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1일 차
벨로라도~산후안데오르테가(≈23.91km)
순례자 여권인 크리덴셜(Credencial)에 도장(sello, 이하 세요)을 맘껏 찍어도 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총 72개인 빈칸을 잘 조절해서 채워야 되는 줄만 알았다. 근데 꽉 차면 그냥 새 크리덴셜을 사면 된단다. 몇 권이고 찍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어젯밤 같은 숙소에 묵은 그 친구가 알려줬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 순례길이라고 했다. 겨우 하루에 하나 정도만 찍었나, 몰라서 그동안 칸을 너무 아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인 사리아(Sarria)에서부터는 세요를 하루에 최소 2개씩 받아야 된다고 해서 더 그랬다.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였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세요를 받는 즐거움이라는 게 또 있는 거다. 어릴 적 포켓몬 스티커를 모았던 거랑 비슷한 느낌이랄까. 오늘부터는 걱정 없이 마구 찍기로 했다. 순례길 11일째, 콜렉터의 마음을 새로이 장착했다.
불도 끄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더라. 5시 반 알람을 듣고 바로 일어났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선 아침을 챙겨 먹었다. 양치를 한 뒤 숙소를 나섰다. 성당의 7시 종소리가 등뒤로 따라왔다. 아주 작은 줄만 알았던 벨로라도(Belorado)가 막상 의외로 컸다. 마을에는 가로등이 있어 걷기가 아직 괜찮았다. 날씨가 다른 날보다는 다소 쌀쌀했다. 바람이 아직 남아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 손이 시렸다. 자꾸만 콧물이 났다.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곧장 어두워졌다. 미리 준비해 둔 랜턴을 켰다. 동그란 빛을 따라 걷었다. 도로를 건넜고 계곡 소리도 들었다. 7시 40분이 넘으며 시야가 점차 분간되기 시작했다. 랜턴은 좀 더 걷다 껐다. 어스름이 있었다. 입김이 폴폴 피었다. 죽은 해바라기밭과 들판 사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빛이 번지며 장면은 와인빛으로 달아올랐다.
8시 5분, 첫 번째 마을 Tosantos를 지난다.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골목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도 어제의 돌풍 탓이 아닐까 싶었다. 볼품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저기 앞에서 한 고양이가 통통통 뛰어왔다. 무작정 다리를 비비며 야옹. 마음이 그만 와르르 녹아버렸다. 오구오구, 우쭈쭈. 역시 냥이에겐 대책이 없다. 간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미안해.
8시 반, 두 번째 마을 Villambistia를 지난다. 삐걱거리던 등산 스틱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미 촉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CTC에서부터 진작에 그랬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해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스틱 양쪽의 높이가 확연히 달랐다. 미처 그것까진 몰랐다. 오른쪽 왼쪽 구분해 쓴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한쪽만 닳았다. 어쩐지 더 불편하더라니. 그렇다고 버릴 수도, 안 쓸 수도 없다.
서서히 땅이 깨어난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하늘을 열어 빛을 내어놓는다. 가로로 길게 가닿은 빛이 들판을 진하게 비추었다. 아침을 알아챈 새들이 소란스레 지저귀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찼다. 부디 어제만큼 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8시 50분 세 번째 마을 Espinosa del Camino를 지난다. 이내 얕은 언덕을 넘는다. 들판 사잇길과 도로 갓길을 걸어 네 번째 마을 Villafranca-Montes de Oca로 들었다. 9시 반 여기서 한 번 쉬어간다. 제일 먼저 보인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사 먹었다. 진짜 빨리 걸어온 느낌이다. 이제 12km 남짓 남았다.
9시 45분 다시 길을 출발했다. 이 작은 마을이 뭐라고 좁은 골목으로 커다란 화물 트럭들이 연신 지나다녔다. 따뜻한 곳에 있다 나왔더니 상당히 추웠다. 성당을 지나자 곧장 시작된 오르막길, 열심히 올라 부지런히 몸을 데웠다. 손과 코를 빼곤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오르막이 이상하도록 즐겁게 느껴졌다. 왠지 걸을 맛이 났다. 한 땀 한 땀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올랐다. 산속 숲길의 느낌이 좋았다. 여느 한국의 산행과 비슷했다. 어딘지 위클로웨이와도 닮았다. 이렇게 산을 따라 넘어 오늘의 목적지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로 가닿는 듯했다.
땅이 크게 굴곡 지지 않아 걷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오르막을 오른 후에는 대체로 길은 평탄했다. 해더와 작은 꽃들이 흔들렸다. 초록과 적색의 고사리들이 반가웠다. 촘촘한 나무들이 적당한 빛과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붉은 땅, 하얀 땅, 노란 땅을 차례로 지났다. 자갈을 모아 만든 화살표가 정다웠다. 분명 여긴 깊은 숲인 것 같은데, 도로가 근처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왼쪽으로 차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걱정과 달리 바람은 더 이상 거세지지 않았다.
흥겨운 음악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정신없이 펼쳐놓은 안내 문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뜬금없는 푸드 매대가 산 중턱에 있다. 조개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저씨, 흥이 참 많기도 하지 쉼 없이 떠들어대신다. 셀프 세요를 찍은 뒤 뭐라도 살까 해서 지갑을 꺼냈다 말았다. 너무 바쁘셔 도무지 살 타이밍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음악을 그냥 지나쳤다. 사실 딱히 살만한 것도 없긴 했다.
부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 곳이 종종 있었다. 커피와 빵을 사 먹었던 네 번째 마을을 들어갈 때도 쓰러진 나무가 다리를 덮쳐 곡예를 하듯 넘었어야 했다. 어제의 돌풍이 보통이 아니긴 했나 보다. 스페인 뉴스를 찾아보니 바람이 최대 28m/s까지 불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나무가 뽑힐 정도라니 말 다 했다. 누군가 다치지 않았길 바랐다. 그 길을 맞바람으로 내내 걸은 어제가 새삼 징했다.
11시 55분, 하산이 시작됐다. 서서히 길의 뉘앙스가 바뀐다. 숲에서 들판으로 나서니 죽은 해바라기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마을에 다다랐다. 조용하니 작은 이 마을이 맘에 들었다. 미리 점찍어둔 알베르게로 먼저 들어갔다. 12시 20분.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남은 침대가 있단다. 1등으로 체크인을 했다.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 중 처음으로 침대 2층을 배정받았다. 통으로 한 방으로 되어 있는 숙소는 아늑하고 쾌적했다. 아무도 없으니 여유롭게 샤워를 즐겼다. 탈탈 털어 골목에 빨래를 바짝 널었다.
바로 옆 bar에서 맥주 한 잔. 숙소 로비에서도 빈둥거려 본다. 추워진다고 느껴질 즈음 침대로 올라왔다. 침낭을 둘둘 말아 누워 남은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길고 여유로웠다. 마을이라기에 겨우 건물 몇 동, 정말 작은 동네였다. 딱히 할 게 없으니 다들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고 쉬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히 흘렀다. 예약한 저녁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다. 슬슬 배가 많이 고파왔다.
커뮤니티 디너 시간에 맞춰 하나둘 식당으로 내려왔다. 이 안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어느덧 작은 공간이 꽉 찼다. 하나씩 순서대로 나오는 식사가 모두 다 맛있었다. 애피타이저인 호박수프와 샐러드, 디저트인 치즈케이크나 와인도 모두 좋았지만, 제대로 크게 한 판 나온 빠에야가 진짜 대박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음식을 즐겼다. 저녁 시간이 나름 즐겁게 흘러 지나갔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은 마음을 쉬이 부드럽게 해 준다. 오늘의 걸음을 단단히 보듬어 달랜다.
내일은 부르고스(Burgos)라는 큰 도시로 가는 일정이다. 26km 남짓,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조명이 없는 방이 매우 어두워 잠자기에 딱 좋았다. 등 따시고 배까지 부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2024.10.10.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1일 차(누적 거리 257.20km)
오늘 하루 40,188보(24.9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