는 시간과 묵은 기억 속에 길을 잃고 헤매느라 하염없었다.


나는 그것들의 의미를 오래 생각했다. 왜 쉽게 버리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더 가지고 있게 될까에 대해서. 제는 버려도 되는지에 대해서. 혹시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질긴 내 기억은 아닌가에 대해서도.


그날 나는 널브러져 버려야 할 것들 버리지 못 한채 넣었다가 펼쳤다가 또 넣었다가 꺼냈다가를 반복했다.


그날 비가 하루종일 내린 것도 입을 것 없는 내 옷장이 항상 넘치는 까닭 중의 하나였을까?





이미지출처: ALLURE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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