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몇몇 친구들과 1박 2일로 여행을 갔다. 너도나도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간 만에 낸 시간이었고 나름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구들이어서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앞둔 것처럼 기대와 즐거움이 없지 않았다. 여행의 방점은 여기저기 ‘구경하기’보다 ‘그냥 푹 쉬다 오기’였다.
편안한 숙소에 짐을 풀고 재래시장에 들러서 구경하고 음식 재료 사고 숙소에서 우리끼리 밥을 해 먹으며 쉬다 오는. 분위기 낸다고 한 친구가 집에서 와인도 한 병 가지고 왔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자식을 키우며 100미터 달리기 하듯 정신없이 살아온 시절을 막 지난 나이의 여자서넛이 모인 자리엔 소박한 안도감과 평화가 있었다.
와인이 담긴 잔을 하나씩 손에 들고 그럴듯하게 분위기 잡던 중 한 친구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꼭 하고 싶은 거, 소망하는 거 하나씩 말해 보기 하자.”
가벼운 이야기들로 두서없이 수다 떨던 우리는 갑자기 조금 진지해졌다.
평소에 여전히 신경이 쓰이고 걱정되는 것들이 각자에게 왜 없을까마는 갑자기 남은 인생에서 소망하는 거 하나씩 말하라는 질문에 답을 하려니 무슨 학교에서 집단상담 비슷한 것 하는 것처럼 진지, 심각 모드가 되었다.
누구도 먼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이게 내가 가장 소망하는 게 맞기는 한가’ 하면서 각자 자신의 생각을 꺼내어 살펴보고 있는 듯했다.
“안 보고 싶은 사람 안 보고 살기,
하고 싶지 않은 일 안 하고 살기.”
“와우, 부라보! 멋지네.”
“그래, 너 이제 그렇게 살아도 돼.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무슨 도리니, 의무니 하며 사니?”
평소에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불리는 한 친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산뜻했지만 가볍지 않은 목소리였다.
시댁과 친정에서 맏이로 큰 며느리로 늘 배려하고 베풀고 참고 살아온 그녀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우리는 격하게 공감을 표현해 주었다. 그동안 소진된 그녀의 에너지가 어디선가 다시 샘솟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소망은 우리 모두의 소망인 듯 우리도 덩달아 그 한 마디에 신이 났다.
두 번째 친구가 조용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앞으로의 내 목표는 웰다잉이야.”
웰다잉, 새롭거나 낯선 멘트가 아님에도 순간 우리는 살짝 심각해졌다.
“그렇지, 잘 죽는 게 힘든 거지.. ”
내가 중얼거렸다.
평생 당뇨를 앓고 말년에 신장 투석까지 받으며 병원에서 힘들게 연명하다 돌아가신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딸의 얼굴을 천진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예쁜 새댁은 누구세요?”라고 말하는 친정엄마 수발을 들고 있는 그녀다.
“난 두려워. 나도 그렇게 늙어 갈까 봐.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봐..”
“그 게 내가 매일 운동하는 이유야. 죽는 날까지 건강하고 싶어. 내 힘으로 일어서고 내 힘으로 화장실 가고 내 힘으로 밥 먹고 싶어. 남편이나 자식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우아하게 살다 가고 싶어.”
“에이, 왜 그래. 모두 괜히 심각해지잖아. 우리 앞으로 3-40년 이상 충분히 살 텐데미리 죽음을 걱정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평소 쾌활하고 낙천적인 한 친구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한마디 했다.
오래된 지병인 고혈압, 동맥경화, 관절염, 올해 폐암까지, 그로 인한 다양한 합병증 등으로 먹는 약만도 10여 가지가 넘는 친정 엄마의
“나 왜 이렇게 오래 사는 거냐?”
하며 내쉬는 한숨엔 절망만이 가득하다.
숟가락을 쥔 손은 심하게 떨리고 주름 가득한 얼굴엔 물기 한 점이 없다.
웰빙, 한평생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도 모자랄 판에 우린 이제 '웰다잉'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유병 장수를 가져왔다. 죽지 않고 오래 산다. 그런데 질병과 더불어 오래오래 산다. 오죽하면 장수가 축복이 아니고 재앙에 가깝다고 할까?
기저귀를 차고 똥오줌을 누면서 누워 있는다면?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기약 없이 병상에 누워있다면?
콧줄을 달고 음식물을 위장으로 내려보낸다면?
몸 밖에 대변 주머니를 차고 살아간다면?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누구세요?”하고 말을 건넨다면?
치매인 늙은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한 남편 이야기가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라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만은 비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모두가 이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게 우리의 미래라면?
영화 ‘플랜 75’를 봤다. 영화는 일본 사회가 직면한 초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어 노인 인구가 많아지자 의료비와 사회보장 비용 등 부양비용이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안락사를 권장한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행복하다고 TV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선택한 노인에게 마지막 여행과 장례를 지원해 주는 내용이었다.
영화를 본 후의 충격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안락사를 권장하는 국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한 죄책감(?), 민폐감(?)을 느끼는 고령자들.
우리의 미래도?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며 길어진 수명이 반드시 행복이 아님을 가슴 서늘하게 인정했던 기억이 난다.
고령사회를 넘어서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고 한다, 2025년에 우리 사회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가 넘는.
영화는 예상가능한 디스토피아를 보여주었다.
마지막까지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살다가 죽기,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잘 살기와 잘 죽기가 결코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이 와닿는다.
결국엔 다시 ‘잘 사는 삶’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늘 고민하는 ‘잘 사는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
사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그 고민을 매 순간 의식,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살아간다.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기(육체적인 질병은 우리의 존엄을 무자비하게 앗아갈 것이기에)
베풀고 살기
욕심을 버리기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기
남의 눈치 덜 보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
잘 살아가기 위한 금과옥조들이 떠오른다.
나는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웰다잉'을 위한 질문과 답이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안다.
친구들과의 하룻밤 여행은 게을러지려던, 무감해지려던 내 영혼에 한줄기 서늘한 바람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