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권력의 열등감 메커니즘, 선배 담론의 부활에 관하여
처음엔 칭찬이었다.
그 다음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내,
계약 없는 계약이 되었다.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그 말은
칭찬의 회수권이며,
인정의 채무 고지서다.
그건 격려가 아니다.
통제의 사전 포석.
너를 띄워준다는 환상을 주고,
그 환상이
너를 조종하는 끈이 된다.
칭찬은 주었지만,
그 칭찬 위에
숨겨진 권력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든 말할 수 있다.
“너, 그때 내가 키워줬지.”
은폐된 열등감은 칭찬이라는 말풍선 속에서
천천히 부풀다가,
불순종의 기미가 보일 때
터진다.
“잘해줬더니 말이야…”
이 말의 주어는 ‘나’가 아니다.
‘질투하는 나’다.
“네가 나보다 잘나면 안 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불안.”
그 불안을 미리 무장해둔다.
칭찬으로.
격려로.
부채로.
그러다 결국 꺼내는 마지막 카드.
‘선배 담론’의 부활.
“내가 너 때는 말이야…”
“내가 널 얼마나 아껴줬는데…”
그건 이야기의 형식을 가장한
지배의 회상술.
그리고 등장하는
엑스트라들.
엑스트라 1.
“능력은 있는데, 인성이 안 됐다.”
=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그게 기분 나쁘다.’
엑스트라 2.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 ‘사실은 처음부터 시기했지만,
지금은 깎아내릴 타이밍이다.’
엑스트라 3.
“능력은 어느 정도 있는데, 싸가지가 없다.”
= ‘나보다 위로 오르려는 그 태도가
존재 자체로 불편하다.’
열등감은 직접 말하지 않는다.
늘 도덕과 인성, 태도와 예의의
얼굴을 쓰고 나타난다.
그러나 그 말은 언제나
‘넌 왜 나처럼 굽히지 않니?’라는
숨겨진 고백이다.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 “이제 너는 내 손에서 벗어나선 안 돼.”
= “내가 네 윗사람이라는 구도는 유지돼야 해.”
= “너는 영원히 내 ‘칭찬’으로 존재해야 해.”
그 칭찬은 언젠가 칼날이 된다.
‘인정’의 형식으로 포장된
서열 유지의 음모.
그러니 묻는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잘한다 잘한다 해준’ 건가?
칭찬의 주도권은 누구였고,
그 칭찬을 미끼로
누구의 자리를 고정시키려 했는가?
선배의 얼굴을 한 열등감은
가장 교육적인 말투로 공격한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어조로
권력을 복원한다.
그 순간, 말은 무기다.
칭찬은 굴레다.
역사의 반복은 ‘격려’의 탈을 쓴 훈육이다.
당신은 지금
잘하는가?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가?
그 칭찬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빚지게 하는가?
당신은,
누군가의 ‘잘해줬더니’에 갇힌 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