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5일 차
7-1코스
서귀포버스터미널-제주올레여행자센터 올레(≈15.7km)
3월
하루 만에 날씨가 좋아졌다. 어제와 딴판인 하늘이 파랗고도 밝았다. 마침 아내가 제주시 출장이 있다며 가는 길에 나를 서귀포터미널에 내려준다 한다. 맑은 예보를 앞두고 한라산을 갈지 올레길을 걸을지 잠자기 전까지 고민을 했더랬다. 에잇, 이왕이면 집에서 가까운 편인 7-1코스를 걷기로 했다. 해가 좋은 날 고근산을 오르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없기에, 한라산으로 깊게 들어가느니 멀리서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잘 갔다 와, 아내와 헤어지고 9시 50분. 서귀포버스터미널 앞에서 7-1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었다. 번화한 신서귀포 시내 도로 앞이었다. 복잡하도록 차들이 많았다. 날씨 덕에 기분만은 상쾌하니 좋았다. 당분간 이런 날씨는 없을지도 몰라 오늘 하루를 만끽해야 했다.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선명했다. 모든 장면은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산책을 즐기는 동네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다. 저마다의 표정이 햇살의 풍경을 닮아 산뜻했다.
길을 건너 공원과 마을을 올랐다. 도로와 골목을 거치며 위로 위로 언덕을 오르는 모양새였다. 오르막과 계단을 오르다 빌라 사이로난 뜬금없는 숲길로 빠진다. 할아버지 스쿠터가 폴폴 거리며 흙길을 빠져나왔다. 뾰롱뾰롱 짹짹, 새소리가 수풀 어디선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강창학공원의 뒤편, 기후대응 도시숲 조성 중이라는 안내표지가 세워져 있었다. 듬성듬성 심어둔 나무들은 아직 어려 앙상했다.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빠르게 지나갔다. 왼쪽 아래로는 바다와 함께 월드컵경기장과 범섬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삐죽삐죽 아파트들 사이로 오가는 차들의 행렬이 작은 점처럼 보였다.
귤밭도 있고 매화도 있다. 야자수도 있고 돌담도 있었다. 꽃이 핀 나무에선 벌떼 소리가 가득했다. 곳곳으로 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콘크리트길을 걷다 도로를 건너 엉또폭포로 향한다. 모든 길이 한적했다. 아직까지 올레꾼은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조용했고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느긋했고 어딘가 여유로웠다. 길의 연결이 매끄러웠다. 숲과 골목이 번갈아 있었다.
한라산에 요 며칠 눈이 내렸다곤 하지만 아직 녹아 흘러내리지는 못했나 보다. 엉또폭포는 바짝 말라있었다. 11시 10분. 그 절벽 앞까지 올랐다 돌아 내려왔다. 동백꽃이 한껏 핀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 주변의 귤밭에는 어째서인지 귤들이 여태 알알이 다 달려 있었다. 전망대에서 마라도가 보이지 않았다. 맑은 날씨에 비해 공기엔 뿌연 기가 좀 있었다.
엉또폭포를 지나 다시 길을 올랐다. 이제 고근산으로 향하는 숲길이 시작된다. 내내 오르막이었다. 처음엔 만만했지만 뒤로 갈수록 힘겨워졌다. 평소 고근산을 오를 때와는 다른 훨씬 긴 길이었다. 그래도 쉼 없이 올랐다. 마지막의 가파른 나무 계단길이 조금 버겁긴 했다. 숨이 찼다. 허벅지도 요동쳤다.
고근산에서의 풍경은 말할 것도 없다. 산방산과 송악산 그리고 가파도까지 다 보였다. (역시 오늘의 시야로는 딱 거기까지. 마라도는 여기서도 무리다.) 분화구의 둘레를 따라 범섬과 문섬, 새섬과 섶섬도 번갈아 보였다. 운동을 즐기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역시 표정들이 밝았다. 다들 이 뒷편 길로 올라오진 않으신 거죠? 나만 땀을 뚝뚝 쏟아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한라산의 머리가 슬그머니 걷히며 활짝 드러났다. 아아, 고근산에서의 하이라이트다. 이래서 날 좋은 날 오르고 싶었던 거였다. 최근 동안 고근산에 왔을 땐 늘 날씨가 맞지 않아 볼 수가 없었던 풍경이다. 덕분에 번드르르한 나의 표정도 환하게 밝아졌다. 여기서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올레길을 통틀어 가장 멋진 풍경에 놓인 스탬프 간세 중 하나였다.(다른 하나는 아마도 9코스 군산에 있는 중간 간세) 12시 5분. 날은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최근에 보수 공수를 진행했던 건지, 고근산을 내려오는 계단은 새로 만든 듯 번듯했다. 평소에 다니던 방향의 길이 아니어서 생소하고도 신선했다. 한라산을 내내 마주 보고 내렸다. 가파른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다 내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다시 길은 한적해졌다. 콘크리트 골목이 잠시, 곧 도로로 나왔다.
서호요양원이 보였고, 제남아동복지센터도 보였다. 점심시간을 맞아 도로 산책을 즐기는 직원분들이 계셨다. (서귀포 지역 내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를 했다 보니 저분들의 모습이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오다가다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도로 위로 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 끝자락으로 걸린 바다가 여름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1136 지방도로까지 내려왔다. 다시 번잡한 교통을 만나 귀가 시끄러워졌다. 길 건너로 단골 국밥집이 있었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물며 12시 40분, 식사를 하기에도 딱 안성만춤인 시간이었다.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주문을 했다. 아, 모처럼 먹는 국물이 심심하게 꽉 들어찼다. 아마 7-1코스를 걷는 대부분의 올레꾼들이 위치와 타이밍, 맛까지 완벽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나 맛있다. 든든히도 먹었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 숨이 찰 지경이었다.(병천한가네돼지국밥, 링크 클릭)
1시 20분, 다시 길을 이었다. 호근동 마을과 골목 사이사이를 유영하듯 구경했다. 4월이면 벚꽃이 만개할 이 동네가 상상만으로도 선명히 그려졌다. 올봄에도 벚꽃 보러 꼭 와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걷다, 도로를 건넜다. 하논분화구로 향하는 길이다. 숲처럼 한적한 그 길은 하논분화구로 닿는 내리막이었다. 볕뉘가 아롱거리는 길의 마디마디, 반짝임은 숨을 죽이듯 나직이 춤을 추고 있었다.
분지처럼 생긴 하논분화구도 일종의 오름이다. 국내 유일의 마르(Maar)형 분화구라 했다. 용암과 화산재가 분출하며 솟아오른 일반적인 오름과는 달리, 땅속 깊이 흐르던 마그마가 지하수와 만나며 폭발해 생성된 분화구로 지표면보다 낮게 형성된 것이 그 특징이다. 보통 물이 채워져 얕은 호수를 만든다는데, 용천수가 분출되는 하논분화구는 이 습지를 논으로 활용해 왔다. 제주에서 벼농사라니, 조금만 생각해 봐도 신기하디 신기하다. 하논이라는 말 자체가 '논이 많다'라는 제주말이라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논농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십 년 만에 온 터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었는데, 하논을 통과하는 이 길과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동안 무심했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논 너머로 한라산도 가까이 보였다. 흙길 일부 구간은 늪처럼 질척해 걷는데 조금은 조심을 해야 했다. 길을 따라 난 수로에는 빛과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우주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힘없는 풀도 몽땅 잘린 벼도, 야자수도 닭장 안의 닭들도, 모두 나른한 오후를 숨죽이며 즐기는 듯했다. 길이 끝물로 다다를수록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덩달아 느슨해져 갔다.
마지막 마을을 빠져 걸매생태공원으로 닿았다. 어째선지 마음이 툭 하고 놓이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여기 머물러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쉬멍놀멍 시간을 보냈다. 활짝 핀 매화를 구경하느라 넋을 놓았다. 흐르는 계곡 아래까지 내려가 한동안 때린 물멍도 한몫 거들었다. 어차피 걸매를 빠져나가고 나면 곧 만날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길은 끝이 난다. 그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물과 꽃에 조금이라도 더 시선을 놓아두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니까 그건 정신건강에 좋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3시 20분 즈음 공원을 빠져나왔다. 길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걸매생태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고새 구름이 갇혀버린 한라산은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길을 마저 마무리했다. 거기서 고작 5분 남짓일까, 종점 스탬프와 함께 7-1코스도 끝이 났다. 어떡할까 하다 그냥 집까지도 걸어가기로 했다. 30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됐다. 하지만 역시 다리가 아팠다. 무거운 짐도 없는데 왜 이리 피곤한지 모르겠다. 지나버린 시간만큼 조금이라도 늙은 게 분명했다.
이제 내일부터 주구장창 흐림과 비의 연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직 고사리 철도 아닌데, 마치 고사리 장마인 양 우중충한 날씨만이 내내 기다렸다.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그래도 비는 필요했고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비가 오면 엉또목포는 멈췄던 물길을 터 신나게 그 위용을 내어주겠지. 머리로만 상상하며, 내일이면 잊힐 햇살 아래 환한 골목을 최대한 즐겼다.
2025.03.06.
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5일 차(누적거리 71.1km)
오늘 하루 31,982보(24.8km)
*제주 올레길 7-1코스 공식 소개는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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