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바뀌지 않는다.-1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으면 했던 말.
중학교 시절의 반은 어머니 미용실 안에 있는 쪽방에서 지냈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사춘기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도 겪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우선이었던 삶을 살게 되었고 그 영향이었는지, 제 자신은 뒷전이 되었으며 이타적인 성격이 된 것이 오히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변화가 많았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별 탈없이 조용하고 무난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특히나 조용히 지내서 그런 지 크게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없습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점이라면, 도덕적인 규범에 위배되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은연중에 저는 제 상황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이 아픔을 남들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같은 처지는 아니더라도 처지가 어려운 친구들을 솔선하여 도와주는 일에 자그마한 행복을 느꼈었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처럼 유독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동정을 느꼈고 쉬는 시간 때마다 그 친구들에게 괴롭히는 친구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먼저 가서 같이 놀아주고 도와주며 친해졌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느꼈던 모든 악한 경험들은 남들은 똑같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중학교 시절부터 굳건히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는 마이스터고에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막바지에 한창 친구들이 어느 고등학교 갈지 서로 얘기하고 고민하던 시기에 저는 또 무릎을 다쳐서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같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입학해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미용실 손님들께 전해 들은 이야기로 저에게 마이스터고를 꼭 입학했으면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 기술이 있어서 본인도 미용 일을 하면서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셔서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추천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싫어했고 반대를 심하게 했었습니다. 마이스터고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가게 된다면 동네 친구들과는 거의 결별하다시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이렇게 원하시는 데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을 하게 되었고 (괜히 병원 옥상 가서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었던 기억도 나네요..ㅋㅋㅋ 우리 집안 불교인데..) 깁스한 다리로 목발 짚으며 학교까지 면접 보러 간 패기 때문이었는지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필리핀 어학연수 기간 만들었던 추억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토익 성적 상위권 순으로 추첨을 하여 필리핀 어학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타가이타이라는 지역의 학원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학원장과 학생들을 관리하시던 소위 팀장으로 불리었던 분은 한국분이었습니다. 수업을 진행하시던 선생님들은 전부 필리핀분이었고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았어서 그런지 학원생활 전반적으로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필리핀 이야기를 하려면 끝도 없을 것 같은데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점은 학생들이 필리핀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양의 고기를 사들고 바비큐 파티를 선물해줬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어학연수 프로그램 내에 바비큐 파티가 있기는 했었지만, 학생들의 넘치는 기대치에 일말의 부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식판에 고기 몇 점 얹어주는 것이 끝이었습니다.
학원장과 팀장이라는 사람은 늘 필리핀 선생님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기 일쑤였고 배려나 존경심 따위는 없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그 모습에 굉장히 화가 났었고 어느 날은 저희 기숙사에 팀장을 불러놓고 그동안의 행실에 대해 새벽까지 취조하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마닐라에 있는 대형마트인 SM몰에 추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쟁취했습니다. 그 결과로 저희는 한국에 들고 올 선물들을 포함해서 필리핀 선생님들과의 바비큐 파티를 위한 고기 15kg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의 바비큐 파티는 제가 겪어본 파티 중 가장 크고 활기찬 파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필리핀 선생님들은 그날 저희에게 원 없이 학원장과 팀장에 대한 불만들을 표출했었고 학원에서 선생 일을 하는 동안 사람답게 대해주는 한국인들이 없었는데, 한국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며 끝없는 감사를 표했습니다.(10년가량이 지났는데도 아직 까지 감사하고 그립다고 페이스북으로 감사인사를 해주십니다..ㅋㅋ) 이 날의 경험으로 인해 저는 한층 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이처럼 무난하게 잘 지내왔지만 그동안 제 자신에게 가장 싫었던 점이고 바뀌지 않았던 점이 있는데, 바로 소심한 성격이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시절 겪었던 경험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고등학교 시절에도 택시를 타면 택시 아저씨께 태워주셔서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턱 끝까지 말이 차올랐으나 끝내 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었습니다. 뚱뚱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운이 좋게도 저는 공기업에 취업할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입사일이 정해지고 저는 무언가 하나는 꼭 이루고 입사를 하고 싶다 생각하였고, 그 결정은 혹독한 다이어트였습니다. 방학기간까지 활용해서 몇 달간 꾸준히 노력하여 20kg 넘게 감량을 하였고 입사 당일 저녁, 회사 교육원에 태워다 줄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같이 입사하게 된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타 지역 학교 친구들도 함께 모였었는데 다이어트를 할 때 사람들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강행했었기에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은 살이 빠진 제 모습에 놀람을 금치 못했고 이목이 집중 되었었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남들의 관심이 정말 어색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로 입사일 이후 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도중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살이 빠진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저만 왜 안 왔냐고 다그치시기도 하였습니다..ㅋㅋㅋ
인생의 첫 다이어트가 제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남들의 따가운 시선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제게 관심을 가져주고 잘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감정과 더불어 이 상황에 대한 괴리감도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이어트를 하니 사람들이 잘해주더라.. 하는 것이 인정하긴 싫지만 가슴 아픈 현실이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당시 상황을 기회로 삼고 싶었습니다. 제 소심한 성격을 바꾸기 위한 기회로. 하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소심함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겉모습은 달라졌을지라도 피해의식이 제 속을 좀먹고 있었던 것은 그대로였기에 남들이 친절히 대해주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고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더라도 진심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된 시기였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