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스러운 워라밸에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좋은데,저녁만 있고 저녁 먹고 할 게 없다.
'다들 뭐하고 살지?' '요즘 애들은 뭐하고 놀지?'
한동안 입에 달고 사는 질문이었다.
오랜만에 대학교 때 친구들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친구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요새 주말에 뭐해? 뭐 재밌는 거 없냐?"
눈앞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션 수행하듯 뭔가를 계속 쳐내야 했던 학생, 신입, 대리의 신분을 지나이제는 주어진 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여기서 더 나아질 게 없는 사회적 임계점에 도달했다.이쯤이면 임원의 씨앗인지 여부는 진즉 판가름이 나있으니까. 잘 버티면 부장이고 아니어도 상관없고.
그렇다면 주어진 일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해두고 주어지지 않은 일을 하자.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에너지를 쏟자.결심은 했는데 난관에 봉착했다.
하고 싶은 게 없다.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도, 간절히 이뤄내고 싶은 꿈도 어디론가 흩어졌다. 꿈과 희망이 자취를 감춘 저녁시간. 밥을 다 먹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는 것'이 퇴근 후 첫 번째 할 일이다. 정처 없이 재미를 찾아 헤매며 귀로는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티비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관성적으로 손에 쥔 스마트폰을 훑는다. 지루함에 뒤척이다 끝내 첫 번째 할 일조차 완수하지 못하고 잠을 청하는 일상의 반복.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었다.회사에서도 전략을 수립할 때 무조건 하는 게 있다. 경쟁사 벤치마킹. 말이 경쟁사지, 사실은 그럴싸해보이는건 동종업계가 아니어도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다.
직장력을 발휘하여 취미든 커리어든타인의 삶을벤치마킹해보기로 했다.막상 주변과 트렌드에 관심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니 다들 참 열심히 살고 있었다.시시각각 바뀌는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각종 트렌드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젊은 층 타겟으로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는 매체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쏟아지는 정보와 올라오는 피드를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저녁 시간이 바빠졌다. 그중에 하나쯤은 내가 좋아하는 게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트렌드를 '아는 것'과 '즐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요즘 사람들은 어떤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살까 궁금해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모든 것이 '돈 쓰는 재미'와 '돈 쓰는 내 모습을 전시하는 재미'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돈으로 재미를 사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내 모습을 전시하는 것에는 도통 마음이 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벤치마킹은 벤치마킹으로만 끝이 난다.벤치마킹은 보고서의 구색 맞추기용일 뿐,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제안한 내용은 예산 부족과 인력 운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야금야금 축소되다가 종국에는 '우리 사정에 맞는 것을 하자'며사장된다.
나 또한새로운 걸 해보겠다고 나섰지만벤치마킹결과마다나의 사정에 맞지 않는 이유를 떠올리고 있었다. 돈이 없다던가, 시간이 없다던가, 능력이 안된다거나, 그냥 열정이 없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