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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댕굴이 Nov 19. 2022

평범한 직장인은 왜 히어로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가

"제 이름은 피터 파커예요."
                                                    "닥터 스트레인지다."
"이런, 히어로명으로 소개하기예요?
 크흠, 저는 스파이더맨이에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中)


모든 히어로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본명과 다른 히어로명이 있다는 것.

이름보다는 대리 과장 따위의 직급으로 불리는 직장인의 삶은, 인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과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면 히어로의 삶과 꽤나 비슷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삶의 소중한 순간을 제쳐두고 위험한 장소로 날아가는 히어로처럼, 직장인은 '내가 없으면 방치 엉망이 될지 모를' 일을 구하기 위해 고 싶은 일을 꾹 참고 근길 나선다.

히어로에게 지구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있다면, 직장인에겐 생계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있다.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면 모를까, 매일의 출퇴근이 생계 수단에 불과한 쟁이에게 직장인은 그저 부캐에 지나지 않는다. 장인이라는 사회생활용 가면을 쓰고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부캐로 살아간다.


고작 부캐 주제에 인생 출연 비중은 꽤 높은 탓에, 본캐의 은 부캐로 인해 엉망이 되기 일쑤다.




토니 스타크, 스티브 로저스, 스티븐 스트레인지, 피터 퀼, 피터 파커.


히어로가 본캐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 있다. 오랜 친구와 대화할 때,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일 때.  

히어로가 아닌 본래의 자신이 되는 순간. 

본캐의 시간.


(출처: 디즈니)

마블 영화 속 히어로들에게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라는 것 외에 유하는 공통 서사가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현시점에서 보면 스파이더맨은 연인 MJ로부터 잊혀고, 비전을 잃은 완다는 흑화했으며,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떤 멀티버스로 이동해도 연인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 자신을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토르의 연인인 제인 묠니르로 생명을 연장하지만 결국 그 묠니르로 토르를 돕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쯤 되면 히어로들에게 사랑 타령하지 말고 인류를 구하는데 집중하라는 우주의 엄명이라도 떨어진 듯하다.


히어로들이 연인과 이어지지 못한 궁극적인 이유는 인류를 구한다는 사명감이 연인에 대한 사랑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혼 사유로 '일이 바빠 가정에 소홀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들은 히어로라는 부캐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비대해지는 것을 컨트롤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본캐의 인생에 소중한 것들을 놓쳐 버린다.


기껏 전 지구를 (심지어는 우주까지) 위기에서 구해놓고 왔는데 정작 '내 인생'은 없어져버린 히어로들의 삶을 보고 있자니 퇴근 후 엉망진창이 되곤 하는 내 기분을 떠올리게 된다.




본캐와 부캐의 밸런스는 마치 워라밸과 같다. 히어로든 직장인이든 본캐와 부캐 간의 밸런스가 붕괴되는 순간 꿈꾸던 삶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정시 퇴근을 해도, 건강한 워라밸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퇴근하고 나면 회사일은 잊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뜻대로 되는 일인가. 회사에서 겪은 불쾌한 일, 누군가로 인해 분통 터졌던 순간, 속상하거나 억울했던 일은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잠시만 방심하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계속 곱씹어봤자 내 기분만 더 끌어내릴 뿐이고 결국 나만 손해인 걸 알면서도 최소 몇 시간은 꼼짝없이 그 감정에 지배당하고 만다.


더럽혀진 기분을 정화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분을 삭이든,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든. 그러다 보면 하루 얼마 되지도 않는 본캐의 시간마저 부캐에게 령되는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일도 아닌데! 열심히 해봤자 급을 올려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인생의 소중한 시간마저 부캐에게 빼앗기고 있는 걸까.




히어로 연애 잔혹사를 쓰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유일하게 연인과 이어진 히어로가 있다. 캡틴 아메리카, 그는 자발적으로 히어로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연인과 함께 늙어가는 평범한 삶을 택다.


배려심도, 책임감도, 도덕심도 없는 사람은 내 기분을 망쳐놓고 불금과 주말을 즐기러 떠났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부캐가 겪은 그 일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좋지도 않은 감정을 곱씹고 있을까. 화창한 주말 아침에 만끽해야 할 본캐의 소중한 시간을 망쳐봤자 나만 손해인데.


10년이면 직장인 모드 ON/OFF가 능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참 어렵다. 행복한 본캐의 인생을 위해 부캐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감정에 억지로 마침표를 찍어본다.


오늘은 롯이 본캐의 시간이다. 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눠야겠다. 

소중 것에 집중하도 짧은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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