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면 보이는 것
아래는 한 카톡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엄마.'
'엉.'
'나는 재능이 없는 거 같아. 어떡해.'
'왜, 현타 왔는가'
(나는 엄마가 종종 나와 동생이 쓰는
단어를 쓸 때마다 놀랍고 재밌다)
'ㅋㅋㅋㅋㅋㅋ 그런 거 같아..'
'계기가 뭔데'
엄마는 곧바로 원인을 꺼내어본다.
'나 25일이면 딱 2년 차인데,
어째 입사 초보다 나아진 게 없는 거 같아.'
칼답으로 답하던 엄마.
5분 뒤,
문장들이 몰려온다.
'책 읽고 여행 다니고 뭔가. 전환이 필요해. 직업이라는 게 정체가 아닌 자기 발전이 있어야, 성장하지.'
'나도 그냥 다니지만, 한참 무역을 내가 담당할 때 환율 오르락내리락하니까 좀 더 싸게 구입하려고 경제를 매일 읽고 동향을 살피고 했었지.'
'머리를 쥐어짜서 나오는 건 한계가 있어. 돈을 좇으면 안 되고 나를 성장시키면 돈이 나를 쫓아온다, 이쁜아. 게임도 좋은데 책 읽고 사색하는 시간에 좀 더 투자하길 바란다.
'엄마 말씀, 잔소리 아니여.'
생각의 끈이 느슨해지고 탓할 거리를 찾아 헤매던 한 하이에나는 엄마의 한마디에 곧바로 완벽한 돌멩이가 되어버렸다. 재능이 없다는 걸 탓하기 전에 책이라도 한 권 더 꺼내 읽고 한 문장이라도 더 써보았다면 이렇게나 부끄럽지도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엄마께 세상을 탓하는 바보스런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간 자기 확신이 없고 결과물에 대한 지독한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은 그냥, 쌓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재와 성공한 사람들을 그들을 그렇게나 사랑하면서 왜 그들의 꾸준한 싸움과 치열한 노력은 인정하지 않았을까. 요즘 나에게 더욱 와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핵개인'이라 일컫는 걸 알게 되었다. 빅데이터 박사 송길영은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처럼 사람과 연대해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독립적인 삶의 주체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핵개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리 핵개인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기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아 올려 성공한 사람들. 그들은 단기간에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왜 나는 어리석게도 그들이 쌓은 노력과 경험과 성공을 위해 달려온 시간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지독하게 싸울 용기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의 기준을 남의 시선으로 정하려 했다. 성공의 기준이 남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라 단단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쉽게 쓰러지고 만다. 가진 것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쉽게 무너트려 버린다.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각자의 정착지가 다른 것인데 나는 왜 그들을 기준으로 성공을 정의했을까?
뇌과학자 장동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란 질문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아닌, 어떠한 고통을 겪을 때 나는 그 고통을 감내하고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나'를 질문해 보라고 했다. 나는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럭셔리한 차나 대단히 넓은 집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물질적인 풍요보다 존재의 풍요가 더 깊게 와닿기 때문이다. 나를 만드는 것은 결국 나를 둘러싼 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부터 부여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자.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물질의 풍요에 가려져 존재의 풍요가 흐릿하게 보인다. 어떠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리고 있지 못하지만 어째선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나를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실천한다면 그 길이 조금씩 보일 것만 같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곁에 나를 일깨워주는 엄마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선명하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둘러싼 좋은 사람들을 떳떳하게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