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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나 해볼까

#첫 마음

by 조명찬


뉴스에서 중국에서 발생한 우한폐렴이 중국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시 전체를 폐쇄시킨다고 했고 중국과 관련된 무역사업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우한에 있는 한국인들을 하루빨리 송환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나운서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지만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남의 일이었다. 중국의 일이었고, 가족 중에 중국과 무역하는 사람도 없었고, 교민도 없었으니까....

중국에 사는 친구가 생각나서 안부를 전하긴 했다. 그곳에 있으면 얼마나 불안할까? 친구가 별 탈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몹시 찬 겨울이었고 2020년의 새해였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일하기 싫은 날이었다. 추워서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천장형 히터를 틀어 두니 실내가 금세 건조해졌다. 목이 더 칼칼해지는 것만 같아 마른침만 계속 삼켰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 초저녁부터 누워 있고 싶었다.


-하루쯤은 그래도 되지 뭐.


생각만 그렇지 실천은 못한다. 하루가 이틀 되고 이틀이 삼일이 되고, 결국 나태해질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 매장에 계속 나오게 한다. 자영업에서 잘 쉬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쉬지 못하면 우울해진다. 인생이 아까워진다. 그리고 더 깊게 우울해진다. 점심영업을 마치고 2시간의 브레이크 타임동안 엎드려 '조니미첼'을 들었다. 숨소리까지 우울한 여자의 읊조리는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우울한 마음이 오히려 조금 풀리는 것 같다.

독을 독으로 치료하듯 가끔은 우울을 우울의 분위기로 이겨낸다. 잠을 잔 것도 아니고 잠을 자지 않은 것도 아닌 경계의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에 오픈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유리문 밖으로 키 큰 아저씨가 보였다. 50대 정도로 보였고 처음 본 사람이었다.


-아직 오픈 안 했어요?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지도 못한 채 일단 문을 열었다. 아직 잠이 덜 깨 있었다.


-아직이에요?


-아. 네.


나는 확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인가 보군요. 혼자 온 건데 간단히 한잔만 하고 금방 가면 안 될 가요?


-그러시죠.


정중한 손님의 말이 문 앞에 서있던 나를 비켜 세워 길을 내게 했다. 편한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지만 손님은 굳이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메뉴판을 정독했다. 주문한 메뉴는 ‘잡채’ 그리고 따뜻한 정종 한잔. 야채를 가지런하게 썰고 미리 불려 양념해 둔 당면을 따로 볶아 빠르게 잡채를 만들었다. 정중을 중탕으로 데우고 동시에 정종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기를 더해 두었다. 애써 데운 정종이 차가운 잔에 의해 빨리 식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손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종을 먼저 후후 불며 조심스레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기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따끈한 정종이 식도를 통과했다가 심장을 통해 온몸으로 온기를 나눠준 후 마지막으로 내뱉는 콧김을 통해 전해지는 달달한 향기.


그는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 식사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음악 볼륨을 조금 높였다. 매장에는 ‘Half moon run’의 ‘warmest regards’가 흐르고 있었다. 음악과 매장의 정적 사이에 젓가락이 접시를 헤엄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한 번씩 들리는 그의 느긋한 감탄사. 그 감탄은 정종을 마시고 난 후라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감탄이 얼마나 공감이 되던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바로 지금의 분위기가 내가 가게를 시작하기 전에 꿈꿨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손님이 단 한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손님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 식당을 열기 전에 나는 분명 그런 다짐을 했었다. 그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매출에만 온통 신경이 쓰였다. 가끔 매장에 손님이 한 테이블만 있으면, 저 테이블만 없어도 빨리 문을 닫고 집에 갈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첫 마음을 너무 빨리 잃고 있었다.


-아이고, 잘 먹었어요. 이 근처에 이렇게 정종을 데워주는 곳도 있었네. 오늘은 야근하는데 힘이 날 것 같네요.


문밖으로 나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얘기했다.


‘다음에 오시면 따끈한 정종 한잔을 제가 대접할게요.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으면 좋겠네요. 정종이 더 맛있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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