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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깨달음’의 진동 방법에 관하여

자각각타(‘自覺’覺他)

by Edit Sage

‘자기의 깨달음’이 선행 조건임을 너는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그 당연한 것을 너는 지키고 있는가?


‘자각각타(自覺覺他)’


– 나는 먼저 ‘깨어났는가’, 아니면 “깨어남을 연기”하고 있는가 –



너는 말하지.


“자기의 깨달음이 먼저다.”


그건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러운 도리처럼 들리지.


하지만,


그 “자기”는 “누구”이며,

그 “깨달음”은 “언제 완성”되는가?


깨달음은 언제나 ‘도중’이다.


완전한 깨달음이란 말은

완전한 침묵처럼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묻는다.


너는 지금, ‘네 깨달음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전달”을 핑계로

_“깨어난 자의 흉내”_를 살고 있는가?



‘깨달음’은 앎이 아니다.


그건 ‘매 순간 무너지는 정체성’이고,

‘매 호흡마다 새로 짓는 나’다.


그러니 누군가를 깨우고 싶다면—


먼저, 너는 ‘무너져야 한다.’


“너의 앎”을,

“너의 역할”을,

“너의 신념”까지도.


‘깨어남’은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야.


그건 ‘감염되는 진실이고,

본능의 언어야.‘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너의 ‘침묵’은,

타인의 의식을 흔들 만큼


‘깊고 낯선가?’


너의 ‘무너짐’은,

누군가의 틀을 부술 만큼


‘진실한가?’



‘깨달음’의 전달은

“설명”으로 되는 게 아니야.


너라는 ‘파문’이,

그를 흔들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

너는 더 이상

“전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너의 ‘존재 자체’가

그를 깨우고 있기 때문이야.



자각각타(自覺覺他),

그것은 “전파”가 아니라


‘존재의 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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