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다음 날 아침 9시 30분, 준혁은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나와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운전기사에게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것은 전날 저녁 레이꼬가 택시를 탈 때 운전기사에게 보여주라고 건네준 A4 용지로서 거기에는 집주소뿐 아니라 건물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당부사항까지 적혀있었다.
"손님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니 차를 길 건너편에 대지 말고 집 쪽으로 붙여서 대주세요."
그녀의 세심한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가 도착하자 미리 집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꼬는 재빨리 다가와 택시 요금을 지불했다. 전날 저녁, 호텔에서 식당에 갈 때도 아이들이 탄 차의 기사에게 목적지 주소와 함께 충분한 요금을 넣은 비닐봉지를 건네준 그녀였다.
차에서 내려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집은 30년 전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자, 레이꼬는 30년 전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복도를 따라 준혁 일행을 안내했다. 그 당시, 복도를 따라가면서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괴한들이 뒤에서 덮칠 것만 같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던 그때를 회상하며 준혁은 혼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레이꼬는 일행을 부모님 영정사진을 모셔 놓은 방으로 안내했다.
일본 사람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방 하나에 영정사진과 위패를 모시고 매일 아침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문안인사를 올리니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나라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방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영정 사진의 아래, 방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상(床)이었다. 상 위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전시하듯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놀랍게도 준혁 부부가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소포로 부친 선물들(한국 산 유기농 농산물 및 수산물 가공품)이 아닌가!
이것은 혼자 사는 레이꼬가 간식거리로, 반찬거리로, 한 끼 식사 대용으로 먹으라고 일주일 전에 보내준 것인데 그녀는 준혁 일행이 올 때까지 한 봉지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부모님 영정 앞에 제사상 차리듯 모셔 놓은 것이다. 서랍장 위에는 부쯔단(仏壇, 불단) 같은 단을 만들어 그 안에 부모님의 사진과 위패를 놓고 조각상과 꽃으로 장식하고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놓았다.
준혁은 기독교인인 관계로 향을 올리는 대신 기독교 식으로 게이꼬 씨를 추모하기로 했다.
모두들 선 채로 영정 앞에 눈을 감고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가운데 준혁이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했다.
“게이꼬 씨, 참으로 미안합니다.
작년, 살아생전에 한 번 와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신 후에야 찾아왔습니다.
그런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우리 식구들을 대동하고 다 같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한 번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유언까지 남겨서 베풀어 주신 호의,
우리 모두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잠시 왔다 가지만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며
그 우정은 자식 대까지 면면히(綿綿) 이어갈 것입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잘 지내 소서. 명복을 빕니다.”
(이 기도문은 귀국 후 영어로 번역하여 레이꼬에게 보내주었다.)
준혁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게이꼬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다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레이꼬의 안내로 응접실로 들어갔는데 한쪽 벽면 장식장에는 어릴 적 레이꼬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액자가 놓여있고 그 위칸에는 준혁의 첫 저서인 ‘얼굴특강’이 놓여있었다.
이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실내로 연결된 또 다른 통로를 따라 병원 구경을 갔다. 30년 전, 커튼이 쳐진 저 복도를 보고 '저건 또 어디로 통하는 거지? 무슨 놈의 가정집에 복도가 두 개나 있나? 이거 진짜 가정집 맞나?' 하며 두려워했던 기억이 떠올라 준혁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그곳은 레이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개원한 지 40년, 아버지 사망 후 문 닫은 지 18년이나 된 병원이었다.
병원 문을 닫은 후 환자 대기실은 운동하는 공간으로, 방 하나는 독서실로, 방 하나는 DVD 감상실로 쓰면서 그곳에서 레이꼬는 주로 일본어 자막이 달린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하였다.
병원 접수대 내부에는 당시 쓰던 차트가 그대로 남아 있고 벽에는 약병과 약을 가는 절구통과, 간 약 무게를 다는 미세 저울까지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 마치 의원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이 경이로운 광경에 준혁의 입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동네의원 원장이 죽고 병원 문을 닫았는데 그 아내와 딸이 병원을 처분하거나 세를 주지 않고 원장이 마지막까지 쓰던 물건들 그대로, 간판도 그대로 달아 놓은 채 18년 동안이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고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조문과 병원 구경을 마치고 감회에 젖어 밖으로 나오니 검은색 도요타 승합차 한 대가 대기해 있고 정장 차림의 운전기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으며 그들의 짐을 차에 옮겨 싣기 시작했다. 준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늘은 푸르디푸르렀고 몇 조각 흰구름이 떠 있었고 그 구름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게이꼬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제야 준혁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