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만 되면 신불산이 보고 싶어진다. 푸른 숲도 아니고 예쁜 꽃도 아닌 갈빛 억새 들판이 왜 그리워지는지. 올해도 신불산 억새 산행을 계획했다.
신불산은 울주군에 있기 때문에 양평에서 서울역 경유로 KTX를 이용해 갈 수 있다. 남편이 운전을 즐기기는 하지만, 가끔은 운전을 하지 않고 열차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열차로 가기로 정하고는 남편이 양평에서 서울역, 서울역에서 울산역까지, 산행시간에 맞추어 돌아오는 열차 편까지 꼼꼼하게 계산하여 승차권을 예매했다. 물론 나는 따라만 다니면 된다.
새벽 5시 50분에 집에서 출발. 양평역 가까이 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1일 주차비 5,000원이다.) 양평역에서 서울역까지 KTX를 탔다. 새벽 시간이라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대합실에 아무도 없었다.
작년에도 신불산 열차여행을 했기 때문에 좀 더 효율적으로 계획할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20분간의 대기 시간에 아침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데, 작년에 사 먹었던 김밥 도시락이 입에 안 맞았는지 올해는 샌드위치를 싸자고 했다.
따뜻한 국물이 있으면 목 넘김이 편해서 어묵 한 컵을 사고 다른 승객들처럼 서울역 계단에 앉아 간단히 요기를 했다. 서울역에는 그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많다. 우리나라를 여행하러 온 외국인들도 이른 시간에 열차를 타고 어디를 가려는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음식점도 있고 빵집이나 카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찰구 앞 계단에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요기를 하는 사람은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제법 있다.
열차를 타면 여행 가는 기분이 더 난다. 자차로 가면 1박을 해야 하는 여행을 달랑 배낭 하나씩만 메고 당일로 다녀왔다.
울산역에서 건암사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비는 9,100원. 울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건암사는 작은 절이다. 예전에는 불승사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이 코스로는 두 번째 산행인데, 너무 오래전이라 처음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런 숲길이 처음에는 한참 계속되었다. 숲길을 걸으면 몸과 마음에 두루 치유의 시간이 된다.
신불산 암벽에 단풍이 들면 정말 예쁘겠다. 억새 산행 때만 오니까 제대로 물든 모습을 잘 못 만난다.
남편도 오랜만에 오는 코스라 그동안 잊어버렸는지 생각한 것보다 험하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제법 험한 코스로 인식되어 있는데. 신불산 산행 코스가 여러 개이지만, 예전에 신불산휴양림에서 잘 때는 주로 휴양림 쪽에서 출발하였다. 작년에는 배네고개를 들머리로 올라갔는데, 이번 산행보다 훨씬 수월했다. 건암사 들머리 코스는 8년 전에 한번 가가고, 이번이 두 번째다.
천남성 열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내내 흐린 하늘이었는데, 파란 하늘이 열린다. 반갑다.
억새 들판도 반갑다.
철이 약간 지난 듯해서 서운했지만 간월재 억새 들판만큼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보이는 집은 오래된 산장인데,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폐가가 되어있었다.
억새가 자라는 곳은 큰 나무가 없다. 다시 말해서 숲이 없는 민둥산(나무가 없는 산)이다. 정선에 있는 억새 명산은 아예 이름이 민둥산이다.
푸른 숲이 있는 산을 오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무 없이 억새만 가득한 산을 오르는 것은 색다른 맛이다. 높은 산의 평전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지만, 하늘이 더 넓어 보이고, 더 가까이 보여서 좋다. 가슴이 확 뚫리도록 시원해지는 기분은 꼭 바람이 잘 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서 사방팔방 거칠 것이 없어서 좋다.
그렇다. 그런 산은 바람이 잘 분다. 억새 평전의 억새들은 그런 바람을 잘 탄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몸을 바람에 맡기고 이리저리로 몸을 누인다. 억새가 누우면 내 마음도 따라서 눕고, 억새가 다시 일어나면 내 마음도 따라서 일어난다. 춤을 추는 것이다. 바람의 강도가 약하면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강하면 온몸을 휘청거리면서 바람과 한 몸이 된다. 그런 억새의 유희에 나도 쉽사리 한마음이 된다.
예전의 사진을 찾아보니 바람과 억새의 한바탕 춤사위에 나도 같이 춤추는 듯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 꽤 있었다.
신불산을 그렇게 열심히 찾는 이유는 바람과 억새의 향연에 나도 같이 녹아들던 그 느낌을 못 잊어 억새 산행철이 되면 찾고 또 찾는 것 같다.
구름의 세력이 매우 강하다. 파란 하늘이면 좋겠지만, 구름의 춤사위도 제법 그럴싸하다.
영축산과 신불재의 갈림길. 한때 간월재로 올라와 영축산까지 가본 적도 있다. 지금은 추억 속의 일이다.
양옆의 억새 군락을 거느리고 있는 나무 계단이 쭉 올라가라고 우리를 안내한다.
동그란 모양의 신불재 쉼터가 로터리 같다.
산부추
꽃향유
미역취
구절초
남쪽 지방이라 그런지 아직도 마타리가 피어있었다.
마타리
영축산
용담
신불산에는 정상석이 두 개다. 이것은 구 정상석.
누운향나무가 있던데, 누운소나무도 있나 보다.
산신령님이 봐준 거라고 우리는 표현한다. 정상석을 예쁘게 찍으라고 파란 하늘이 많이 보인다.
울주군 쪽 전망.
정상 주변에 있는 넓은 데크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
등산로를 따라 간월재로 간다. 억새 군락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이곳에도 억새가 가득했었는데.
되돌아본 신불산.
점을 찍은 듯 주황색 단풍이 든 나무가 보인다. 곧 산 전체가 단풍이 들겠지.
드디어 간월재가 보인다.
다행히 간월재 억새 동산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늘빛까지 도와주는 중.
은갈색 억새 벌판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겨 흔들리는 억새같이, 운명이 주어지는 대로 나를 맡겨 세상 순리대로 잘 살아내리라. 이제껏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내리라.
간월재가 있는 신불산을 비롯하여 가지산, 운문산 등 7개의 산군을 영남알프스라고 부른다. 영남알프스 전국 산악대회도 매년 개최하고,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제 등 산악인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다.
우리는 가지산을 한 번 가본 적은 있지만, 주로 신불산을 가는 편이고, 영남알프스 완등은 하지 않았다.
간월산에서 내려오는 등산로.
간월재에서 한참 억새와 어울리다가 임도로 내려간다.
바위 틈새에서도 꽃을 피운 구절초.
여뀌도 모여 피니 존재감이 있다.
하산 길에 만난 야생화들과 눈 맞춤한다.
가는장구채
쑥부쟁이
꽃향유가 쨍하니 예쁘다.
단풍도 만나고.
임도에서 벗어나 다시 숲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걷는다.
개울가에서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열차시간에 맞춰야 해서 아쉽게 일어났다.
내를 건너면 바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택시는 카카오로 불렀다. 참 좋은 우리나라. 물론 시골로 가면 카카오도 잘 통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울산역에 도착했지만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울산역 음식점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커피 한잔할 시간도 있었다.
울산역 출발 6시 23분.
서울역 도착 8시 55분.
밤 10시 50분에 양평집에 도착했다. 꼬박 17시간의 꽉 채운 울주 신불산 억새 산행을 끝냈다.
신불산 정상에서 간월재로 내려오는 길이 경사가 있는 계단이라 이제 신불산 산행도 접어야겠다고 말하며 내려왔는데, 억새와 바람의 향연을 보러 내년 이맘때쯤이면 다시 신불산 산행계획을 잡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