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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 밤이 편해라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8일 차

by 달여리
로그로뇨~나헤라(≈28.27km)


자는 동안 더워서 땀을 좀 흘렸다. 밤새 뭔가 끙끙 앓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중간에 깨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름 푹 잔 편에 속했다.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방에 몰려 자서 그런 것 같았다. 이 넓은 도미토리 방에 빈 침대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섯 시에 일어나 순서대로 준비를 했다. 비슷한 시간에 깨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눈인사를 주고받고, 각자의 할 일에 몰두를 했다. 아침식사는 사과 하나로 퉁쳤다. 짐을 다 싼 뒤엔 망설이지 않고 배낭을 어깨에 멨다. 어두운 로비로 내려갔다. 신발을 갈아 신고 무릎 보호대를 찼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마셨다. 이걸로 채비는 모두 마쳤다. 산뜻한 마음으로 오늘을 출발한다. 여섯 시 오 분이었다.


비는 밤새 오다 새벽에야 그쳤나 보다. 바닥은 물기로 축축했다. 골목골목 가로등이 있어 당장 걷기엔 나쁘지 않았다. 밤처럼, 거리에도 뭔가 더운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습했다. 그래도 비 내리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길은 인적 없이 고요했다. 발걸음마저 습기를 머금어 조용했다.


그 와중에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아지와 산책하시는 분들도 곳곳에서 만난다. 경찰들이 근엄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넨다. 거리는 아직 밤의 기운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공원 사이사이를 통과했다. 철로와 도로를 육교로 건넜다. 어쩐지 반가운 기아자동차 매장도 지났다. 굴다리로 들어왔던 도시를 굴다리로 나간다. 슬그머니 가로등이 사라졌다. 길은 완전한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슬슬 붉은 도시를 떠난다. 주섬주섬 헤드랜턴부터 꺼냈다.

<어둠의 길을 지난다>

암흑의 물빛. 매한가지의 어둠인데, 하늘과는 구분되는 희미한 수면의 반사가 있었다. 지역의 생활용수로 쓰이는 그라헤라 저수지(Embalse de la Grajera)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난 공원 산책로를 걸었다. 바스락바스락, 수풀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토끼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나무에 달린 주홍빛 열매들은 어둠 속에서도 예뻤다. 이슬 맺힌 흰 풀잎들이 걸음에 맞춰 팔락거렸다. 머리를 돌려 랜턴 빛이 닿을 때마다, 없었던 풍경이 선명히 드러났다.


아직 채 날이 밝아 오지 않았는데 헤드랜턴 불빛이 벌써부터 시들거렸다. 쿠팡에서 산 저렴이 랜턴, 그래도 산티아고에서 쓸모를 찾았다. 한번 충전에 3시간 정도 사용 가능한 걸로 오늘에서야 실제로 확인이 됐다. 어두운 새벽 출발할 때면 충전 상태를 미리 확인해 두는 게 좋겠다. 어제는 미처 충전을 해두질 못했다.

<흐린 와중에도 날은 밝는다>

어둠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헤쳐나갔다. 7시 45분쯤이 되자 시야가 걸을만해졌다. 딸깍거리던 랜턴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길가의 노란 풀에선 이상하게도 카레 향이 났다. 보호색이라 어차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데, 토끼들은 오히려 도망을 가며 들통이 난다. 여기저기 통통거렸다. 갑자기 길 위의 토끼들이라니.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 어스름마저 어쩐지 몽환적이다.


포도밭과 도로 사이의 길. 월요일이라 그런지 도로가 복잡해 보였다. 꽃들이 화사하게 배웅을 해준다. 멀리서부터 웬 황소 실루엣이 보였다. Osborne이라는 술 브랜드가 광고를 위해 세운 그 황소 간판은 스페인다운 랜드마크로 여겨져 지금은 문화적 아이콘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고 했다. 스산한 그 길을 통과해, 공사현장과 고가도로를 차례로 지났다. 잔뜩 흐린 하늘이라 별다른 일출은 없었다. 살짝 걸린 분홍빛 구름만이 아침을 겨우 티 낼 뿐이었다.


저기 멀리 마을이 보였다. 아, 바로 그 나바레테(Navarrete)다.

<저기 저 나바레테 마을이 보인다>

9시 45분, 예상보다 빨리 나바레테에 도착했다. 길을 올라 둥그렇게 마을을 통과한다. 여기서 아침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문 연 빵집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가 조밀하게 모여있었다. 독일 형아는 어제 여기에 묵었겠지. 그가 말했던 맛 좋은 레스토랑이 어디일까 추측을 해봤지만, 마땅한 단서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적당한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간다. 빵 없는 아쉬움을 오래된 초코바로 달랬다. 슬슬 걷는 이들이 길 위에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12km 정도를 걸어왔다. 와... 정말 부지런히도 발을 놀렸다.

<적막한 나바레테>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걷는다. 공동묘지와 도자기 공방을 지나자 길은 포도밭 사이의 자갈길로 빠졌다. 순간 분뇨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주렁주렁 달린 작은 포도알들은 참 맛있게도 보였다. 10시에 가까워지자 흐렸던 하늘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햇살의 기운도 잠시, 다시 곧 먹구름이 층층이 두터워졌다.


포도밭과 도로 곁길이 반복하며 지겹게 이어졌다. 길이 지긋하게 느껴진다는 건 보통 힘들 때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새벽 일찍부터 걷는 건 분명 무리가 됐다. 무리를 하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더 걷게 되는 건 왜일까. 몸의 상태와 무관하게 걷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커진다. 아직까지도 그 연유는 알아채지 못하겠다. 오늘도 장장 28km를 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포도밭길>

먹은 게 별로 없다 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언덕을 다 오른 뒤 한숨을 돌렸다. 10시 45분. 딱히 먹을 게 없으니 또 사과를 꺼내 먹었다. 잠시라도 쉬니 그래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지치니 그제야 빨랐던 걸음이 제 속도를 찾아간다.


군데군데 핸드폰 신호가 안 잡히는 구간들이 있었다. 바닥이 대체로 자갈길이라 걸음에 진이 빠지기도 했다. 풍경도 날도 흐렸다. 힘이 안 난들, 힘을 내야 했다. 12시가 넘어가자 결국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새들도 난리가 났다. 우비를 꺼내 입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게 곧 와르르 쏟아졌다.

<나헤라로 가는 길>

그렇게 걸었다. 말 그대로 꾸역꾸역의 상태였다. 12시 반,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나헤라(Nájera) 마을 끝자락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 건물의 처마 밑 벤치에 앉아 비를 잠시 피해 간다. 아직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민 중이었다. 공립알베르게로 갈지 사립알베르게로 갈지, 오락가락 결정을 하지 못했다. 마을에 닿은 이상 이제는 오늘의 정착지를 결정해야 했다. 쉬는 김에 부킹닷컴을 찾아봤다. 그러다 우연히 근사한 아파트 숙소를 발견하게 됐다. 아, 충동적으로 질러버렸다. 비도 맞고 지쳤겠다, 혼자만의 여유를 위해 호사를 선택했다. 아뿔싸 갑자기 설렌다.


2시 체크인이라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다. 갑자기 여유로워져 쏴아 내리는 비도 느릿느릿 구경했다. 한참을 멍 때렸다. 낯익은 순례꾼들이 손짓으로 인사하며 지나갔다. 오늘 길도 길었다. 지친 만큼 지루했다. 그래, 잘했다. 며칠치 걸음에 대한 보상을 편안한 숙소로 치하한다.

<황톳빛 절벽의 마을, 나헤라>

나헤라 골목을 걷는다. 이 마을도 규모가 꽤 컸다. 몇몇 알베르게들도 지나고, 바와 슈퍼, 학교, 성당 등을 차례로 지난다. 체크인을 기다리며 근처의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맥주를 한 잔 하고 나오니 비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간단히 장까지 봐 2시에 딱 맞춰 숙소로 들었다. 개인 화장실에 별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다. 무료 캡슐커피와 와인 한 병까지! 10만 원의 행복. 와, 황홀했다. 빨래도 세탁기로 돌린다. 휘파람을 불며 샤워를 했다. 머리도 밀고, 카메라도 모처럼 닦고, 빵꾸 난 양말도 꿰매고, 모자란 충전들도 했다. 모든 게 맘껏이다. 잔뜩 널브러트린 짐들. 편해서 좋았다. 뭐, 돈을 쓴 만큼 좋긴 좋다. 혼자 밥을 차려먹고 와인도 홀짝 마셨다. 밤을 만끽한다. 그러기엔 너무 피곤해 사실 일찍 잠들었다. 침대마저 편했다. 그야말로 꿀잠을 잔다.


꿈같은 나헤라의 시간이 아깝다. 솔직히 이제 그만 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내일도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참 길긴 길다. 이제 겨우 8일 째였다. 딱히 일정을 정해두진 않았지만, 완주하려면 앞으로 한 달은 더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닿을 수 있는 곳이 맞긴 하겠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완주를 한 뒤 왈칵 울었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금 이해가 됐다. 울게 될지 아닐지, 그것도 하나의 관심사가 됐다.


사실 알고 있다. 아직 훨씬 더 걸어갈 수 있다. 됐다마.

오늘은 일단 쿨쿨쿨.



2024.10.07.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8일 차(누적거리 189.69km)

오늘 하루 46,692보(2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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