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범 님 안녕하세요. XXX입니다. 2차 면접을 안내드립니다...’
집에 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냈다. 카드사에서 온 새 카드였다. 미리 문자로 고지를 받았기 때문에, 겉면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안에 카드가 들어있는가 만지작 거렸다. 부욱. 집에 도착해서 종이를 반으로 찢었다. 발가벗겨진 채 모습을 드러낸 카드를 집게손가락으로 뺐다.
‘중요한 건 안에 있는 카드일 뿐’
거칠게 찢긴 종이는 글씨를 질질 흘리며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아무짝에 쓸모없어 보이는 종이. 왜 굳이 포장을 저렇게 많이 했을까. 나는 그런 포장은 반대한다. 종이가 아깝고, 인쇄되는 잉크와 전기세도 아깝다. 서울 중구 구청에 따르면 구청 사무실이 한 해 쓰는 628만 장의 종이를 절반만 줄여도 종이와 복사기를 사는데 필요한 예산 7800만 원을 절약할 수 있다.
우편물은 포장을 통해서 우편의 형식으로 보내진다. 만약에 포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배달원도, 우편함도 없어진다. 디지털화에 따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포장이라는 형식이 아이러니하게 시장을 형성하고 이끈다면 너무나 큰 비약일까.
사람에게도 포장이 있다. 사람을 포장하는 시장도 주류 산업이다. 포장은 중요할까? 만약 포장도 볼 것 없이 바로 뜯기는 날이 오면 어떨까. 어느 날 100년 뒤에 디지털화된 취업 시장을 상상해 보자. 면접관은 집에서 클릭 하나로 간편하게 모든 지원자의 정량적 스펙을 비교하며 파악할 수 있다. 과장을 덧붙여서 집에 키우는 강아지 품종 하나만으로 우리 회사와 걸맞은 인재인지 데이터적으로 분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사람을 직접 볼 필요도 없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회사 매칭률, 구성원 간의 조화 등이 수치로 뜨고, AI로 홀로그램을 만들어 모의 면접도 손쉽게 해 볼 것이다.
다시 2024년으로 돌아와 보자. 오늘 나는 면접관을 대면해 면접을 치렀다. 간단한 이력과 살아온 경험을 위주로 물었고, 태도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모두 또박또박 잘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과 부드러운 아이컨택을 유지하면서 비언어적으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런 것들로 나를 포장한다. 비록 어려운 업무를 해내는데 역량이 부족할 수 있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며 한껏 미소 짓는다. 정장과 구두, 알맹이를 까보면 난 그저 글을 잘 쓰고 싶은 29살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데.
만약에 면접관이 편지봉투를 뜯듯 나를 반으로 찢어서 알맹이만 빼냈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만듦새를 보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 안에 있는 내용도 톺아보셨다.
편지봉투를 가차 없이 찢는 나는 본질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긴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알맹이만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포용하지 못한다. 우리는 본디 불완전한 존재임을,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의 역설이 인간미를 만들어 갈 텐데 말이다.
“그게 무슨 비빔밥이에요. 비벼먹을 수가 없는데”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한국계 미국인 이균의 비빔밥이 안성재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그의 불온전한 정체성은 결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서사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우스갯소리와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