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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Aug 09. 2023

일정 테트리스

 무릇 거리공연자는 일정 테트리스에 능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일정을 짜임새 있게 짜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내가 일자를 선택할 수 있는 공연이라면 최대한 다른 섭외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날로 신청한다. 비나 폭염, 추위 같은 외부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혹시 더 가능하다면 동선이나 거리, 기존 일정(가족 행사 등)을 고려하여 정한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전 달 중순 즈음에는 다음 달 일정이 결정된다.

 그러나 인생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긴다. 먼저 날씨 등으로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경우이다. 취소되면 공연비를 받지 못해 예상 수입에 차질이 생긴다. 연기되면 이미 빼곡한 다음 일정 사이에 연기된 공연을 기술적으로 끼워 넣어야 한다. 담당자님과 통화하면서 어플로 이동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정 되지 않는다면 포기해야 한다. 서럽다.


 섭외전화가 오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핫한 날’이 있다. 보통은 주말인데, 평일 중에도 드물게 있다. 다른 날은 아무 일정 없이 판판 노는데도 그날은 이미 공연이 있어 섭외를 고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공연 시간이 겹치지 않더라도 이동시간이 안 맞으면 공연할 수 없다. 선약이 지방공연이라 이동 시간이 아슬아슬하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섭외 공연비가 기존 것보다 많은 경우에는 마음이 아린다. 동료 공연자는 그게 10배나 차이 난 적도 있다고 한다. 선약 공연은 공연자가 신청하는 것이었는데, 공연비는 적지만 그날 노느니 연습할 겸 신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공연비가 어마어마한 섭외가 들어왔다. 보통 공연자들은 선약을 우선한다. 그분도 쓴 울음을 삼키며 비싼 공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친구와의 약속, 가족 행사와 공연이 겹치는 때에도 고민된다. 직장인 친구는 적어도 2주 전에는 약속을 잡자고 한다. 희한하게 그날 딱 섭외가 들어온다. 미안해하며 약속을 미루는 것도 한두 번이다. 이제는 공연자 아닌 친구와 약속을 잡기가 겁난다. 조카 돌잔치 등 가족 행사가 있으면 그것도 어렵다. 그런 날은 흔히 ‘보통 사람’의 휴일인 주말이다. 특히 가을이라면 거의 공연과 겹친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런 과정 자체가 좀 스트레스이다.


 아, 그리고 섭외 전화가 언제 오는지도 알 수 없다. 화장실에 있을 때도 오고, 머리를 감을 때도, 낮잠을 잘 때도 온다. 만일 전화를 받지 못하면 큰일이다. 바로 연락이 안 되면 다른 공연자에게 넘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공연을 놓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공연자들은 항상 휴대폰을 가까이한다. 덕분에 휴대폰 중독이 되는 것도 같다.

이렇게 꼼꼼히 적어 팬카페에 올리지만 언제든 변동될 수 있다.

 나는 원래 계획형 인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다이어리와 공부 노트로 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왔고, 실천하며 뿌듯해 했다. 그러나 프리랜서 해금 연주자가 된 후로는 마음을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다. 스트레스지만, 돌아보면 특별한 변수 없이 무사히 해냈던 공연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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