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걷다 보니 이렇게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9일 차

by 달여리
나헤라~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20.93km)


호사는 호사다. 꿀잠도 이런 꿀잠이 없었다. 여덟 시가 채 되기도 전에 잠들었다. 다섯 시쯤 절로 눈이 떠졌다. 개운했다. 아, 더군다나 침대 위의 뭉그적거림이 가능한 이 여유라니. 아침 식사에 캡슐 커피까지 마신다. 모닝 샤워도 즐겼다. 뭐 할만한 건 다 했다. 아주 제대로 펼쳐두었던 짐을 이제 하나씩 하나씩 다시 챙긴다. 8시 10분경 산뜻하게 출발했다. 어쩐지 기운이 펄펄 생생했다.

<아침을 스쳐간다>

비교적 늦은 시간 출발했다. 오히려 마음은 어두운 새벽보다 느긋했다. 산책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걸었다. 마저 걷는 나헤라의 절벽이 오늘도 예뻤다.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뒤로 돌면 다채로운 빛깔이 마을 위로 펼쳐졌다. 해가 질 서쪽으로 걷는다. 하루가 지나갈 방향으로 길을 나아갔다. 처음부터 오르막을 오른다. 얕은 언덕을 넘듯 점차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아디오스, 나헤라>

절벽 띤 흙길을 걷는다. 포도밭의 분뇨 냄새가 잠시 났다 사라졌다. 아침의 가로누운 빛깔이 참 좋았다. 십 년 전 파키스탄 훈자에서 영혼처럼 느꼈던 '오후 네시의 빛'과도 조금은 비슷했다. 진하고 노오란, 순례길에서의 '오전 아홉 시의 빛'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림자가 한껏 길어졌다. 마치 단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갔다. 그래서인지 길에는 일종의 생동감이 있었다. 너무 씩씩해 움츠러들 정도였다.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조절하며, 앞과 뒤 사람들과 최대한 간격을 떨어뜨리려 노력했다. 유난히 시끄러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게 길의 기분을 자꾸만 훼방했다.

<오전의 빛>

9시 반, 첫 번째 마을 아조프라(Azofra)에 도착했다. 여기 알베르게가 2인 1실이라 아주 좋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머물러볼 수 없어 아쉬웠다. 조용한 마을이다. 모든 소란은 오로지 순례자들의 몫이었다. 카페마다 바글거렸다. 대화 소리가 잔뜩 풍겨왔다. 한국말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갔다. 마을을 빠져나가자, 다시 포도밭이 이어졌다. 마을을 지나며 인파는 어느 정도 흩어졌다. 잠시 잠잠해진 길에 마음은 안정을 되찾는다. 햇살 소리에 집중했다. 걸음에 리듬감이 살아났다.

<아조프라(Azofra) 마을>

그럼에도 아직 길엔 사람이 많았다. 유독 오늘은 그랬다. 아마도 걷기 시작한 시간대 때문인 듯했다. 바삐 걷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사람들의 속도가 대비된다. 언뜻 봐도 고행 중인 뒷모습 옆으론 한결 가벼운 발걸음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다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 꽃으로 삼매경이었다.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따라라라 따라라라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빠져나갔다. 견디기 어렵도록 시끄럽게 느껴질 때면 한 박자 늦거나 빠르게 걸음을 조절하곤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아조프라 마을을 지나기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수확 중인지 가지치기 중인지, 한창 작업 중인 포도밭을 지난다. 안 그래도 이 일대는 와인으로 유명한 리오하(rioja) 지역이었다. 특히 나헤라부터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이하 산토도밍고)에 이르는 오늘의 순례길은 고급 와인으로 명망이 높은 리오하 알타(Rioja Alta) 지역을 관통하는 길이었다. 높은 고도로 숙성력이 좋아 풍미가 부드럽고 복합적이라나 뭐라나. 싱그러운 포도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일하시는 분들을 보니 혹시 알바자리라도 있진 않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전 아홉 시의 빛' 때문인지, 여기에 머물며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쉥겐 조약에 며칠이나 남았더라. 괜히 한 번 세어보다 피식했다. 그러다 포도밭의 포도를 함부로 따먹는 순례꾼들이 보여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보통 순례길에 인접한 포토밭은 대부분 사유지다. 일부 포도밭의 경우 순례자들을 위해 밭 가장자리에 있는 포도나무를 따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두기도 한다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포도밭의 포도를 따먹는 건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한 해의 프랑스길 완주자가 20만 명이라고 했을 때, 그중 절반만 1송이씩 따먹는다고 해도 10만 송이 포도가 '재미로' 희생되는 셈이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한 행동이 죄 없는 농가에 수만 유로 비용의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아주 밭 깊숙이 탐색을 하듯 맛 좋은 포도를 따먹는 순례자까지 있었다. 웃으며 자랑처럼 포도 따먹은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후에 종종 만났는데, 그게 그토록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부디 제발 그러지들 말자.

<그 땅의 기운>

검은 빈 밭과 죽은 해바라기 들판, 낮도록 초록한 풀과 추수 끝난 밑동. 비슷한 듯 아닌 듯 길의 색조가 변주하며 눈길과 발길을 앗는다. 넓게 펼쳐진 풍경 사이를 가느다란 길이 마음껏 굽이쳤다. 나무 그늘 하나 없을 이 길 위로 구름의 장막이 듬성듬성 그나마 햇빛을 가려준다. 이윽고 오르막이 시작됐다. 높진 않지만 가팔랐다. 그 끝에 걸린 하늘까지 가 닿을 것만 같은 길이었다.

<트렁크 푸드 매대, 휴식의 풍경>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다 올랐다. 순간적으로 땀이 샘솟았다. 오르막의 끝자락엔 자동차 트렁크 푸드 매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딱 적절한 곳에 잘도 위치를 잡았다. 11시 15분, 첫 휴식을 여기서 취한다. 합법적인 운영은 아닌듯했지만, 적당한 기부금을 내고 콜라를 하나 사 먹었다. 펼쳐놓은 캠핑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저 멀리 멋진 산도 보였다. 풍경이 탁 틔여 몸도 마음도 불현듯 시원했다. 땀이 금세 식어 개운했다.


20분을 쉬었다. 다시 배낭을 메려니 괜스레 곤욕이다. 조금 더 걸어가자 두 번째 마을 Ciriñuela가 나왔다. 번듯한 건물이 많고 길도 큼직큼직한데, 어쩐지 텅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골프장과 야외 수영장까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휴양마을인 듯했다. 여름 한철에만 북적거리지 않을까 싶었다. 풀 죽는 고요함 같은 분위기로 가득한 동네였다.

<아마도 길의 하이라이트>

마을을 벗어나며 12시 종소리를 들었다. 주변의 건물이 싹 사라지자, 한가닥의 길은 앙상한 밭 사이로 굴곡지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늘과 멀지만 또 가까웠다. 낮으나 사방이 틔여 높이 오른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아마도 오늘 길의 하이라이트. '산티아고순례길'하면 흔히 떠오르는 낭만적 분위기가 길 위로 흘렀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반갑다.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완전히 달랐을 풍경, 이 가을엔 황량한 아늑함이 있었다. 주변의 산세가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유연한 곡선을 타고 천천한 길을 따라 가자, 멀리 저 멀리 산토도밍고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산토도밍고에 가까워진다>

눈앞에 보이나 그 마을로 들어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찬바람이 자꾸만 불어왔다. 다음 마을까지 더 걸어가 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진짜로 그러기 전에 그 마음을 황급히 접어버렸다.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깊어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고 그러는 걸까. 어쩐지 내일의 기상 상황이 걱정되는 하늘의 모양새였다.


1시쯤 마을로 들어섰다. 큰 마트도 보이고, 웬 등산용품점도 보였다.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 체크인을 했다. 배정받은 침대에 시트를 깔고,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로비 소파에 앉아 쉬는데 삼삼오오 한국분들이 들어오시는 게 보였다. 아마도 여기로 다 모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쩐지 알베르게 곳곳에 한국어 안내도 있었다. 이미 뵌 분들도 계시고 처음 보는 분들도 계셨다. 괜히 부담도 되고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동네도 산책할 겸 간단히 장거리를 봐와 늦은 점심을 해 먹었다. 이번 알베르게는 다 좋은데 침대 맡에 콘센트가 없는 건 참 아쉬웠다. 이것 참 번거롭게 됐다. 공용 거실 소파 누워 필요한 충전을 하며 남은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아뿔싸, 내일 목적지로 예상한 곳에 미리 싱글룸을 예약해 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미 무료취소 시점이 지난 후였다. 원래라면 내일 누리려던 호사를 당겨서 어제 누린 거였는데, 그 즐거움에 취해 취소한다는 걸 미처 까먹고 말았다. 어제만큼 좋은 곳은 아니어도 40유로에 개인 화장실이 있는 싱글룸이다. 하루 걸러 또다시 호사를 누리게 됐다. 그 어쩔 수 없음에 못 이기는 척 씨익 한번 웃어본다.

<골목 풍경>

하루에 5~7시간 정도를 걷고, 그 이후의 시간은 넋 놓고 이렇게 쉰다. 쉬려고 걷는 건지 걸으려고 쉬는 건지, 가끔씩 헷갈리기도 했다. 더딘 것 같아도 어느덧 200km 넘게 걸어왔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벌써 9일째였다. 하루씩을 끊어 생각해 보면 시간이 빠른 것도 같다. 산티아고순례길 특유의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된다. 얼굴이 쌓여가며 친밀함의 농도가 달라지는 인사도 마찬가지. 나의 말은 어눌하고 표정은 아마도 수줍다. .


다섯을 모아 건조기 더치페이를 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저녁 무렵엔 자연스럽게 자리도 만들어졌다. 각자가 사 온 먹거리와 술거리로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순례길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내용도 많았다. 꿀팁과 유용한 먹거리 정보들. 분위기도 썩 좋았고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교환했다. 앞으로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됐다. 걷다 보니 이렇게 '관계'란 게 생겨난다. 역시 아직은 어색했다.


아홉 시가 넘어 자리를 파했다. 내일은 각자의 걸음이 또 있다. 예약한 싱글룸 덕에 이미 결정된 내일의 목적지는 벨로라도(Belorado)였다. 어쩌다 보니 그 중 두 분과는 거기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약속까지 하게 됐다. 이제 잠에 들 시간이다. 양치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세상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았고, 바로 잠에 들었다.



2024.10.08.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9일 차(누적거리 210.62km)

오늘 하루 38,757보(23.9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