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키울 수 있는 집
대학교 때 첫 자취집을 잘못 구해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고 나서부터는 깨끗한 오피스텔 원룸만 구해서 살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웬만한 가전제품이 풀옵션인 닭장 같은 오피스텔이 많았고, 혼자 살기에는 그만큼 편하고 안전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서 더 이상 오피스텔 원룸은 충분하지 않았다. 남편과 짐을 합치자 방에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무리 둘 다 직장 생활하느라 잠자고 밥만 먹는 곳이라지만 너무 좁았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임신 소식이 찾아왔다. 큰일 났다. 우리는 이제 "자취방"이 아닌 "우리 집"을 구해야 했다. 아기를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제대로 된 집 말이다. 그렇게 집을 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처음엔 서울에서 괜찮은 빌라 전세 매물이 있는지 사당, 구로 등의 동네를 있는 대로 돌아다니며 찾아봤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자취방에서 방 하나 정도 더 있는 정도였고, 가격이 쌀 수록 상태도 좋지 않았다. 세탁기가 집 밖에 있는 곳도 있었고, 구조가 이상한 집도 더러 있었다. 담배 연기와 쓰레기가 널린 골목 사이사이로 찾아다녀야 하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그마저도 매물이 별로 없어 집을 보는 사람들끼리 눈치게임을 하며 먼저 계약금을 넣는 5~10분 차이로 집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과 나의 보증금을 합쳐 1억 정도를 손에 쥐고 있는데도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1억이 이렇게 적은 돈이던가? 우리가 1억을 벌어서 모으는 건 아득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큰돈이었는데. 부동산 시장에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라는 씁쓸한 사실만 민망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적은 돈으로 어떻게 집을 구해야 할까. 아니, 어떤 집을 구해야 우리도 만족스럽고 아이도 안전하게 키울 수 있을까. 일단 전세에서 매매로 거래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1억은 우리에게 거금이었고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좋은 집을 구한다 해도 사는 기간 동안 보증금은 정체되어 있는 돈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대출을 받아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자산을 늘릴 수 있는 매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가격은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주변 인프라를 정리해 보았다. 빌라보다는 아파트가 좋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가까이에 여러 군데 있고, 병원도 있으며, 마트나 시장이 가까우면 좋겠다. 아이를 데리고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가 있으며 주차장도 있어야 하고, 방은 최소 2개 이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개발자인 남편과 기획자 겸 디자이너인 나도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필요한 집의 형태가 척척 그려졌다. 그리고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답은 하나였다. 서울은 답이 아니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멀어질수록 원하는 집에 가까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남편의 출퇴근길이 고될 거 같아 여러 번 의논했지만 그보다는 아기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우선이라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인천 토박이이다. 서울로 대학을 다니기 전까지 인천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천의 아파트 시장에는 대략적인 정보가 탑재되어 있었다. 특히 부모님 집이 송도 국제도시에 있어 친정이 가까운 곳에 둥지를 트고 싶었다. 그러나 송도 국제도시는 신도시라 너무나도 비쌌다. 이러면 서울과 다를 바 없는데? 그래서 그 옆 동네, 송도 밖에 있는 동네를 기준으로 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집을 알아보며 부동산에 관심이 생겼고, 시도 때도 없이 부동산 어플을 들여다보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카페에 가입해서 특정 지역의 부동산 시세를 살펴보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부동산을 공부하며 알게 된 것은 입지가 좋은 곳엔 신축 아파트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입지가 좋다는 것은 역세권, 학세권, 몰세권 이 세 가지 중 최소 한 가지 이상을 만족시킨다는 것인데 그런 곳은 오래전에 개발이 끝난 상태이거나,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한 재건축 신청을 하는 경우, 혹은 신도시를 만드는 경우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약을 하지 않고 매매를 선택한 이유였다. 입지가 좋은 곳이어야 우리가 5년 뒤에 다시 이사를 생각할 때 집값이 떨어지지 않고 최소 유지, 최대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입지가 좋은 곳에 있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구축 아파트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이 과연 있을까? 미션 임파서블만큼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있었다. 그런 곳이. 대형마트 두 곳이 도보 10분 거리에 있고, 더블 역세권에,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작은 공원도 있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입지가 좋은 그 지역 대장 아파트. 평수도 소형 평수인 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심지어 이곳은 내 친구가 살았던 아파트라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살겠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복잡한 심정으로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부동산을 찾아갔다.
부동산을 통해 몇 개의 매물을 보았다. 우리가 본 집은 방 3개에 화장실 1개가 있는 판상형의 24평형 아파트였다. 25년도 더 된 오래된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금성이었다. 이건 문화재 신청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집주인이 아무리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두더라도 '이곳이다!'라는 기분이 들기는 쉽지 않다. 어떤 집주인은 귤까지 쥐어주며 잘 봐달라고 부탁도 하더랬다. 아마 집을 급하게 내놓은 것이리라.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인지, 식물이 사는 곳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화분이 가득한 집도 있었고, 햇빛이 세서 창문마다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좋다고 하는 집도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들른 집은 꼭대기 층이었는데 이미 짐을 빼서 비어있는 공실이었다. 그 집은 25년 전의 그 인테리어 그대로인 듯했다. 빛바랜 벽지에 장판이 깔려있고, 유광 타일에 찢어진 스티커가 붙어있는 그런 집. 그래서 그런지 집 값도 가장 쌌다. 하지만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이 집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전망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대로변에 맞닿는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고, 앞에는 작은 동산과 실개천이 있었다. 집주인은 이미 다른 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인테리어 공사 기간을 충분히 줄 수 있다고 했다. 최저 가격에 최고의 전망을 가진 전체 리모델링이 꼭 필요한 집. 바로 이 집이다 싶었다. 2016년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