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비포 앤 애프터'처럼 내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경험이 있다. 시도하기 전에는 그 결과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들. 지난해 내게도 그런 도전이 있었다. 바로 애매한 길이의 '여자숏컷' 말고 제대로 된 숏컷 해보기!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21년 1월 24일 상수역의 미용실에 가서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잘라달라"라고 했고, 짧은 머리로 사계절 살아봤다.
1. 고작 머리카락 자르는 일에 용기까지 냈던 이유
턱 끝 위까지 기장이 올라가고 바리깡으로 목 뒤 머리카락을 정리할 정도 짧은 길이의 머리도 자주 해봤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숏컷/단발 브이로그를 심심할 때마다 검색해 머리 자르는 장면을 보며 짜릿해하고, 인스타그램에서 '#여자숏컷' '#탈코전시'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올라온 숏컷 사진을 꾸준히 찾아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뒷머리를 자른 나는 어떤 모습일지 그려지지 않아 두려웠다. 30년 가까이 머리끈으로 묶이는 머리길이로 살았기에 숏컷한 내 모습은 상상조차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지난여름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에 빛나는 안산 선수가 고생했듯 '숏컷=페미'라는 일종의 낙인이 직장에서문제가 될까도 걱정됐다.
탈코르셋 운동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 등의 꾸밈을 하지 않는 여성은 젊은 페미니스트의 상징이 됐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죄악이고 페미니스트는 그들에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적이 된다. 안산 선수처럼 머리가 짧은 젊은 여성이나 페미니즘 책을 본 연예인은 '남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라며 공격받는다. 그렇게 페미니즘과 여성혐오는 사회와 정부, 기업 등이 세심하게 대응해야 할 어젠다가 아닌, 덮어놓고 꺼리는 이른바 '민감한 이슈'가 됐다. 지난해 숏컷과 집게손가락 논란은 오프라인 세계까지 등판했다.
2. 상상할 수 없던 숏컷한 나, 해보니 오히려 좋아
인스타그램을 돌며 내가 캡처해 간 여자, 남자 숏컷 레퍼런스를 본 미용사 선생님은 '이런 머리는 정말 짧게 잘라야 한다. 기르는데 오래 걸리고 후회한다'며 만류했다. 패기 있게 의자에 앉았지만, 전문가의 조언에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숏컷은 다이어리 맨 뒷면에 '팔 굽혀 펴기 10개 성공' '유튜브 영상 하나라도 올리기'와 함께 적힌 2021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만날 일도 줄었으니 머리가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긴 머리 여자 친구를 좋아하던 구남친들을 떠올렸지만, 올해는 애인 만들 작정도 의욕도 없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미용실에 온 날마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20대가 가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머리라며 "(레퍼런스보다는 길게) 잘라달라!"라고 했다.
중단발에서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에 속이 시원했다. 짧아진 머리가 낯설었지만, 스물아홉에 처음 해 본 일을 저지른 나를 거울로 바라보며 짜릿했다. 머리를 자르자마자 미용실 앞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잘생겼다" "잘 어울린다!" "반했다" 등 친구들의 칭찬이 달렸다.
폭염과 혹한의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숏컷이 주는 쾌적함은 달달했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집 밖을 나선 탓에 부스스해진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거나 축축한 머리카락 끝을 한겨울에 얼릴 때가 많았던 나는 오히려 멀끔해졌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페미닌한 블라우스나 원피스 대신 셔츠와 니트, 슬랙스 등 유니섹스 스타일로 자주 입던 터라 짧은 머리와 잘 어울렸다.
3. 걱정했던 "너 페미니?"
남초 회사인데, 머리 자른 여기자를 보고 눈살 찌푸리면 어떻게 하나, "너 페미지?"라는 질문이라도 직구로 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처음 머리를 자르고 회사에 갈 때 긴장했다. 그런데 우려가 무색하게도,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뻘 되는 부장이 "머리 잘랐다고 사람이 달라 보인다"며 신기해하고, 다른 동료들도 "잘 어울린다"라고 칭찬했을 뿐이다. 내게 "왜 숏컷했느냐"며 혼낸 사람은 헬스장 점장님밖에 없었다.(사실...."페미세요?" 농담처럼 질문하신 회사 동료가 한 명 있지만, 같이 일하는 분은 아니었으니 넘어가자.)
몇 가지 이유를 짚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론이 과잉 대표되고 있다는 것이다. '넷사세(인터넷+그들이 사는 세상' '커뮤사세(커뮤니티+그들이 사는 세상)'라는 단어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여론은 온도차가 있다. 특히 젠더 문제에 관해서는 그 차이가 더 극렬하다. 집게손가락을 보며 남혐을 짚어내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성차별과 여성혐오 등 젠더에 관해 1030세대와 기성세대 간 인식 격차가 크다는 것이다. 내가 머리를 자르고 반년 뒤인 도쿄올림픽 시즌, 안산 선수의 숏컷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 올림픽에서 아직 경기가 남은 금메달리스트 국가대표 가 '숏컷'이라는 이유로 온라인 상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에 젠더이슈에 관심 없는 기성세대들도 주목했다.
그런데 이들은 숏컷이 왜 남초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숏컷은 커리어우먼이 즐겨하던 스타일이며 여자 운동선수들에겐 흔한 머리 모양인데, 무슨 문제인가?' 윗 세대에게는 내 숏컷 또한 페미니스트의 표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자뿐 아니라, 기업 임원 등, 전문가 등 그들에게 각계각층의 숏컷한 여성 동료는 많았기에. 사회의 변화를 관찰하고 해석해나가는 언론사이니 더 열린 마음을 가진 것일 수도 있겠다.
2년 전 추석, 나훈아 선생님이 말하셨다. "안 하던 일을 하셔야 세월이 늦게 간다"라고. 숏컷에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보게 돼 기쁜 마음이고, 이 즐거움을 널리 알리고 싶다. "여성 분들, 숏컷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