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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 Feb 14. 2024

아빠와 대학교 산책

28살에 수능 보는 건에 대하여

나이를 먹으면 부모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우리 아빠를 온전히 이해할 날이 올까 모르겠다. “지현이 아빠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별의별 걸 다 겪었을 머리가 희끗희끗한 친척들도 이렇게 말하는데. 그리고 저 말이 단지 순수한 감탄이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저렇게 자기 삶이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 진짜 가까운 가족은 그런 생각을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나는 속으로 삼키고 마는 것을 주변 이들이 표할 때, 내 생각이 과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이란 사실에 씁쓸한 안도를 한다.




광주에서 아홉 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우리 아빠는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찢어지게 가난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저 노력 하나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 어머니까지도 대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나 평생 독립적으로, 묵묵하게, 성실하게, 술 담배 없이 살아온 우리 아빠는, 워커홀릭이 아니다. 그저 해야만 해서,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족에게 아빠는 슈퍼맨이다. 세탁기나 컴퓨터가 고장 나면 남은 가족들은 아빠를 찾는다. 아빠가 다 고쳐주니까. 궁금한 게 생기면 아빠한테 물어본다. 아빠가 알고 있으니까. 오전 7시 전에 나가, 저녁 10시가 되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아빠를 기다린다. 늦은 밤 들어오는 아빠를 안아주려고 다가가면, 자신을 위한 투자는 일절 하지 않는 아빠의 옷차림은 항상 거기서 거기다. 내 돈으로 더 선물하겠다고 해도, 평생을 악착같이 검소하게 아끼고 살아온 사람들은 ‘여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손을 내젓는다. 사랑하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살아온 얘기도, 주변 사람이나 가족 얘기도, 선거 때 누굴 뽑았는지도, 평소에 무슨 생각이나 걱정을 하는지도, 인생 한탄이나 자랑도, 둘 다 일절 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친구 한두 명은 있어도,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취미는 없다. 집에 있는 주말에도 일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어떤 생각에 잠겨 있곤 하는데, 그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빠가 또 혼자 우주를 산책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아빠가 너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답답할 때면, 엄마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세게 저으며 중얼거린다.


“그래도 존경하니까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지.”




어느 초겨울 주말, 나는 아빠에게 느닷없이 함께 아빠의 모교를 방문하자고 말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돌연 생각이 났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누가 쫓아올세라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아빠 정말 오랜만에 쉬는 건데 하필 왜 그러니?”


그 시기에 아빠는 정말 바빠서 주 7일 근무가 몇 달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평일에는 시간이 나지 않으니 주말 아침에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 거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앞자리가 여섯이 되면서 강철 같았던 아빠도 힘에 부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 역시 그 사실에 슬퍼했으면서, 왜 유독 그날 고집을 부렸는지 잘 모르겠다. 제 딴은 더 추워지면 산책을 할 수 없고, 봄으로 미루자니 영영 까먹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엄마와 내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와중에, 아빠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무렵의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결핍을 메꾸고 싶었다.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마음 한구석이 허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다른 일을 병행하면 좀 괜찮아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의견을 묻고,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진로지도 수업까지 성실하게 이수하며 미래를 그려보았다. 다정한 사람들은 섬세하게 고려해서 내게 선택지를 추천해 주었고 개중에는, 얼추 자신 있는 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강한 확신이나, 밀어붙일 추진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던 내게도 참 오랜만에 찾아온 약속 없는 주말이었다. 환절기 코트를 걸치면 딱 좋은 상쾌한 날씨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대학 내부에 들어온 버스가 길을 직진했다. 산을 끼고 있어서 나무와 오르막길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사람이 거의 없는 캠퍼스는 한산해 보였다. “옛날에는 이 길을 다 직접 걸어 올라갔지.” 아빠가 운동할 시간도 없으면서 환갑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 젊은 시절 쌓아 올린 체력의 출처가 이곳에 있었다.

우리는 산책을 좀 하다가 쉴 곳이 있으면 들어가기로 했다. 지인의 결혼식 이후 거의 10년 만에 방문한 모교라지만, 아빠는 카페가 있을 법한 곳을 잘도 추측해 앞장섰다. 나는 다음 행로를 전부 아빠에게 맡겼다. 조용히 걷는 아빠의 옆에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추며 손을 잡았다. 아빠 손은 항상 내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여기 지름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놨네. 아니면, 여기로 돌아서 가면 바로 나올 거야. 건물 구석구석을 누비며 간간이 말하는 정도였지만, 아빠치고는 말을 참 많이 하는 모습이어서 내심 신기했다. 혹여 아빠가 힘들어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나는 벤치를 가리키며 앉을지 청하기도 했다. 조용한 거리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선선한 바람을 느꼈다.




아빠의 길 찾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발견한 카페가 주말이라 전부 문을 닫아버렸다. 우리는 결국 편의점에 들어갔다. 스타벅스 라떼를 두 개 잡으며 내가 물었다. “카페인 들었는데 이 시간에 마셔도 괜찮아요?” “그런 거 마셔도 일할 때 잠 잘만 오던걸.” 나는 계산대로 걸어가, 아빠가 카드를 꺼내려할 때 얼른 먼저 선수를 쳤다. 그리고 덜거덕거리는 갈색 테이블로 향했다. 옆에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맞은편에 앉는 아빠를 참 오랜만에 제대로 보았다.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이렇게 일부러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마련하기 힘든 자리였다. 아빠는 팔짱을 끼고 내내 옆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 아빠가 고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리는 일은 있어도, 끝내 나와 똑바로 눈을 오랜 시간 맞추진 못했다.


“아빠는 왜 그렇게 힘들게 일해요?”


나는 그동안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남들보다 몇 배로 더 벌어가는 악덕 사장이면 모르겠는데 그런 부류도 절대 아니었다. 최소한 업무 강도라도 낮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맡아야 돌아가지.” 낡은 옷차림과 칙칙해진 피부도 아빠의 반짝이는 큰 눈동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한때 아빠는 그 눈으로 하늘을 담기를 꿈꿨다. 장래 희망이 파일럿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던 아빠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그러면 무시하고 만만히 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많지. 그래도 전부 책임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있어야 해.”



나는 두 번째로 묻고 싶었던 말을 던졌다.


“아빠 은퇴는 언제 해요?”

“이미 10년 전에 했어.”


안정적이었던 대기업을 나오면서 아빠 같은 사람도 무너질 수 있음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다시 일어섰다. 그때부터 평판은 ‘항상 근면성실한 사람’ 정도에서 ‘저 사람 괜찮은 걸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혹사하는 아빠의 얼굴, 손, 팔은 빠른 속도로 타기 시작했다. 원래도 어두웠던 아빠의 피부와 안색은 나날이 더욱 안 좋아졌다. 부모님은 어른의 사정이라고 말을 해주지 않지만, 아빠가 목숨을 갈아 넣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아빠의 출근 복장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양복으로 바뀌었다. 일개 직원 위치에서 결국 인정받고 공동대표로 올라갔다.


반항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사춘기 때, 내 감정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격화되곤 했다. 아빠가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지 않을까, 졸음운전 탓에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안한 상상에 빠지며 울곤 했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밤 10시가 되면 슬슬 초조한 마음에 시계를 자주 보게 된다.



우리의 편의점 대화 사이사이에는 침묵이 매우 많았다. 나는 말을 뒤이어 얹기가 조심스러웠다. 사회생활과 지위로 지켜내야 하는 60대의 자존감과 금전적인 사정. 뒤따라오는 무지막지한 책임감과 두려움. 그 깊이에 아직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고작 20대의 위로가 과연 닿을 수나 있을까, 근처에 갈 수 있기나 할까 하는 우려였다. 혹여 내 말이 너무 형식적으로 들릴까 봐, 안 하느니 못할까 봐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이미 다 마신 라떼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아빠와의 침묵은 편안했다.


가족인 나에게야 이런 아빠가 마냥 멋있지만, 함께 일하는 입장에선 영 시답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일었다. 너무 잘하고 너무 묵묵하게 성실한 사람은 그런 인물을 잘 대우해 주는 곳에 가야 빛이 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남들보다 곱절로 배척받기 마련이다.


게다가 한 집단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의 외로움과 욕먹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아빠의 자리가 무척이나 고독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에 다다른 사람이어야 아빠와 어느 정도 통하는 대화가 가능하고 곁에서 공감되는 말을 전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일이랑 한 몸으로 사는 아빠의 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나는 한참 멀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빠 역시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현이 너는 공부를 잘하고 글도 잘 썼으니까 대학에 가서...”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방송작가 같은 걸 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빠가 내게 대학 얘기를 한 것은 이번이 난생처음이었다. 이유가 있겠거니 해서 내 선택들에 대해 어떤 것도 막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아빠의 그 말이 가벼운 오지랖처럼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오지랖이 괜찮을 때가 있었다. 알고 보니 진심 어린 걱정은 더욱 듣기 마음 아팠다.


“그런데 나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로.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한데.”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아빠는 대학 시절이 추억인데.”


아빠의 눈은 여전히 측면의 창문을 향해 있었다. 봄엔 어떨지 몰라도, 겨울철의 캠퍼스는 약간 휑했다. 아빠가 재학했던 시기는 나무들을 막 처음 심었을 때라, 지금보다도 더 허허벌판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아빠가 추억하는 대학 생활은 싱그러워 보였다.


“지금의 너는 너랑 맞는 얘기를 할 사람이 없잖아.”




내가 그 말에 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대화는 종결되었다. 우리는 조금 더 조용히 앉아있다가, 해가 지기 전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탄 신림선 지하철은 무인 운행이라 기관실이 따로 없었다. 앞뒤 창문으로 선로를 고스란히 구경할 수 있다. 여전히 각종 사물에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아빠가 밖을 빤히 들여다봤다. 또 아빠의 우주 안에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그 속을 산책하게 내버려 두며,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편의점 대화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 줄기를 잇고 있었다.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로 아빠가 단순히 엘리트 카르텔이나 능력주의 사회만을 설명하려 했다면, 나한테는 크게 와닿지 않았을 거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어린 나이부터 모를 수가 없는 동네들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상처나 염려는 나를 품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면서 사그라진 뒤였다.


하지만 우리 아빠란 사람은 단순히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아빠가 말이 많고 톤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학창 시절에 공부했었던 내용을 읊을 때다. 부리나케 곧바로 취직해서 지금은 학문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도, 40년 전에 다닌 고등학교 때 이런 걸 배웠다, 저런 걸 배웠다 인용해 설명할 때면, 방금 수업을 듣고 온 학생의 요약처럼 정말 생생하고 꼼꼼하다. 그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빠는 정말 공부를 좋아했다고.


 내가 대학을 가지 않아서 힘들었던 이유로는 취업과 같은 현실적 요소들을 떠나, 학창 시절 내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정말 좋아했음을 증명할 수 없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데 굉장히 크게 일조했던, 견고한 학창 시절 12년 세월이 한꺼번에 너무 쉽게 부정당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증명이 없는 건 물론, 어쩌면 가장 대비되는 고졸이라는 상태에서는 내 얘기가 상당히 우스운 주장이 될 수 있었다.


타인의 판단이나 선입견은 그 길을 선택한 내가 감수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바꾸고 싶지도 않다. 이 과정이 지금의 단단한 나를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기대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괴로움, 동시에 그들은 왜 기대만 하고 내가 힘들 땐 도와주지 않았냐는 삐뚤어진 원망, 그리고 내 10년이 나만 아는 곳에 꽁꽁 가두어져 있다는 생각. 항상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입장에만 서있는 것. 이러한 것들 때문에 나는 그 누구를 만나도 온전하게 나로서 존재하고, 타인에게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혹여 허세나 자랑처럼 들릴까, 과거의 낭만에만 빠진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살면서 맹세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은, 이 나이에 와서는 체념을 넘어 나조차도 잊고 살았던 파묻힌 이야기.


아빠는 그걸 그냥... 한 번에 꿰뚫고 있었다.




공부를 다시 한다고 생각하니, 최근 일을 찾으러 돌아다닐 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어쩌면 내가 여태까지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을지 모른단 생각이 일었다.


대학에 가면 다 해결된다는 이상적인 꿈은 없다. 학교는 학문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인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결국 학교를 가든 말든, 각자가 살아가기 나름이고, 또 정말 재학하게 된다 한들 맞닥뜨릴 현실적 문제가 수도 없이 많을 테다. 사실 그냥 공부를 하고 싶다면야 대학은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굳이 그중 대학을 택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아빠. 나는 아빠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해야 하는 도전적인 일 앞에서 성공실패 여부를 떠나, 아빠와 비슷한 태도를 갖춘 사람이 되려고 한다. 실제로 그런 태도로 인생에 응할 때 만나게 되는 좋은 기회와 인연들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 나는 부모님을 통해 노력과 헌신의 가치를 배웠다. 우리 가족이 사는 방식이 모두에게 단일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는지, 훗날 과거에 대한 미련이 안 생기는지 알고 있다. 아빠도 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다면,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나 자신과 싸워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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