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을 모르는 사업 여정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 사업통장의 숫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매월 나가는 돈을 셈해보니 앞으로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뭐라도 해봐야겠다 싶어 용역 사업이 올라오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창업 직전 스타트업에 다닐 때, 용역 제안에 수차례 도전했었다. 여느 스타트업이 그렇듯 회사는 자체적인 프로덕트가 있었지만 현금 흐름은 없었다. 대표는 투자를 따내려 전세계를 돌았고, 팀원들은 용역 따내기에 매달려야 했다. 4개월 동안 무려 7개의 제안서를 썼다. 무분별하게 제안서를 작성하고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은 참으로 힘 빠지는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업을 한다면 용역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몇 년 후 용역 사이트를 뒤적이는 대표가 되었으니.
마침 운명 같은 용역 사업이 떠있었다. 주제는 워케이션, 과업은 SNS 콘텐츠 제작. 게다가 제작해야 하는 콘텐츠 수량도 많지 않았다. 자신 있는 주제와 전문 분야. 감당 가능한 사이즈. 마감을 4일 남기고 도전하게 된다.
벼락같은 4일이었다. 조달청 등록, 공동인증서 갱신, 기업신용평가, 제안서 작성, 제본, 발표 연습.. 회사에 소속되어 용역사업을 준비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이었다. 대표에게 발급해달라고 했던 서류, 팀원들과 함께 모은 아이디어, 인턴이 도와준 제본, 모두 다 내 몫이었다. 돈을 내라는 곳은 왜 이렇게 많은지. 용역 제안 한 번에 피 같은 돈이 줄줄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전 회사의 경력도 참 내세울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회사는 더더욱 내세울 게 없었다. 회사의 신용도와 경력을 평가하는 정량평가는 최하점이었다.
서류를 제출하러 갔는데 경쟁률이 8:1이었다.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았다. 왜냐면 워케이션 콘텐츠는 어느 회사보다 잘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국내 워케이션 시장이 발전하는 중심에 있었으니까. <워케이션 가이드북>을 손에 꼭 쥐고 발표장에 갔다.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국내 워케이션 시장에서 차별화된 콘텐츠를 뽑아내야 한다고 방향을 짚어주었다. 콘텐츠 아이디어가 신선했는지 심사위원도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냈다. 발표장을 나오면서 '이거 될지도 모르겠는데..?' 하며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공고가 나왔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런데 2개월 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워케이션 운영사 대표님이었다.
"대표님 전에 ㅇㅇ 워케이션 콘텐츠 용역 지원하셨나요?"
"네 맞아요"
"그때 발표에서 일등했는데 정량 점수가 낮아서 안 뽑혔다고 해요. 담당자분이 제안 내용이 좋았다고 수의계약을 진행하고 싶다고 하네요? 연결해 드릴까요?"
핸드폰을 붙들고 기쁨의 날갯짓을 했다.
'발표에서 일등이었다고?! 심사위원들의 시그널을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수의계약은 입찰 경쟁을 하지 않고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이는 연줄이 있는 업체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제안서를 보고 들어오다니. 이렇게 풀리기도 하는구나!
알고 보니 입찰 경쟁에서 이긴 회사가 콘텐츠를 만족스럽지 않게 제작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담당자가 수소문해서 연락을 주었던 것이다.
지난 수요일, 계약을 체결하고 왔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용역 사이트를 뒤적이던 모습이, 그러면서도 워케이션 사업만큼은 자신 있다며 목소리를 낸 모습이, 실패의 쓴맛을 애써 삼키던 모습이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느낀다. 사업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여정이구나. 작은 희망을 가지고 도전을 하고, 희망으로 가득 찬 일이 안되기도 하고, 안개 속에서 갑자기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역시 하나다. 스스로 기회를 포착하는 것. 지치지 않고 도전을 이어나가는 것. 그러다보면 언제 찍었는지 모를 발자국이 길을 환히 밝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