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요즘 AI 그림이 화제다.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에 맞춰 AI가 자동으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인데, 불과 1년 전만 해도 초보적인 단계로 인식됐던 것과 달리 놀라운 퀄리티를 보인다. 알파고의 바둑 대전 이후 AI산업은 큰 관심을 모았지만, 창의성은 인간 고유 능력이며 예술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란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 예상을 엇나가고 AI는 예술의 대표격인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유의해야할 점은 AI의 퀄리티가 아니라 발전 속도다. 처음 AI 그림이 대두되고 1년도 채 안돼 지금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의 발전은 더욱 가팔라질 것이며, 더 많은 인간 고유 영역에 도전할 것이다.
이런 AI가 발전의 끝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가능하고, 심지어 월등하다면. 엄밀히 말해 인간은 더이상 지구의 최상위에 서있다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독립된 존재로 나선다는 '생각'을 품게 될 지 모른다. <블레이드러너 2049>는 고도로 발전된 미래.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사는 세상 속 일을 다룬다. 안드로이드의 반란을 겪은 세계에서 신세대 안드로이드들은 더욱 강한 통제를 받는다.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 안드로이드 K가 특별함이란 궁금증을 쫓아 인간다움을 갖춰나가는 길고 긴 영화다.
경찰형 안드로이드 K가 맡는 임무는 과거의 산물인 구세대 안드로이드들을 체포, 제거하는 것이다. 한 때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고, 이로 인해 전원 폐기 대상이 된 구세대 안드로이드들 중 아직 살아 숨어다니는 이들을 쫓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 안드로이드를 폐기한 K. 그러나 우연히 눈에 들어온 나무 한그루와 그 밑에 숨겨져있던 유골에 잠들어있던 기억이 깨어난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어릴 적 기억. 그마저도 생산될 때 삽입된 인위적인 기억이라 생각해왔건만 나무에 새겨진 날짜와 기억 속 날짜가 일치하는 우연이 심상치 않다. 혹시 자신은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의 자식. 나무 밑에 숨겨졌던 유골 주인의 아들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피어오르는 순간이다. 평생을 안드로이드로 살아왔고, 스스로를 인간의 하수인으로 여겨왔던 삶에서 처음으로 특별함이란 소망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축복보다 저주로 보였으니. 어머니인 유골 주인은 다름 아닌 안드로이드였던 것이다. 안드로이드의 생식을 통해 탄생한 자식이 맞다면, 발각 즉시 해부 대상이 되고 말 것임을 아는 K는 이를 부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K는 한번 품은 궁금증을 쫓아 임무를 핑계로 살아있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비로소 아버지로 추정되는 데커드를 만났지만 K의 꿈은 오래가지 않는다. K를 추적해온 월레스 사에 데커드를 빼앗기고 그토록 소망해온 데커드의 자식은 본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친구 조이 역시 폐기된다. 자신은 평범한 안드로이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K. 안드로이드의 독립을 도모하는 집단으로부터 비밀 유지를 위해 데커드를 죽여야 한다는 임무까지 부여받는다. 하지만 K는 비로소 특별한 존재가 되길 선택한다. 호송되는 데커드를 찾아가 구출한 뒤, 그를 죽이지 않고 본인이 깨달은 데커드의 진짜 딸과 만나게 해준다. 데커드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은 K는 부녀 간 만남을 맺어주고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죽어간다.
K는 인간의 밑바닥을 닦는 존재에서 어엿한 인간이 되고 싶어했고, K의 인공지능 홀로그램 제품이며 동반자인 조이는 이런 K가 특별한 존재가 되길 응원했다. 사실 조이가 없었다면 K는 과연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처음 나무에 각인된 숫자를 봤을 때도, 유골 주인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K는 애써 우연이라며 넘어가려 했다. 혹시나 하는 의심이 핌에도 그 주인공이 자신이라면 전가될 책임의 무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K 옆에는 조이가 있었다. 조이는 K 마음 속 잠재된 특별함에 대한 욕구를 끄집어냈다. 지속적으로 K의 자존감을 올려줬다. 조이가 없었다면 K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 혼란에 빠진 K에게 조이는 또 한번 영향을 미친다. 망신창이가 된 채 거리를 걷는 K 앞에 나타난 홍보용 조이 홀로그램. 오랫동안 동반자였던 자신의 조이를 떠올리며 K는 다시 한번 특별해질 용기를 낸다. 이미 K의 조이는 전투 도중 폐기되버린 상태였지만 K의 기억 속에 남아 K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조이는 이렇게 K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어쩌면 안드로이드보다도 취급이 못한, 홀로그램 제품이었던 조이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따른 것뿐일지라도) K만을 바라보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K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그가 데커드를 구출하러 가는 순간 인간다움을, 특별함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K는 안드로이드로서 평생을 인간의 명령대로 살아왔다. 내려져오는 임무에 충실하고 그 외 행동은 불허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본인 의지로 움직인 것이 데커드를 찾아 그의 아지트로 출발한 것이다. 물론 이 때까지는 자신이 인간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확실한 때는 본인이 제조된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든 동기가 사라진 상태일 때도 데커드를 살리자는 선택을 한 그 순간인 것이다. 이 때의 K는 데커드를 죽이라는 일종의 명령을 받았지만, 스스로 그 명령을 거부하고 본인의 판단대로 밀어붙혔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주체성을 갖고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들이 고뇌한 끝에 내린 결론 '개인의 주체성'.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 영화 속 안드로이드가 고도로 발달해도 인간은 아니던 이유는 이 주체성이 빠져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본 영화의 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반역자 안드로이드 집단은 스스로 노예로 죽기를 거부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체성이 부여됐기에 가능한 알고리즘 밖의 행동이었다. 이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조사는 신모델을 만들 때 순종성을 강화시켰다. 감정, 주체적 의지는 인간의 것임을 못박고 이를 영원히 갖지 못하며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할 존재로 탄생시켰다. 그래서 K는 수동적 존재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은 그를 인간에 멀어지게 만들었고, 평범한 안드로이드로 가둬놓았다.
그런 K가 데커드를 구해 딸과 만나게 하는 선택은 그의 삶에 있어 처음으로 주체성을 가진 순간이었다. 비로소 안드로이드와 인간 간의 벽이었던 주체성을 거머쥐고, 나아가 위험을 무릅쓰며 아버지와 딸의 재회를 이루어주는 인간적인 선택을 고른 것이다. 이렇게 K는 끝으로 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끝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마무리 지었다. 그가 엔딩 씬에서 눈을 감지 않으려 최대한 버티며 감기지 않은 채 죽는 것은 스스로 목표했던 특별한 존재에 다다렀음을 자각했기에 한 행동이다. 영화 속 안드로이드들은 정체가 드러나는 유일한 수단인 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반면, K는 더이상 부끄러울게 없는 떳떳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러너2049>의 빌런 월레스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다. 대위기를 맞은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원하고 사라질 뻔한 안드로이드를 재생산해 인류의 제 2 부흥기를 이끌었다. 마침내는 우주개척을 위해 더 많은 안드로이드, 스스로 생식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목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을 찾으려 한다. 따지고 보았을 때 인류 입장에서 그는 구원자이다. 자수성가하여 정점에 올랐고 다 죽을 뻔한 인류를 위기에서 끄집어 냈다. 영화 속에서 안드로이드에게나 냉철히 대하지 데커드를 제외한 인간에게 해를 끼친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아버지임에도 철저히 인간의 편에서 인류의 부흥을 꿈꿨다. 안드로이드는 그저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월레스가 다른 영화들 속 빌런 마냥 극악무도한 악인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안드로이드 생산량을 늘리려는 목표를 이루려고 K와 데커드를 추적한다. 그에게도 엄연한 신념을 추구하는 행위였다. 그 과정이 강제적이었을 뿐이지. 다만 데커드, K와 대조적인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인간임에도, 인류의 발전을 추구하는 인물임에도 영화 속 행동들을 보면 인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창조해낸 피조물을 실패작이라며 가차없이 죽이는 것과 데커드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레이첼을 안드로이드로 똑같이 만들어 유혹한 뒤 실패하자마자 죽이는 것은 정녕 인간적인 면모라고 할 수 없다. 그가 창조하는 안드로이드들에게 감정을 억제시켰지만, 그 역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월레스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으로 캐릭터 구축을 한 것은 그 이유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안드로이드는 아니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인간으로 실격이기 때문이다.
블레이드러너 세계 속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별점은 감정과 주체성이다. 세계관 속 인간들은 안드로이드들을 보고 영혼이 없는 깡통이라 낮춰 부른다. 하지만 K같은 사례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K의 행동은 마땅히 감정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였다. 스스로 염원하던 것을 죽음을 불사하며 이뤄냈다. 이런 그에게 영혼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인간임을 판단하는 기준이 영혼이라면 K는 충분히 인간으로 부를 수 있다. 원작 소설이 기반으로 한 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그는 인간답게 행동하기에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사람 마음이란게 인정하기 영 쉽지 않다.
그런들 어떠하리. K는 스스로 특별함을 자각하며 삶의 마무리를 설계했다. 우리가 아무리 K를 인정하냐 마냐해봤자 K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고 뿌듯함 속에 잠들었다. 안드로이드를 어디까지 인정하는 문제는 아마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난제일 것이다. 다만 미래 안드로이드가 탄생한다면 그 중에는 K같은, 인간 입장에서 불량품이라 일컬는 영혼을 가진 존재도 반드시 나타날 게다. 그 존재가 나타난다면 인류는 안드로이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지 모른다. 안드로이드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까는 의문. 그 의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바로 K가 가진 특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