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또 따로

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2일 차

by 달여리
1코스
시흥-광치기 올레(≈15.1km)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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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빛 운전, 성산의 햇살과 일출봉 곁을 지난 푸른 버스>

제주 올레길 1코스 시흥-광치기 올레를 아내와 함께 걷기로 한 날이었다. 이리저리 골똘하다 1코스 종점 부근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시작점까지는 201번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6시 알람에 재깍 일어나 7시쯤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흐린 줄 알았던 하늘 아래 붉게 번져오는 태양이 아름다웠다. 묘한 분위기로 휩싸인 도로 위가 마치 꿈결 같았다. 가는 길 운전은 아내가 맡았다. 덕분에 창밖을 구경하며 편하게 갔다. 농담 같은 대화를 두서없이 주고받았다. 하늘이 걷힐수록 날이 밝아져 갔다. 함께 가는 길이라 어쩐지 기분이 넉넉했다. 그렇게 우린 해를 쫓듯 동쪽으로 동쪽으로 멀리 향했다.

<말미오름 정상의 풍경>

1시간쯤을 달려 도착한 광치기 해변 공영주차장. 주섬주섬 채비를 하는데 201번 버스가 휑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뿔싸, 한 뼘 차이로 코앞에서 놓쳤다. 바람이 불었고, 아직 남은 겨울 공기가 찼다. 요즘 한참 재미 들인 발차기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몸을 데우는 데는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다음 버스는 20분쯤 후에 다시 왔다. 버스 안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른편 차창, 성산일출봉이 역광 위로 흐른다. 나긋한 공기가 공중에 머물러 나른했다. 시작점 근처 시흥리 정류장까지는 겨우 10분 남짓. 적어도 네댓 시간을 걸어 다시 돌아갈 15km의 길이 벌써부터 무색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내리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시작점은 정류장에서 100m 정도만 걸어가면 됐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무래도 옛 생각이 났다. 10년 전, 종달리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은 뒤 여기서부터 제주 올레길을 시작했었다. 맞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퇴사 후 떠난 4개월의 여행에서 돌아온 뒤 제주 올레길을 걸었었다. 꼭 데칼코마니처럼 10년을 텀으로 개인의 역사가 반복된다. 다만 그땐 초여름이었고, 지금은 늦겨울이다. 망원동 주민이었던 게 이제 서귀포 주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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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리정류장~알오름, 풍경>

8시 45분. 스탬프를 찍은 뒤 제주 올레길 1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매섭다 생각했는데, 햇빛 덕분인지 걸음 때문인지 금세 땀이 났다. 말미오름으로 향하는 밭담길을 걸었다. 분뇨 냄새가 은근했다. 근사한 절벽 아래 무밭과 당근밭이 번갈아 보였다.


초입께 있는 제주올레공식안내소를 지나자 곧 말미오름의 입구가 나왔다. 사유지라 처음 올레길을 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절실한 설득이 있었다고 했나, '1'코스 답게 심지어 모든 코스 중 가장 먼저 개장한 코스가 바로 여기다. 말을 많이 풀어놔 말미오름이라 하고, 몸집이 큰 산이란 뜻으로 두산봉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이 오름 경계로 서귀포시와 제주시가 나뉜다. 북쪽은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남쪽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다.


오름길이 꽤나 가팔랐다. 그에 대한 보상처럼 정상에는 너르고 시원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뒤쪽으로는 눈 덮인 한라산이 훤히 보였다. 먼저 올라 아내가 따라오길 잠시 기다렸다. 한라산과 바다를 번갈아 보느라 고개가 바빴다. 언제 봐도 반짝이는 먼바다는 늘 멋지다. 한라산은 뭐 말할 것도 없지. 비친 창으로 거울이라도 좀 보려다, 이 외진 산불 예방 초소에 누군가 일을 하고 계셔 흠칫 놀랐다. 가만히 바람을 좀 쐬었다고 금방 땀이 식어 몸에 한기가 든다. 발을 동동 굴렸다. 아, 저기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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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오름~종달리옛소금밭, 풍경>

말미오름을 내려 밭길을 잠시 걸었다. 곧 다시 만난 오름은 새알처럼 생겼다는 알오름이었다. 얕은 언덕을 오르듯 정상은 금방이다. 그 사이 구름에 갇혀버린 한라산이 이젠 잘 보이지 않았다. 한층 더 가까워진 동쪽 바다는 역광으로 검게 섰다. 누런 들판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일출을 봐도 근사하겠다 싶었다. 그럴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까먹지 않으려 메모장에 '알오름 일출'이라 적어뒀다.


알오름마저 내려오고 나니 콘크리트 길과 밭길이 번갈아 나왔다. 길은 금방 도로로 이어졌다. 일주도로를 건너 종달리 마을로 들어선다. 여기 초입에 아내가 미리 찾아둔 밥집이 있었다.(종달미소, 링크 클릭) 11시 15분.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아, 만 원의 행복이었다. 맛 좋고 다양한 음식으로 가득한 한식 뷔페였다. 실컷 먹었다. 가게 입구엔 "맛있게 먹고 웃고 가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진짜 그러고 간다.


든든한 배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종달초등학교 옆을 지나 아기자기한 종달 마을 중심으로 파고든다. 10년 전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분명 이 근처였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굳이 옛 기록을 찾아보니 게스트하우스는 없는 대신 동일한 이름의 독채 민박은 검색이 됐다. 아마도 같은 사장님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추측을 해본다. 작은 공용공간에 둘러 복닥거리며 막걸리 파티를 했던 기억이 어렴풋했다. 이런저런 대화가 나름 재미가 있었더랬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 살게 될지 꿈에도 몰랐지. 우여곡절이 만나 이런 모양의 현재가 됐다. 나름 만족? 때마침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우리.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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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옛소금밭~목화휴게소, 풍경>

제주 최초의 염전이었다는 종달리 소금밭은 지금은 평범한 흙밭이다. 갯벌에서 염전으로, 염전에서 논으로, 논에서 갈대밭으로 바뀌어온 종달리. 그 모래밭에서 일궈낸 종달리 소금은 진상으로도 오를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 역사적 사실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종달리 소금밭 체험시설이 올레길에 바로 인접해 있었다.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체험시설 직원분께서 밖으로 나오셔 관람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다. 어쩐지 쑥스러워 정중히 사양했다. 굳이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헛헛헛, 그저 멋쩍게 웃었다. 아무도 없었다면 들어가 봤을지도 모르겠다.


햇살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순식간에 날이 끄무레해졌다. 습지와 갈대로 이루어진 주변 풍광이 어딘가 그 희뿌연 공기와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우린 옷깃을 여며, 스산함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철새들은 추위를 피하듯 잔뜩 움츠린 채 연못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버석버석 마른 가지들이 부대꼈다. 흐린 김에 바람은 더 거세졌다.


너무 오랫동안 종달리를 찾아오지 않았던 건지, 어느샌가 소심한 책방은 이사를 했었나 보다. 원래의 자리가 텅 비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지도를 찍어보니 '수상한 소금밭'이라는 게스트하우스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책방 링크 클릭) 체험시설은 그냥 지나쳤지만 서점 구경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잘 정돈된 책장 사이를 천천히 구경했다. 아마도 책이 들어오는 날인 듯, 직원들은 분주했고 여기저기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들을 몇 권 매만지다 못내 조심히 내려놨다. 사놓고 아직 다 읽지 못한 책들이 집에 수두룩했다. 왜 이리 책은 볼 때마다 '갖고' 싶은지 모르겠다. 독립서점에 들를 땐 으레 적어도 한 권씩은 사는데 오늘만큼은 참았다. 이름 따라 그만 소심해져 버렸다. 죄송해요, 소심한 책방. 하지만 다음 기회에.

250225_A1_187(edit2)(resize).jpg <동쪽 바다에 반짝 나타난 갈색 고양이>

서점에서 나와 밭길을 조금 더 걸어 나가자 바다가 나왔다. 종달리 바당길엔 다양한 철새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12시 5분, 목화휴게소에 들러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휴게소라 이름 붙은 그 작은 슈퍼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의아했다. 아내가 말하길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런 거라고 한다. 한 개그맨이 거기서 맥주를 마셨다나 뭐라나. 어쩐지 다들 캔맥주 하나씩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오징어인지 한치인지, 도로를 따라 쿰쿰하게 널려있다. 어느 하늘에선가 바다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행히 바람은 정도껏 잠잠해져 있었다.


길을 절반 넘게 걸었다. 이제 7km 정도 남았다. 벌써부터 성산일출봉이 매우 가까이 보였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했다. 금방 있겠지 했는데, 가도 가도 나오지가 않아 점차 안달이 났다. 시흥 해녀의 집과 오소포연대를 거쳐 오조 해녀의 집을 지났다. 성산갑문 입구 즈음에서야 드디어 공용화장실이 나타났다. 한숨을 돌렸다. 바로 옆에 열린문화쉼터라는 곳도 있어 쉬어가기 딱 좋았다. 정수기까지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배는 비우고, 물은 넉넉히 채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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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휴게소~성산일출봉, 풍경>

30여 년 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건설했으나 환경파괴의 주범이 되는 등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성산갑문을 건넌다. 곧 성산포항종합여객터미널으로 닿는다. 이제 막 점심 무렵이 지났을 뿐인데도 어쩐 일인지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배가 뜨지 않은 걸까, 아님 우도 여행의 인기가 시들해진 걸까. 하긴 아직 추운 계절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조만간 1-1코스 우도 올레를 걸을 때도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다. 이왕이면 하룻밤을 묵어도 좋겠는데 어찌 될는지는 모르겠다. 우도는 우리 둘 만의 오랜 기억이 가득한 곳이라 특별하다. 그러니 우도만큼은 꼭 햇살 좋은 날에 맞춰 가기로 했다. 애정하는 중국집이 없어진 지는 꽤 오래됐지만, 등머울민박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잘 계신가요.


여객터미널을 지나며 흙길로 빠져 얕은 언덕을 올랐다. 절벽을 따라 걸어 한 걸음씩 성산일출봉으로 다다른다. 절벽의 거대한 면이 웅장하도록 서서히 다가왔다. 가지런한 무밭이 한들한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도 픽픽 났다. 여기 산티아고순례길의 비석이 세워져 있어 괜스레 반가웠다. 제주 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이 우정길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그래,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길 막바지에도 간세와 하르방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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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순례길의 하루방 간세(좌)와 올레길의 순례길 비석(우)>

번화한 듯 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성산일출봉의 입구를 지나 광치기해변으로 나아간다. 그 사이쯤 우리가 좋아하는 카페 프릳츠가 위치해 있었다.(프릳츠 제주성산점, 링크 클릭)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에 찌든 몰골로 들어서기가 조금은 머쓱했지만, 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를 마시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사람이 매우 많았지만 다행히 우리가 앉을 의자 2개 정도는 남아있었다. 한 시간쯤을 쉬며 각자의 커피로 걸음을 달랬다. 이제 길도 거의 끝으로 다다랐다. 마치 거의 저녁 느낌이었다. 잔뜩 흐린 하늘만이 하루의 경과를 또렷이 일러주고 있었다.


뜨끈히 들어갔다 나왔더니 추위가 엄습했다. 쓸쓸할 바람이 불어오는 바닷가는 쓸쓸하니 텅 비었다. 터진목의 위령비를 지날 때는 엄숙했다. 위령비 앞에서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길은 바닷가 언덕을 따랐다. 더러 사람들이 지났고, 파도는 조용히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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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광치기해변, 풍경>

썰물 때인 건지 광치기 해변의 멋들어진 지형이 잘 드러나 있었다. 멀리 파도까지 나간 사람들이 점처럼 움직였다. 막바지 검은 바다와 갈색 풀밭을 걸었다. 곧 1코스 종점이었다. 2시 50분, 울퉁불퉁한 그 마지막 바다 앞에서 우리도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스탬프로 길을 마무리했다. 따로 또 같이 걸은 길이 하나의 빈칸을 채웠다.


차를 세워둔 주차장은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였다. 돌아가는 길은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고생했슈 푹 쉬어, 응원처럼 토닥였다. 이번 1코스는 해로 시작해 구름으로 끝이 난 길이었다. 함께 걷는 올레길은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편했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길이 끝나도 갈 길이 남아 멀다. 부릉. 시동을 켰다. 그래, 이제 집으로 가자. 가는 길에 장이라도 볼까.


오늘 저녁엔 따끈한 국물 어때?




2025.02.25.

걷기, 재완주 제주 올레길

2일 차(누적거리 32.7km)

오늘 하루 26,383보(19.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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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걸으며 진행했던 엽서 프로젝트(1코스)>




*제주 올레길 1코스 공식 소개는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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