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 오늘도 걷습니다(1)
옛날부터 저는 비염이 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비염인 줄도 몰랐었어요. 그저 환절기 때면 찾아오는 감기 정도로만 알았었죠. 그때부터 저는 입보다는 코로 숨을 쉬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렇게 시작한 비염을 평생 안고 가는 줄 알았어요. 대부분의 분들이 그렇듯 비염 증상이 완화된 적이 없었거든요. 약을 먹어도 훌쩍, 비염에 좋은 음식과 물을 챙겨 먹어도 훌쩍. 저는 그렇게 비염과 싸우는 훌쩍남 이었어요.
그런 저의 비염 인생에 아주 극적인 날이 찾아왔어요. 훌쩍남 인생에 반전이었죠. 비염 증상이 부쩍 줄어든 것이었죠. 어떻게 그렀냐고요? 글쎄요, 저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신혼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저는 한동안 비염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었어요. 환경이 변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는데 그때 당시에 저는 '결혼을 하면 비염이 없어지는구나' 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1차원적인 생각을 했었어요.
코로 숨을 쉰다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재채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삶의 질을 높여주는지에 대해 새삼 감사함을 느꼈고 더 이상 내 인생에는 비염 따윈 없다라며 기뻤었죠.
지금이요? 지금은 다시 훌쩍남 시즌2의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훌쩍.
훌쩍. 거릴 때면 환절기가 찾아왔단 걸 의미해요. 어쩌면 일기예보보다 정확한 게 제 재채기일 수 있어요. 훌쩍 에 서 에취!로 넘어가면 본격적인 환절기가 시작되었단 걸 의미해요. 그렇게 비염만으로도 힘든 저에게 코피가 찾아왔어요.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할 때면 뜬금없이 코피가 흐르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매일 코피가 납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아침에만 코피가 나더니 이제는 저녁에도 가끔 흐르네요.
[내일은 병원에 가봐 제발! 맨날 간다고만 하지 말고!]
대한민국 남편들 국룰 아닌가요? 간다고만 하고 안 가기 시전. 아내의 걱정이 날로 심해지더니 결국 한 소릴 하더라고요. 왜 이리 말을 안 듣냐며 버럭 화를 냈어요.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코피를 달고 살았긴 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주변에 코피를 흘리는 사람이 없었던 아내는 무척이나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였대요.
그제야 저는 못 이기는 척하고 회사에 연차를 내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설마 설마 했었는데 역시는 역시더라고요. 코피의 원인은 비염과 관계가 있었어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저의 오른쪽 코 안쪽 부분이 약간 휘어서 쉽게 건조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환절기에 코피 나는 부분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최대한 건조하지 않게 연고 등도 발라주며 관리를 해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저는 먹는 비염약과 코 안쪽에 바르는 연고를 처방받았어요.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 약국에서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병원에 가볼 걸'이라는 생각 말에요.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요. 훌쩍거림도 코피도 이제는 조금 줄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집으로 가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집에 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고작(?) 병원만 갔다가 집에 가서 황금 같은 연차를 써버리는 건 왠지 싫더라고요. 그렇게 집 말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어요. 때마침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도 매일 10,000보 걷기를 목표로 세운 참이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같은 연차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요, 사람은 역시 계획을 해야 하나 봐요. 무작정 걷고자 하니 딱히 갈 곳이 없더라고요. 의미 있게 연차를 보내야 하는데... 어디라도 가야 하는데... 도대체 난 어디로 가야 하오... 그렇게 1분, 2분 시간만 흘려보내다 결국 항상 가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서점 가는 걸 좋아합니다. 왠지 모를 안정감도 들고, 서점 특유의 냄새도 좋아하거든요. 딱히 할 게 없을 때면, 시간을 때워야 할 때면 저는 늘 서점을 가곤 합니다. 황금 같은 연차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결국 또 서점으로 와버렸네요. 서점은 참 넉넉한 곳 같아요. 책을 사도 되고 사지 않아도 되고요. 또 책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 날도 책은 사지 않았고 책만 실컷 구경하고 왔습니다.
서점에 다녀올 때면 왠지 모를 뿌듯함 같은 게 있어요.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주는 위안이랄까요? 누가 보면 참 별 것도 아닌 부분일 텐데, 이런 사소함에 뿌듯함을 느끼는 저라는 사람. 이상한가요?
갑작스레 코피가 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갑자기 연차를 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교보문고를 다녀왔습니다. 왜 이리 갑작스러운 것 투성이야! 하며 계획적이지 않은 일상을 투덜거렸는데 막상 계획적이지 않은 것들이 모여 꽤나 의미 있는 하루가 돼버린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하루가 완성된 것은 무작정 '걷기' 때문이고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걸을 예정입니다. 지금처럼 찬찬히 거북이처럼 천천히.
누군가가 저에게 "왜 걸으세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겠죠.
그때 당당하게 답하고 싶어요.
"저는 글을 쓰기 위해 걷습니다."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