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와인병이 주렁주렁 열린, 포도주를 모두 쏟아낸 체 빈 껍데기만 홀로 남아 있는 그 지친 도시를”
활기찬 오전 점심, 거래처와 미팅을 갔다. 흑백요리사 흑수저로 나왔던 셰프님의 식당이다. 을지로의 공업사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니 고즈넉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그곳에 있었다. 와인바가 인상적이었다. 셰프님은 와인잔을 흰 천으로 닦고 있었고, 나는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 옆 벽면은 빈 와인병들이 세워져 있었다.
빈 병위에 친구처럼 자리를 지키던 코르그 마개는 빠져있다. 와인의 본연의 맛을 보존하기 위해 있던 녀석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코르그 마개의 출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르그는 오크나무의 껍질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소재로, 기공이 많아 병 입구를 밀폐하면서 일정량의 산소를 투과하여 와인을 숙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폴리에틸렌으로 만든 합성 마개와 스크루 캡이 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리병에 담긴 와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는 코르그 마개뿐이다.
코르그 없이는 좋은 와인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쓰이고 나면 버려지는 이것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긴 걸까. 코르그는 떠나고, 병만 어째서 남은 걸까. 그 마개 또한 맛과 향을 지켜내는 중요한 존재였건만, 향만 머금고 떠나버렸다.
“저는 채소의 익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나는 샐러드를 먹다가 최현석 셰프의 말투를 흉내 냈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네요. 최현석 셰프의 악몽이 떠올랐습니다” 셰프가 때마침 직접 식사를 들고 와서 말했다.
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봤다. 셰프님은 친절하게 웃으시며 탁상에 음식을 정갈하게 두셨다.
나는 벽면의 빈 와인병을 다시 바라봤다. 빛바랜 병들은 묵묵히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코르그 마개는 와인병 안에서 수분을 머금고 역할을 다하다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와인도, 마개도 결국 소멸하지만 빈 병에 쓰인 이야기는 오래도록 남는다.
그날 이후 빈 병을 볼 때 떠오르는 건 도시와 삶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와인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