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입니까?
당신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가끔은 진지하게, 가끔은 진실 게임 하듯 서로에게 장난스레 묻곤 했다. 그러나 나는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에서조차 저 질문을 받으면 무척 진지해진다. 그리곤 답을 찾으려고 허둥댄다.
살아온 나의 그 많은 날 들 속에 하이라이트가 과연 무엇일까?
지난 시간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펼쳐본다.
유년 시절, 학창 시절, 첫사랑, 대학 입학, 취업, 결혼, 그리고 첫 아이의 출생..
하이라이트, 온전한 기쁨으로 가득 찼던 순간이라고 나름 기준을 세워본다.
이런저런 앓이로 힘들었던 10대와 20대, 현재 진행형인 결혼. 하이라이트 후보로 넣기에 다소 미심쩍긴 하지만 나의 역사이기에 일단 내치진 않는다.
첫 아이, 병아리 솜털같이 보드라운 뺨, 코를 가져다 대면 달큰한 과일 향 같은 냄새로 내 숨을 멈추게 했던 아이의 몸 냄새. 몸을 기울여 하염없이 그 냄새에 코 박고 있던 기억. 그 시절이 하이라이트인가?
차 사던 날? 집 사던 날? 일에서의 성취? 오랫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드디어 원하던 길을 찾았다고 편안한 숨 내쉬며 소식 전해오던 날, 그 순간도 후보에 넣는다.
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한두 개가 아니구나, 우열을 정할 수 없구나, 하며 한참 동안 지난 시간을 돌아보다 문득 이제는 더 이상 반짝이는 순간이 내 삶 속에 보이지 않음을 소스라치게 깨닫는다.
은퇴, 일터를 떠난 지 3년이 되어간다. 솔직히 더 이상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 없다. 더 이상 이런저런 성취로 주어지던 기쁨도 없다. 수면제 없으면 잠들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이다. 어쩌다 자고 일어나면 허리와 어깨가 아프고 손가락 마디도 욱신거리고 자꾸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책 한 권 읽는 게 쉽지 않다. 끊임없이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떠오르는 건강 정보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뭘 먹어야 하고 무슨 운동을 하고... 오로지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게 남은 인생의 미션인 듯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한심하고 초라해 보인다.
더 이상 내 인생에 하이라이트는 없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여행을 떠났다. 터키, 화산암과 응회암으로 형성된 기이한 지형으로 유명한 카파도키아의 동굴 호텔. 예전부터 사용하던 동굴을 개조해 만든 이색적인 호텔에 묵었다. 숙소 지붕, 옥상쯤 되어 보이는 크고 넓적한 바위 위에 올라서 바라본 해 질 녘의 광경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화산과 바람, 물, 시간이 만들어낸 바위기둥들, 빗물의 침투에 의한 침식과 풍화로 생크림을 짜 놓은 듯한 기묘한 형태로 탄생한 암석들. 그 암석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마치 벼가 가득한 들판처럼 암석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암석 평야 멀리 지평선 너머로 태양은 마지막 숨을 천천히 내쉬며 온 세상을 감싸 안는 듯 따뜻한 기운과 빛을 아낌없이 하늘에 풀어놓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서도 눈물이 나지만 이렇게 아름다워서도 눈물이 나는구나, 하고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지구라는 별에, 지금, 이 순간 살아있어서 두 눈으로 저 광경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모습을 그 어떤 조각가가, 화가가 흉내 낼 수 있을까? 오직 자연만이, 신만이 가능한 영역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풍경들, 건축물들, 음식들, 사람들. 여행지에서 들이켠 낯선 공기와 냄새, 낯선 목소리들, 빛깔들은 한동안 구석에 처박혀 먼지 쌓여 있던 내 몸속의 더듬이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귀국하는 길, 많은 걸 수확하고 귀가하는 농부가 된 듯 장시간의 비행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 코끝에 닿던 익숙한 공기, 익숙한 열기, 또한 반가웠다. 익숙함을 더 살갑게 느끼기 위해 낯선 곳을 다녀왔나 싶게 반가웠다. 공항버스를 타고 집 근처 정거장에 내린 후 캐리어를 든 채 늘 가던 양평해장국 집으로 들어갔다. 시뻘건 고추기름과 콩나물, 소의 선지와 양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장시간 푹 끓여낸 해장국 국물 한 모금을 입안으로 떠 넣는 순간, 우와 이 맛! 또 눈물이 나려고 했다.
주책맞게 왜 이리 자꾸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결론은 삶의 매 순간이 하이라이트구나, 이다. 너무도 평범한 이 말은 오랫동안 박제된 하나의 문장으로만 나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좀 더 젊었던 시절, 눈앞에 해야 할 일이 끝도 없이 쌓이던 시절, 그 더미를 헤쳐 나오느라 기진맥진해진 지금에 와서야 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저 평범한 말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 어딘가에 늘 존재한다. 내가 못 알아차리고 있을 뿐.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 걸듯 다짐한다.
살아가는 매 순간 졸지 말자고.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깨끗하게 세수하고 양치하고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듯 일상을 만나자고.
오늘의 공기는 어제의 그것과 분명 다른 것이다.
여행지에서 근처 마트와 시장에 들렀다. 마트에서는 터키산 소나무 꿀이 좋다고 하여 꿀을 샀고 ‘그랜드바자르’라는 엄청나게 큰 시장에 들러 구경하면서 냄비 받침대랑 석류 엑기스 등 이것저것을 샀다. 그곳 사람들은 커피 대신 홍차를 즐겨 마시고 홍차의 품질이 좋다고 하여 홍차도 샀다.
내 가족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물품을 아웅다웅 챙기고 사업 파트너 관리하듯 부의금과 축의금을 주고받던 인간관계 속의 그 수많은 챙김이 아닌, 길 걷다가, 둘러보다가, 예쁜 것, 맛있는 것, 눈길 가는 것 앞에 멈추어 서서 건네주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는 기쁨은 신선했다.
터키에서 신성시하고 귀하게 여기는 색은 붉은색과 푸른색이라고 했다. 흔히 터키블루라고 불리는 푸른색은 말 그대로 지중해 물빛을 닮았다. 눈에 띄는 많은 것들이 푸른색을 머금고 있었다. 옷, 장신구, 보석, 그릇, 건물의 외벽 등. 나는 튤립이 터키블루 빛으로 채색된 냄비 받침대를 여러 개 샀다. 그것을 받고 즐거워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설레었다.
요즘은 가끔 죽음을 떠올린다. 팔순이 넘은 양가 부모님들, 남은 날들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네들을 볼 때면 여생, 죽음, 사후의 세계, 고통, 두려움 이런 단어들이 자주 뇌리에 들어와 앉는다.
비켜 갈 수 없는 유일한 것, 모든 이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것, 죽음. 유일하게 공평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죽음이 주는 느낌은 엄정하다. 그 엄정함이 난 두렵다. 봐주기도 유예도 예외도 없기에.
어차피 유한한 삶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죽음이란 단어가 주는 엄정함의 무게감에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혼자 답을 적어본다.
‘매 순간, 더 많은 순간을 하이라이트로 만들자.’라고.
밀도와 채도와 명도가 중요했던 젊은 날의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제는 빈도다. 채도나 밀도가 좀 낮더라도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가슴을 열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자. 매 순간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 되게 하지 말자.
솔직히 말하면 이건 바람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하는 절박한 주문에 가깝다.
일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기를,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될까 봐 두려워서. 결국은 사라짐과 쓸쓸함, 그 허무를 견뎌보려는 내 발버둥이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새벽 공기의 알싸한 기운에 뺨을 내어준다.
어제와 다른 가로수의 빛깔에 눈길이 머문다.
가을 니트를 꺼내며 지난여름의 열기를 떠올린다. 이제 가을,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텃밭에 따도 따도 무수하게 달리는 고추와 상추의 생명력에 놀라워한다.
제철 가지와 새송이버섯을 구워 접시에 담는다. 유명 레스토랑 셰프인 양 우아하게 손을 놀려본다.
마트 야채 코너에 가득 쌓인 생강 더미 앞에 발길을 멈춘다. 생강이 제철이다. 알토란 같이 속이 단단하고 노르스름한 색이 속이 보일 듯 맑다. 살림 솜씨 없는 나이지만 그 앞에서 계속 고민한다. ‘저게 너무 실한데 사서 청을 담가봐? 유튜브 보면서..’
식탁 위에 놓인 냄비 받침을 바라본다.
기지개 켜듯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안에서.
‘나의 일상에 색을 입혀보자. 터키블루 같이 맑고 빛나는 것으로.’
강원도 인제 곰배령 트레킹 여행을 예약했다. 운전이 여의치 않아 곰배령까지 데려다주는 버스 서비스를 이용한다. 저 버스를 타려면 일산에서 새벽에 광화문까지 가는 5시 전 버스를 타야 한다. 수면 장애에 시달리는 내가 새벽 버스를 안 놓치고 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올해, 이 계절이 건네줄 선물꾸러미라면 놓치지 말고 받아야겠다.
10월 말 강원도 골짜기에서 만날 냄새와 빛깔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