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파움파 움파움파,
인생은 수영이다.
느닷없이 이런 생각이 든 건 여름 수영장에서였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짧은 여름 한 철이면 최대한 물을 즐기려 한다. 수영을 좋아한다지만 사실 그리 잘하는 편도 아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정도다. 생각 같아서는 하늘과 맞닿은 대양의 흑등고래처럼 자유롭고 싶지만 나는 바다에서는 먼 내륙에 산다. 그러니 수영장에 감지덕지하려 한다. ‘수영’이란 활동만 놓고 봐서는 수영장도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 움파움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수면 위아래를 왕복하는, 여름 한 철의 즐거움.
그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코로나 이후 꼭 예약해야만 입장이 가능한, 여름 한 철 문을 여는 공공수영장의 풍경을 이야기하려 한다. 입수와 동시에 나는 수면 아래를 유영한다. 내가 사는 이곳은 한여름도 그리 덥지 않기에 물에 몸을 내맡기고 움파움파를 하지 않으면 쉬이 한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들어간 물속은 영, 딴 세상. 힘을 뺀 오브제들이 보인다. 느리게 하강하는 고무 장난감, 하늘하늘 춤추는 수영복 레이스, 물고기 떼처럼 지나는 허연 다리들. 그것들과 더불어 중력에 대항하던 힘을 빼고 나도 둥실둥실 떠 있다.
때로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고작 2미터의, 여름 한 철 문을 여는 공공수영장의 물속이라지만 심해와도 같은 수압이 내 몸을 내리 민다. 저 아래 수영장 노면을 터치한다. 물속의,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조금은 고독하다. 다시 견딜 수 없으면 위로위로, 수면 위로 올라간다.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굴절없는 물 밖 세상이 생경하다. 내가 무슨 흑등고래도 아니고 그래봤자 물속에 얼마나 있었다고, 물 밖 세상이 정겹게 느껴지는 건지.
햇살이 내려앉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중력을 받으며 웃고 있다.
느닷없이 사는 게 수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로 침잠했다가 다시 수면 위, 예사롭기 그지없는 세상으로 올라오는. 예사로운 세상에선 나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었다. 예전 한국에 살았던 나날에는 수면 위, 예사로운 세상 속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내 친구, 내 가족, 내 문화, 내 언어.
지금은 캐나다 퀘벡에 산다. 압도적인 인구가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이고, 그만큼 (캐나다라지만!) 한인이 없는 곳이다. 영어면 다 되는 이 광활한 북미 천지에 굳이 ‘우리 프랑스계 민족의 언어’에 집착하는 지역을 선택할 교포는 (거의) 없다. 이런 곳에 내가 사는 이유는 단 하나. 남편이란 작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 내 가족, 내 문화, 내 언어와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자주 물속에 침잠해 있는 느낌이 든다. 혼자 수영장을, 화창한 여름의 즐겁고 가족적인 야외 수영장을 혼자만 유영하는 느낌이다. 물론 나도 엄연히, 화창한 여름의 즐겁고 가족적인 야외 수영장에 속해 있다. 나는 내 부모·형제와는 멀리 살지만 현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도 오롯이 혼자인 적이 없으나 한국에서와는 달리 혼자 물속을 유영하는, 조금은 고독한 순간이 압도적으로 긴 것만 같다.
생활은 그런대로 굴러간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결핍을 느낀다. 그게 해외이기 때문인지, 한인 없는 지역에 거주하기 때문인지, 만날 친구가 없기 때문인지, 겨울이 한 해의 반을 차지하기 때문인지.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지날 때가 되었는데도 지나지 않은 계절의 끝자락(3월 3일 영하 20도의 밤)에 지쳐 나는 이런 결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쾌청하고도 무덥지 않은 여름 한 철, 수영장에 다녀온 직후 같은 주제의 글을 청탁받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결을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여기가 먼 만리타향이 아니라 고국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에 쭉 살았더라면 나는 한국에만 사는 지리멸렬함에 대해 적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못돼먹은 바이러스로 인해 해외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며, 먹고사니즘에 일희일비하며, 아이들의 교육환경 따위를 탓하며 유난히 화창하게만 기억되는 이십 대 시절의 어학연수와 배낭여행, 해외 출장 따위를 추억팔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이냐 캐나다냐.
굳이 현재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평균적으로 살기 좋은 축에 드는 두 나라일 것이다. 물론 두 곳에는 서로 다른 강점과 약점이 있다. 이를테면 이민자인 나는 현지의 맛대가리 없는 음식과 느려터진 행정절차에 자주 불만을 토로한다. 그런 내가 주구장창 한국에만 살았다면 어땠을까? 외국은 이런데, 한국은 이게 문제야 ~ 하며 역시 불만을 토로하고 있지는 않을까.
살다 보니 그렇다. 둘 다 좋고 둘 다 나쁘다. 다만 좋고 나쁜 게 각기 다르다. 타국에 이방인으로 살며 카르페디엠 Carpe Dime 이란 흔한 경구을 더 자주 되뇐다. 오롯이 현재에 충실하자, 오롯이 현재 내가 있는 이곳에 살자, 하며. 감정이 종종 롤러코스터를 타는 나는 항상 그러진 못하지만 오늘을 살자고 자주 다짐한다. 그게 남는 거다, 하면서.
현지에 에페메르 (éphémère 순간적인, 덧없는) 란 라벨을 단 맥주가 있다. 맥주병에 붙은 삽화는 물을 묻혀 살살 뜯어내고 싶을 만큼 예쁘다. 금빛을 내뿜는 요정이 현현한 환상의 순간! éphémère! 움파움파, 물속을 유영하다 더는 숨이 차서 바닥에 발을 딛고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처럼. 한국에서든 캐나다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덧없는 기쁨과 슬픔이 현현하는 순간순간이 있다. 비교와 후회, 가정과 계산 따위는 내려놓고 나는 그냥 나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즐길 뿐’ 이어야 한다고 자주 되뇐다. 에페메르를 마시며, 인생 뭐 있나,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