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를 가야 하는 이들이 가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에 관하여 - 02편
꿈과 현실의 경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린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는 사실 린치와는 전혀 다른 연출을 보여준다. 괴랄한 주제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공유하지만, 린치의 작품은 초대이고, 크로겐버그의 작품은 관찰이기 때문이다. 초대는 뭐고, 관찰은 또 뭐냐고 묻는다면 어디까지나 내 개인 감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린치의 작품을 살펴보면 모든 인물들이 이상하다. 주인공도 이상하고, 주변 인물들도 이상하다. 모두가 정상을 벗어나있기에 결국 비정상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대"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 비정상인 세계에서 비정상인 인물을 비정상이라 부를 수 있는가? 비정상이 과반수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비정상이 아니게 되는가?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로 초대를 받는 것에 가깝겠다.
하지만 크로겐버그는 다르다. 그의 작품 세계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관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이 비정상인 것이다. 아마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린치의 작품 속에서 살아간다면 별 문제없을 것이다. 차에서 관계 좀 맺으면 어때, 움직이는 모든 건 박아버리겠다고 하는 인간도 있는데.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 존재 자체가 비디오드롬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후 이야기하게 될 테지만, 엔터테인먼트로 변질된 범죄 콘텐츠들은 정말 비디오드롬을 닮았으니까. 그렇게 사형 직전, 포르노가 폭력성을 과잉시키고, 종래에 폭력적인 행위를 장려한다며 포르노에 대해 경고한 남자가 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테드 번디가 그런 말을 했었다. (영상 링크 참조: https://youtu.be/tfwJeHtrWNI?si=HJjqdh5kI9nIcYuO )
우습게도 인기 연쇄살인범인 그는 사형 직전 인터뷰를 했고, 방송되었다. 그것만이 전파를 타지는 않았다. 재판 과정도, 사형 이후도, 따지자면 스너프 필름을 내보내는 비디오드롬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았다. 과열된 분위기와 연쇄살인범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팬덤 문화는 알 권리를 넘어섰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범죄 콘텐츠들은 도덕을 저버렸다. 범죄 콘텐츠는 이미 하나의 유흥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거창한 수식어를 앞세워 대단한 목적을 위해 제작한다고 선전하지만, 사실 알 권리를 표방한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범죄의 현장을 재연하고, 멋들어진 배우들이 살인을 연기하며, 피해자는 수없이 살해된다.
연쇄살인의 황금기라 불린 1970년대의 단연코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테드 번디. 그가 포르노에 대해 언급한 것은 1970년도가 단순히 연쇄살인의 황금기뿐만이 아니라, 포르노의 황금기(Golden Age of Porn 1969 - 1984)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포르노는 황금기가 아닌 시절이 없다. 그 이유는 진화하는 남성의 성욕이나, 기술의 발전이 아닌, 착취의 고리가 끊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해방도, 분출도, 해소도 아닌 착취 위에 뿌리내린 산업이다. 그렇게 1970년대 미국은 히피, 베트남전, 연쇄살인, 포르노 등이 뒤섞여 각종 자극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비디오드롬 속 주인공이 포르노와 폭력적인 콘텐츠를 취급하는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1970년대 미국에서는 동전을 넣으면 여성이 유사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관람하거나, 직접 만질 수 있는 유흥 장르가(peep show) 있었다. -분닥세인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가림막 같은 것이 내려와 더 이상 관람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오락 유흥 시설은 대단히 단순하고, 모욕적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자극적인 콘텐츠와 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것일까? 영화는 공익광고가 아니다. 어차피 감독이 해석을 내놓지 않는 이상, 답지는 없다. 다만, 비디오드롬을 영웅서사라고 볼 수는 없기에 더욱 찝찝한 감정이 남는다. 비디오드롬에 맞서자고 하지만, 사실 비디오드롬을 알게 되는 경위 또한 그가 비디오드롬을 소비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는 흥분하고, 소비하며, 동시에 생산해 내는 위치에 있다. 비디오드롬을 양지로 끌어올리려는 그의 시도를 기억하자. 결국 환각을 보고 다른 인물들을 쏴 죽이면서 그는 또다시 비디오드롬을 생산해 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유도 경위도 알 수 없는 살인이란, 비디오드롬이 생산해 내는 스너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결말에 이르러, 결국 그는 새로운 육신을 얻기 위해 생을 마감한다.
나는 이 대목이 조금은 다르게 와닿았다. 여기서 새로운 육신은 결국 비디오테이프에 박제된 기록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방대한 인터넷 속에 숨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 미디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죽지 못해 떠도는 혼령은, 21세기인 지금 유령만을 뜻하지 않는다. 각종 범죄, 사고 현장의 시체들이 고어 사이트에 그대로 업로드되어 삭제되지도 못한 채 박제된다.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 기생하는 이들이, 죽은 이들의 안식을 방해한다. 현실의 육체는 죽었는데, 영상 속 육체는 죽지도 못한다. 마치 죽지 않는 육신을 얻은 것처럼. 원치 않은 영생이 이리도 많다.
long live the new flesh!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