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 백서향이 아직

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3일 차

by 달여리
14-1코스(역방향)
저지-서광 올레(≈9.3km)
2월


<아직 오픈 전인 오설록 티 뮤지엄>

어제에 이어 연달아 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원래는 순서에 맞춰 1코스 다음으로 2코스를 걸으려 했는데, 출발하며 즉흥적으로 계획을 14-1코스로 바꿨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문득 백서향이 피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선흘리와 함께 저지곶자왈이 제주 백서향 군락지로 아주 유명하다. 하물며 14-1코스는 그 저지곶자왈을 깊게 관통하는 길이다. 개화 시기에는 취할 정도로 향긋한 냄새가 숲 안 가득하다고 했다. 보통은 3월 초가 제철이지만, 작년에는 2월 말쯤 일찍 꽃이 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이 든 건, 기억에 떠오른 진한 백서향 향기 덕분이었다. 흐리다고 예보했던 날씨마저 나긋한 햇빛을 비추고 있어 그 마음이 더해졌다. 오늘도 길은 아내와 함께였다.

<오설록의 녹차밭>

14-1코스의 종점인 오설록 티 뮤지엄에 주차를 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텐데, 이른 아침이라 빈자리가 넘쳐났다. 검색해 보니 시작점으로 가는 버스는 30분 후에나 온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느니 우리는 여기서부터 곧장 역방향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사실 제주 올레길을 역방향으로 걷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길의 끝자락에 있는 저지곶자왈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됐다. 하긴 깊은 숲에서 맞는 아침 햇살만큼 좋은 게 또 없지.


오설록 티 뮤지엄은 아직 오픈 전이라 고요했다. 몇몇 아침을 준비하는 직원분들만이 분주한 듯 사뿐히 오고 가셨다. 너무 오랜만이라 헷갈려 올레길 지점을 찾는 데는 조금 헤맸다. 산책로를 따라 이쪽저쪽 서성이다 멈춰 서 갸우뚱거리길 반복. 아, 찾았다. 저기다. 티 뮤지엄을 바라본 방향으로 녹차밭 좌측 위편 끄트머리 부근에 14-1코스 종점이 자그맣게 보였다. 단단한 밭의 가장자리를 걷는 동안 햇볕이 따사롭게 걸음을 따라왔다. 8시 10분, 종점 스탬프를 야무지게 찍었다. 그것이 오늘 걸음의 시작 신호가 됐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기분, 바로 곶자왈로 든다. 멀리 까치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이따금 우지근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도 났다. 촘촘한 간격으로 안내된 올레 표식 띠가 아주 잘 보였다. 역방향으로도 충분히 걸을만했다. 표식 띠와 화살표만 잘 따르면 됐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코스 운영팀이 얼마나 고생하고 계실지 길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정말인지 전 세계 어딜 가도 이만큼 길 안내가 잘 되어있는 트레일이 있을까 싶었다. 특히 곶자왈처럼 깊은 숲일수록 이런 안내가 중요하다. 간혹 통신이 터지지 않는 구간도 있으므로 걷는 이들 또한 걸음에 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지곶자왈의 풍경>

숲과 숲 사이로 난 좁은 콘크리트길을 건넜다. 녹색 철조망과 길가의 넝쿨이 곳곳으로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곶자왈 답게 바닥은 대체로 울퉁불퉁 얇은 흙이 덮인 바위였다. 곧잘 넘어지는 아내의 걸음을 예의 주시하며, 숲의 적막을 나름대로 즐겼다. 까치 소리가 물러나자 찌르찌르 새소리가 들려왔다. 곧 봄이라도 올 모양인 지 그 소리가 참 맑고도 청명했다.


충분히 들어온 것 같은데도 아직 아무런 향기가 없어 어쩐지 조바심이 났다. 혹시나 백서향 군락지를 놓치기라도 할까 싶어 연신 두리번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 무향의 걸음 도중, 이윽고 백서향 군락지가 은연중에 나타났다. 걸은 지 겨우 20~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꽃이 몇 개 피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직 망울져 추위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아내가 아니었더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조심스레 코를 대보니 핀 꽃에서는 깊은 향기가 났다. 우린 서로를 마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쉽지만 곶자왈만 따로 다시 와보기로 했다. 앞으로 며칠간 계속될 비가 그치고 나면, 그 일주일 후쯤에는 완전히 만개할 것으로 기대가 됐다.

<저지곶자왈의 백서향>

뒤이어 반복된 콘크리트길과 흙길을 번갈아 밟았다. 9시 반, 곧 문도지오름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 중간 스탬프 간세가 놓여 있었다. 오름은 아쉽게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그 연유가 궁금했지만 별다른 안내는 되어있지 않았다. (후에 알아본 바에 의해서는 토지 소유주의 배려로 인해 통행이 가능했던 것이 한 올레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폐쇄된 것이라 한다.) 내내 숲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하늘이 어느새 탁 트여 넓고 파랬다. 미세먼지는 좀 있지만, 이만하면 날이 좋았다. 걷던 방향 그대로 오름의 둘레를 따라 길을 이었다. 예쁜 문도지오름을 오르지 못하는 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산책을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나름의 데이트가 됐다.


말 농장을 지난다. 길 위에도 풀숲에도 말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푸드덕거리는 꿩의 날갯소리에 와락 놀라기도 일쑤였다. 커다란 팽나무 앞에선 시선과 걸음이 나직이 머물렀다. 걷다 보니 각자의 상념에 젖어 서로의 말수가 줄었다. 함께 걷는 정적의 길은 또 그것대로 편했다. 산책길이 끝나자 시골길이 이어졌다. 비닐하우스와 밭이 지그재그로 번갈아 나타났다. 정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이따금 마주쳤다. 그때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저지리 마을로 서서히 다가선다.

<문도지오름 입구를 지나 저지마을까지>

길이 도로로 빠지나 싶더니 좁은 돌담길로 쑤욱 든다. 햇빛이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이 그 그림자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돌담을 거니는 걸음도 어쩐지 사부작거렸다. 마을의 중심으로 나올수록 길 위로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체로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멀끔한 그들과 달리 왠지 우린 어딘가 추레했다. 아뿔싸, 지나는 길목에 있는 책방 소리소문이 문을 닫았다. 하필 아직 오픈 시간 전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책방이라 모처럼 기대했건만, 둘러보고 싶어도 당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책방 소리소문, 링크 클릭)


곧 다시 도로가 나왔다. 길을 건너자마자 14·14-1코스 시작점이자 13코스 종점으로 닿는다. 바로 뒤로 제주올레공식안내소가 있었지만 굳이 들어가 보진 않았다. 스탬프만 쾅 찍으며 오늘의 길을 딱 끝냈다. 11시 반, 짧은 코스라 여유롭도록 이르게 마무리가 됐다.


근처 해장국 가게에서 점심을 맛나게 해치웠다.(저지해장국, 링크 클릭) 이제 오픈 시간이 넘은 책방에도 들렀다 간다. 버스를 타고 오설록으로 돌아왔을 땐, 그 넓은 주차장이 거의 다 차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에 갑자기 혼미했다. 그럼에도 오랜만의 오설록 표 말차라떼 한 잔 사 먹으며 여유도 좀 부리다 간다.(오설록 티 뮤지엄, 링크 클릭) 한 모금, 달콤씁쓸한 향내가 입안 가득 퍼졌다. 그래, 걸었으니 이 정도의 사치는 부릴만하지. 다만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시끄러운데다 여기 어울릴만한 몰골은 아니었기에.


어차피 또 올 거다. 만개한 백서향 보러 다시 와야지. 곧.

대신 그땐 이왕이면 번듯한 꼬락서니로.

우아하도록 라떼에 다쿠아즈까지 곁들여.



<결국 백서향은 한 달 후에야 만개했다. 3월 24일, 저지곶자왈의 백서향>




2025.02.26.

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3일 차(누적거리 42.0km)

오늘 하루 21,679보(13.9km)





<10년 전, 걸으며 진행했던 그림엽서 프로젝트(14-1코스)>




*제주 올레길 14-1코스 공식 소개는 여기 클릭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라이킷을 눌러주세요.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5편, 재완주 제주 올레길월/수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