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유 Sep 18. 2022

밀물과 썰물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나만의 물결


나만의 결

결이란 태 와는 미묘하게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태껏 ’태와 결은 조금은 달라.’ 정도로만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있던 암묵적인 귀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결’의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으니 내 깊은 골짜기에 귀결되어있던 결과 태의 차이점을 조금이나마 해석해보고, 결이 맞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나의 결과 타인의 결의 합 : [合] 서로가 서로의 하나의 중심축을 공유 결’ 합[合]’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더군다나 나는 타인이 정의 내린 평가나 기준들보다 내 자신의 감각과 감성을 더 신뢰하고 우선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타인과의 견고한 중심축을 공유하기 위해서 우선 나의 태와 결이 단단해져야만 했다. 그렇지 못하다면 서로의 축은 내진설계 공사를 지하층부터 단단하게 지탱해주지 못하는 어느 한 건축물처럼 금방 어딘가가 삐끗거리다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가 내린 취향의 결론이 좋다, 나쁘다, 별로다에 대한 판단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로 인해 타인에게 나의 취향을 강요하거나 이것이 맞다 등의 맹목적인 구애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피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결’의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대체로 바다의 ‘물결’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는 조수간만의 차이처럼 나만의 결이 풍부한 썰물이 되어 곁에 다양한 것들. 취향, 취미, 생각,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풍요롭게 모든 것들이 곁에 스며들어 내 취향의 축을 확장시켜주었다가, 다시 밀물로 생각의 전환할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빠져나가며 수축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의 틈’을 조금이라도 내 곁에 머무르며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고 싶다면 정말 진부하고 지루하게도. 굳이 또 언급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말이지만 나만의 결. 나만의 파도가 주위 환경, 상황, 여력, 분위기, 흐름에 집어삼켜지지 않아야 하며, 나의 취향이 -확고해야만 했다.-

취향의 세계는 각각, 개인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옭아매어 구성되어 있는 집합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과 취향, 감성, 감각의 날이 서 있어 그에 따른 삶의 방식 또한 다를 수 있다.

누가 보면 조금은 예민하다고 할 정도.  굳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유 모를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 비난쯤이야 이기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온전히 내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주 조금은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단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 취향이란 단순히 귀걸이 목걸이처럼 오늘의 분위기 기분에 맞춰 사용했다 버렸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일회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월급을 200만 원 남짓한 돈은 받더라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의 작품을 사기 위해 3개월 할부라도 해서 구매하는 사람. 어느 날 유튜브에서 들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 C장조에 빠져 중고 클래식 엘피를 수집하는 사람. 르 라보 상탈의 향이 너무 좋아서 상탈 샤워젤과 상탈 바디로션까지 구비해 두는 사람. 없으면 중고라도 구매해서 사용하는 사람. 등등

취향이란 주위 소속된 집단에서의 규율 혹은 규칙, 아니꼽게 보는 조금은 까칠한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더라도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각자가 정말 좋아하는 것, 재미있어하는 것, 그 분야, 그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면 세 시간도 떠들 수 있는 사람, 이런 취향의 깊이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람이 자신만의 파도. 본인만의 중심축을 확고히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세계를 사는 우리가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며 다른 감정을 간직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말과 행동을 선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섬김으로써 오직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태 가 겉으로 표출되는 것이라면 결은 내면의 것들이 얼마나 촘촘한지, 섬세한지를 나타내 주는 하나의 ‘감각의 각도’가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표현해주는 거 같다.

그리고 나의 각도들이 제련되고 서서히 날카로워 시작할 때 즈음에 나만의 ‘태’가 조금씩 조금씩 생레몬을 착즙 한 레몬주스병에서 서서히 새어 나와 유리병에 달라붙은 산성분처럼 본인의 걸음걸이 말투, 딕션, 표현력, 눈빛, 손짓에서 모두 새어 나와 본인만의 ‘태[態]와 물결 ’이 표출될 것이다.





:결이 ‘같은’ 사람, 결이 ‘맞는’ 사람

-MBTI를 먼저 물어보는 건 관계를 망치는 행위이다.


: 청개구리 같지만 누군가의 결이 나와 같다면 매력을 못 느낀다.


근 몇 년 사이 인간관계를 두고 서로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주제인 엠비티아이가 최대 이슈였다. 맹신론 자부터 과학이다 라는 의견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들이 꽤나 주위에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며, 이제는 혈액형과 이상형을 물어보는 대신 엠비티아이로 나에게 맞는 이상향을 찾기까지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엠비티아이로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고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화두인 만큼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비유를 좀 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다.

사람을 판단하는 여러 척도와 기준점들이 있지만 그중 엠비티아이는 나에게 있어 ‘수학 해설집’ 정도의 역할이다. 굳이 맞추려 하면 못 맞추겠고 정답을 듣고 나면 ‘아. 맞아 이렇게 풀었었지’ 하고 되뇌게 되는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와도 같았다. 학창 시절 교과 문제집을 풀 때 기억이 나는가?

문제를 풀기도 전에 해설집을 먼저 참고해 버리면 문제에 출제의도와 정답 그리고 풀이 방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에게도 엠비티아이란 타인을 알아가는데 있어 먼저 알고 싶지는 않은 하나의 해설집 같은 존재이다. 꽤나 이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파악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데 엠비티아이부터 들이밀다니.. 이건 그저 타인의 삶과 살아온 시간들 동안 쌓인 취향, 감정, 감각, 생각, 가치관 등 모든 부분을 날로 먹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단축시킬,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하나의 효율을 들이밀며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이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이러나 하게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모순적일 때가 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오늘 밤새 대화만 해도 그 어떠한 술안주보다도 배부를 것만 같은 사람,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효율화를 명목으로 한 질문들을 한 적이 있다. 백그라운드를 몰라도 단 몇 마디로 그 사람이 궁금해지고 더 대화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었다. 이런 경우에 엠비티아이를 물어보게 되는데 항상 아이러니하게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에게는 매력을 ‘절대 느끼지 못했다.’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대 형성에는 탁월하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미뤄 보았을 때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는 조금 결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과거에는 나와 정말 같은 유형에 데칼코마니 같은 사람을 선호했는데(비단 이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성, 친구, 지인이라는 타이틀 이전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 요즘은 취향이 조금 달라도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사람이 더 좋고, 엠비티아이가 다르더라도 나와는 다른 관점의 생각을 리트머스 종이처럼 퍼지듯이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마치 모두가 좋아하는 페페로니 피자 말고 호불호가 나뉘어도 매력적인 파인애플 피자처럼





이런 관점에서 결이 ‘같은’ 사람과 결이 ‘맞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성격이 비슷한, 결이 비슷한 사람들은 모난 부분, 날이 선 감각의 각도, 서로가 예민한 부분들이 맞물리기 때문에 자전거의 톱니바퀴가 유기적으로 공존하기가 힘든 구조가 형성된다.

자전거의 톱니바퀴가 평생을 맞물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날이 서 있는 각도가 전부 다르기 때문인 것처럼 인간관계에도 어느 정도는 서로의 다른 모습, 모난 모습을 존중하고 서로가 보완하고 흡수하며 함께 공존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의 시작이 아닐까?

서로가 비난하고 혐오하고 경쟁하고 비교하고 무례하고 헐뜯고 할퀼 이유를 찾는다면 대형 한 트럭을 가득 채울 수 있겠지만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는 서로가 좋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함. 고작 이 이유가 전부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이유를 소중히 여겨야 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금 오글거리게도 지금 막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결이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시간을 보내려 하고, 대화를 하고, 사랑하는 이성과의 처음으로 하는 스킨십인 서로의 손을 깍지 끼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 인간 삶 속에 깊게 내재된 ‘본능적인 결이 맞는 사람을 향한 감각’에 의해서 비롯되는 행동이 아닐까 하고 생각만 할 뿐이다.

그래서.

취향의 ‘합[合]’ 은 두 영혼에게 통일을 경험시켜준다.

그건 일종의 정신적 섹스와 같은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취향이라는 건 단순히 매운 거를 싫어한다 혹은 좋아한다 식의 단순한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 문제가 생기더라도 결국엔 각자의 취향이라는 키워드 덕분에 서로는 더 단단해지면서도 개인의 독립성, 자율성 같은 정신적 성숙의 곡선 그래프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그려졌다.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 것들

김 경 :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게 끌린다.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일상의 여백

작가의 이전글 태 : [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