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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던 돌풍과 두 번의 무지개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0일 차

by 달여리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벨로라도(≈22.67km)


분명 잘 잤는데, 새벽 세 시에 덜컥 깨서는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결국 네 시에 침대 밖으로 나왔다. 공용 공간 소파에 누워 남은 새벽의 시간을 보냈다. 이미 다른 소파엔 TV쇼 같은 걸 패드로 틀어놓은 채 주무시는 분이 계셨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닐스프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 느껴졌다. 하품은 계속 나는데 잠만 없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자 직원분이 오셔 모든 공간에 불을 켰다. 부에노스디아스, 아침 인사. 어영차 몸을 일으켰다. 볼일을 보고 세수를 했다. 방으로 들어가 짐도 모두 챙겨 나왔다. 엉거주춤 침낭을 갠 뒤 배낭을 결속했다. 커피부터 타 마셨다. 빈 속이라 대신 디카페인으로 선택했다. 미리 준비해 둔 재료로 아침을 챙겨 먹으며 어느 정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오늘만큼은 굳이 헤드랜턴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사이 이미 출발한 분도 많이 계셨다. 알베르게가 어느새 분주해졌다. 체크아웃 마감 시간이 무려 여덟 시인 곳이다. 일곱 시가 조금 넘자 직원분께서는 자는 이들을 깨우러 아예 방을 일일이 돌아다니셨다. 웨이크업웨이크업. 그녀의 핸드폰에서는 익숙한 한국 드라마 주제곡이 기상송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저 드라마 제목이 뭐였더라. 하여간 어쩐지 유쾌한 아침의 풍경이었다.

<아침의 어스름>

일곱 시 반에 출발했다. 별이 살짝 보였다. 하늘은 짙디짙은 검푸른 색이었다. 바람이 꽤 불어왔다. 어두운 수풀에서 귀뚜라미 소리도 들려왔다. 주홍빛 가로등이 켜져 있는 다리를 건너며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간다.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다 말았다. 들판으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도로 곁을 따라 난 모래 흙길을 걷는다. 뒤로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더디게 하늘이 옅어졌다. 날씨가 맑을 게 분명해 보였다. 머리 위에서부터 구름이 열리고 있었다. 밀러난 구름은 가장자리로 두텁게 쌓였다. 그게 오히려 빛을 돋웠다.

<햇살이 터져 나온다>

빛이 터지며 길이 붉어졌다. 노란 빛깔이 거리를 순식간에 물들였다. 시작이라, 한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의 발자락엔 길게 길게 그림자가 앞붙었다. 마치 검은 유령들이 길을 먼저 인도해 주는 것만 같았다. 투닥거리다 하나로 뭉쳐지고, 뒤섞이다 또 헤어졌다. 어둠에 가려졌던 그라뇽(Grañón) 마을이 죽은 해바라기 밭 위로 떠올랐다. 도착한 마을에서 배낭을 벗고 조금 쉬었다. 트럭 형태의 노상 카페가 있었다. 어느덧 완연한 아침이었다.


며칠 전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ío)에서 뵀던 한국인 부부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감사했다며 갑자기 토스트랑 주스를 사주시겠단다. 그때 감기몸살에 고생하시길래 가지고 있던 약 하나를 겨우 챙겨드렸을 뿐이었다.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사이 이미 주문을 해버리셨다. 그만 황송한 대접을 받고 말았다. 마침 같이 쉬게 된 다른 한국 분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다. 어젯밤 대화 자리에 함께 했던 분들이었다. 낙낙한 농담으로 20분간 넉넉히 쉬었다. 동시에 일어나 함께 출발하지만, 서로 다른 리듬의 걸음으로 이내 다시 각자가 된다.

<그라뇽 마을>

마을을 빠져나오자 확 펼쳐진 들판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름다웠다. 햇빛이 사라졌다 내리치며, 장면에 선을 그었다. 옅은 바람의 흔적이 서서히 그 위로 흘러 다녔다. 걸음이 더뎌졌다. 이런 풍경을 보면 그만 머무르고 싶어진다. 뒤로 당겨지듯 겨우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마저 더 이상 오지 말라, 뒤로 뒤로 자꾸만 밀어냈다.

<들판의 길>

새벽부터 거셌던 바람이 여전했다. 해가 뜨면서 대지가 온기를 품으면 바람이 잦아들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언덕을 넘어서자 점차 바람은 더- 더- 심해졌다. 두 번째 마을 Redecilla del Camino를 지나면서부터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돌풍이 쉼 없이 불어왔다. 위험하다 느낄 정도였다.


햇빛이 나는데 빗방울마저 후드득 떨어졌다. 하필이면 주변이 온통 공사현장이라, 모래 연기까지 뒤섞여 몰려왔다. 타닥타닥, 아팠다. 퍼드득퍼드득, 정신이 없었다. 죽은 해바라기들은 연신 고대를 까딱이며 춤을 춰댔다. 걷는 자들은 사선으로 사선으로 몸이 기울어져갔다. 그 와중에 무지개도 펼쳐졌다. 무지개에 기대 이제 날이 잠잠해질 거란 괜한 희망을 품었다. 웬걸, 결코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꾸만 더 나빠져갔다.

<들판의 길>

세 번째 마을 Castildelgado를 스치듯 지난다. 네 번째 마을 Viloria de Rioja에서는 도무지 쉬지 않고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성당 입구 담벼락에서 바람을 피해 일이십 분 정도를 쉬었다. 11시. 쿠키를 먹고 사과로 입가심을 했다. 벌써 정말 지쳐있었다. 맞바람이라 힘이 두 배로 드는 것 같았다. 중간에 배낭 커버가 휙 날아가버려 뛰기까지 했다. 그렇게 잃어버리나 했는데, 마침 한참 뒤로 걸어오시던 분께서 순발력 있게 잡아주셔 다행이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내뱉은 말마저 바람이 삼켰다. 과연 오늘의 목적지인 벨로라도(Belorado)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아직 8km 정도가 남았다.

<마을-언덕-바람>

다섯 번째 마을 Villamayor del Río 초입에서 있던 Bar에 들어 또 쉬었다. 12시 5분. 그 안엔 순례자들이 이미 여럿 모여있었다. 다들 아우성이다. 지금 걷고 있는 건 누구? 혼미할 정도로 혼이 쏙 빠졌다.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자꾸만 들려왔다. 이런 날씨 탓에 bar도 올스톱, 정전이었다. 미지근한 캔 맥주 하나로 마음을 달랬다. 다시 나서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숙소를 이미 예약했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 12시 반, 굳은 결심으로 배낭을 멨다. 문을 열어젖혔다. 돌풍으로 몸을 내던졌다. 마지막 4.8km 향해 결의찬 걸음을 내딛는다.

<그 와중에 무지개, 사진은 평화롭기만 하네>

도로 옆 모래 자갈길로 걸어간다. 숨쉬기도 어려워 돌린 고개로 한 번씩 큰 호흡을 억지로 해줘야 했다. 자갈이나 잔가지 등도 무턱대고 날아와 무척 위험했다. 전깃줄에서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났다. 나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걸음조차 떼지 못해 겨우 멈춰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까딱하면 날아가버릴지도 몰랐다.


계속되는 제자리걸음에, 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돌풍 앞에 ㄱ자를 모를쏘냐. 허리는 자꾸만 안으로 굽어졌다. 도로 위엔 커다란 화물차만 지나다녔다. 겉보기엔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빈 밭과 언덕이 햇빛에 반짝거려, 빗발이 괜히 더 얄미웠다. 어디서 오는지 볼에 닿는 물방울이 무지 따가웠다. 뒤로 밀려나고 옆으로 휘청이며 그래도 나아가긴 나아갔다. 드디어 벨로라도라는 간판이 나온다. 1시 반. 절로 안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벨로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비슷하게 걸어온 친구가 있었다. 오늘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두 명 중 하나였다. 같은 숙소에 남은 방이 있다고 하니 그도 여기로 방을 잡겠단다. 각자의 방에서 정비를 마친 뒤 다시 만났다.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숙소 아래의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고민도 없이 코스 요리를 시켰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이렇게 해결했다. 오늘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다른 친구는 뒤늦게 합류했다. 피레네를 넘은 뒤 우연히 같은 숙소에 묵었던 바로 그 친구다. 골목 건너 카페에서 따로 맥주도 같이 마셨다. 마을 안 골목은 절벽과 건물에 가려 그나마 돌풍에서 안전했다. 혼자 산책을 잠시 즐겼다. 또 한 번의 무지개가 산자락 끝에 걸려있었다. 무사히 잘 왔구나, 얄궂은 하늘이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한 번의 무지개, 벨로라도>

지도를 찾아보니 멀찌감치 슈퍼가 하나 있다. 조금 걸어 나가야 하지만 가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저녁 무렵 다시 골목을 나섰다. 방향이 헷갈려 주민들께 물어물어 갔다. 꽤 컸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구경도 할 겸 천천히 둘러봤다. 내일 아침과 점심거리 장도 간단히 봤다. 마지막은 화려한 비로 장식한다. 난데없이 내리는 폭우, 나서려던 마트 앞에 꼼짝없이 섰다. 기다려도 하는 수 없었다. 결국 쫄딱 맞으며 돌아왔다. 그래도 뿌듯한 건 왜일까. 우중 하늘은 진한 분홍빛이었다.


오늘 같은 날씨가 잦을까 걱정이었다. 이 정도 태풍급 바람이라면 하루쯤 걷는 걸 포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위험했다. 무탈했길 참 다행이다. 되도록 숙소 예약은 미리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붙박힌 계획은 아무래도 변수에 취약하다. (알면서도 자꾸 예약을 하게 되는 건 편리함 때문이겠지.) 밤이 더없이 노곤했다. 덜 잔 잠도 더 고됐을 걸음도, 눈꺼풀에 무겁게 보태졌다. 홀로 침대에 누우니 세상이 푹 꺼진다.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오다 불현듯 잠겼다.


온 하루가 예고도 없이 암전된다.



2024.10.09.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0일 차(누적거리 233.29km)

오늘 하루 41,045보(25.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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