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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안녕도, 걱정의 정강이도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2일 차

by 달여리
산후안데오르테가~부르고스(≈26.05km)


다시 먹은 치즈케이크가 참 맛 좋다. 찰떡궁합 모닝커피와 함께 새벽 여섯 시의 조식을 천천히 즐겼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이미 준비는 다 마쳤다. 일곱 시에 출발했다. 바깥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걱정보다 춥지는 않았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손이 시릴 뿐이었다.

241011_iphone_8882(edit2)(resize2).jpg <이게 아침 일곱 시의 하늘>

마을은 금방 끝났다. 곧 어둠의 숲으로 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시야는 둥그런 랜턴 안에 갇혔다.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숨과 발이 내는 소리로만 가득 찬다. 저기 저 먼발치, 수풀 속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같다. 혹시 귀신은 아니겠지. 오싹오싹 한참 무섭다. 이러니 이른 새벽의 어두운 걸음을 피하고 싶다. 그런 마음과는 달리 먼 길에 대한 조급함으로 자꾸만 빨리 출발하고 만다. 일찍 걸으면 일찍 끝난다는 단순한 사실, 그 달콤한 매력을 쉬이 포기할 수가 없다.


부에노스디아스, 부엔까미노. 앞서 걷던 세 분을 지나쳤다. 다행히 그들은 귀신이 아니었다. 확실히 어둠이 집중에는 좋다. 풍경도 없고 시야도 제한되어, 이 순간 오로지 ‘걸음’밖에 없게 된다. 곧 만날 길 위의 해돋이를 기대하며 어둠을 나아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어둠에도 은근한 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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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는 과정>

별이 지며 차차 날이 밝아온다. 첫 번째 마을 Agés를 지나며 밤은 아침으로 가닿는다. 붉은빛이 아래서부터 스며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하늘이 변해간다. 헤드랜턴을 껐다. 해를 확인하느라 연신 뒤로 돌아보기 바빴다. 여명의 보랏빛 아래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마을 Atapuerca. 아직 켜진 가로등 불빛이 남은 별빛 같았다.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를 즈음, 드디어 태양이 빛을 가르며 환하게 떠올랐다. 포지티브 필름처럼 투명한 빛깔이 장면에 한가득 차올랐다.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그 순간에 잠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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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길과 십자가>

뒤로부터 비쳐오는 아침의 빛에 따사로이 등 떠밀린다. 닭들이 여기저기서 응원인양 울어댔다. 언덕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너덜길을 이리저리 잘 디뎌 올랐다. 하늘은 금방 파래졌고 길은 초록초록했다. 기다랗게 뻗은 그림자가 밟힌다. 정상에 위치한 허름한 십자가가 경건한 그 위용을 뽐냈다.


내리막길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 부르고스(Burgos)가 보였다. 프랑스길 중 두 번째로 큰 도시다. 길은 그쪽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왼편으로 빠진다. 여러 마을들을 둘러둘러 그리 갈 모양이었다. 길 위 인파에 비해 의외로 조용한 편이었다. 다닥다닥 붙어가지 않고 적절한 거리가 유지됐다. 어디선가 웬 총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채굴장인지 절벽 아래 공사판이 있었고, 삐죽삐죽 송전탑이 자주 보였다.

241011_A1_069(edit2)(resize2).jpg <저 멀리 부르고스>

세 번째 마을 Villalval은 그저 입구만 스치듯 지났다. 네 번째 마을 Cardeñuela Riopico 초입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가려다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 슬슬 한 차례 쉬고 싶은데 마땅치가 않았다. 다섯 번째 마을 Orbajena Riopico에는 문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부르고스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쭉 걸어가야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무 바닥에나 철퍼덕 쉬어도 될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따뜻한 빵과 커피를 원했다. 일단은 더 걸어 나가본다. 일찍이 지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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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들판, 도로를 지나>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가 났다. 길은 계속 도로 곁을 따라갔다. 집집마다의 안테나가 꼭 화살표같아 보인다. 자꾸만 더 걸어가라 그리 재촉하는 듯했다. 건물의 창문은 어찌 죄다 얼굴처럼 보이는지, 말을 자꾸만 걸어왔다. 놀란 표정도 놀리는 표정도 거기 다 있었다. 그래, 알았어. 힘을 더 내볼게.


고속도로와 철로를 고가도로로 넘는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도로길의 연속이었다. 비행기도 가까이 날아다녔다. 활주로처럼 보이는 철창을 따라 서서히 도시로 들어선다. 여기가 마지막 마을인지 어딘지, 이미 지도상의 주소는 부르고스였다. 땡볕을 걸으며 산토도밍고표 사과를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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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1_A1_112(edit2)(resize).jpg <고가도로를 따라 고속도로를 넘는다>

10시 50분. 드디어 희망 같은 쉼터를 만날 수 있었다. 호텔 1층 로비에 붙은 한 레스토랑이었다. 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커피 한 잔에 달콤한 빵 한 조각을 베어 문다. 그동안 죄다 초록색 아니면 파란색이었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빨간색 세요(sello)를 받았다. 간판처럼 예뻤다. 이름마저 라스베가스였다.


이제 7km 남았다. 버려진 변두리 지역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커다란 창고, 낡은 정비소, 타이어 공장과 가구 도매점, 거대한 종합 공구 쇼핑몰. 여느 한국 대도시의 근교 풍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광고판과 화물차가 정신없이 교차했다. 도로의 시끄러운 소음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어깨가 찌뿌둥했다. 하품이 자꾸 나왔다. 환각처럼 어디선가 달콤한 포도주 향이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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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를 지나 도시로 들어선다>

11시 40분, 부르고스 간판을 지났다. 조금씩 도심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비교적 높은 빌라와 아파트들이 길을 반겨왔다. 맥도날드와 버거킹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도시가 진짜 크긴 큰가 보다. 이미 부르고스로 들어왔는데도, 아직 1시간은 더 걸어가야 됐다. 목적지는 공립알베르게였다. 부르고스의 랜드마크인 대성당 거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내내 3G였던 신호가 드디어 4G로 바뀌었다. 모처럼 신호도 빵빵하게 잘 들어왔다. 눈만 마주쳐도 '부엔까미노'라 인사해 주시는 다정한 주민들이 많았다. 다들 왜 이 도시에서 길을 잠시 멈추고 연박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필요한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가게들, 갈 곳도 많아 보인다. 며칠이나 됐다고 번듯이 복잡한 도시의 거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인지 좀 전부터 다리가 많이 아파왔다. 그래도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성곽을 통과해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으로 향한다. 12시 40분에 도착한 공립알베르게는 아직 오픈 전이었다. 이미 선착순으로 배낭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순서에 맞춰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부터 갈아 신었다. 바로 앞에 bar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후다닥 맥주부터 한 잔 시켰다.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끝자락에 유독 힘들었다. 더군다나 다리의 상태가 평소 같지 않았다. 마지막엔 조금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좀 천천히 걸을 걸, 만만하게 보고 무리해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위클로웨이 때 겪은 무릎의 고통이 불현듯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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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

1시에 알베르게가 오픈하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와르르 나타났다.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숙소 컨디션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 놀랐다. 침대마다 칸막이가 되어있어 편했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뽀송한 몸으로 로비에서 좀 쉬었다.


오늘은 다른 친구 두 명이랑 저녁 약속을 해두었다. 벨로라도에서 맥주를 나눠마셨던 바로 그 둘이었다. 딱히 시간 약속을 해두진 않았지만 기다리다 보니 모두 나타났다. 어차피 다 같은 숙소였다. 식사하긴 너무 일러 그전에 도심을 구경하기로 했다. 일단은 대성당으로 먼저 향했다. 순례자라면 입장료를 반 정도 할인받을 수 있다. 이럴 때 크리덴셜은 순례자의 증빙이 된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려 약 350년이 걸려 세운 고딕양식의 대성당이다. 이후 르네상스와 바로크 요소가 혼합되며 스페인만의 독특한 장식미가 가미되었다고 한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뾰족 솟은 쌍탑 첨탑과 내부의 천정 그리고 밤의 조명이 특히나 아릅답기로 유명하다. 내부를 둘러보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천장과 그 장식품에 마음을 뺏겨 고개 아프도록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캬,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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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 유독 인상적인 부르고스 대성당>

골목을 걸으며 기념품 가게도 구경했다. 휘이 휘이 거리를 거닐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원래 가려던 식당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문을 닫았다. 망설이던 차에 현지인으로 북적거리는 식당을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처음엔 반신반의였지만, 뜻밖의 맛집을 발견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3개 정도의 메뉴를 시켰는데 모두 끝내주게 맛있었다. 문어 요리와 버섯 구이, 그리고 오징어 튀김이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곳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다른 마을에서조차 이 가게의 세요(sello)를 알아보고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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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클리어>

이 중 한 명은 오늘 길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길게 휴가를 낼 수 없어, 두 번째 순례길은 두 번에 나눠 걷기로 했단다. 아쉬운 마음에 한 잔을 더 기울였다. 숙소에서 간단히 마무리하기로 한 2차로는 부족해, 근처의 Bar에서 3차까지 해치웠다. 내일도 어김없이 걸어갈 것이기에 너무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밤의 유흥은 순례길에서 처음이었다.


밤은 빨리 찾아왔다. 헤어짐은 괜히 아쉬웠다. 계속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아니지만, 같은 날 걷기 시작해 드문드문 우연히라도 자주 마주쳤던 관계였다. 이렇게 인연이 닿으니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신기하다. 흔히들 말하는 '산티아고에서의 만남'인 셈이다. 반가운 안녕을 나누었다. 서운한 안녕도 함께 고했다.


어떡하지. 시간이 갈수록 다리는 더 아팠다. 오늘따라 유독 빨리 걷기는 했다. 중간중간 충분히 쉬었어야 했는데 그만 과신의 무리를 했나 보다. 특히 오른쪽 정강이 근육의 통증이 심했다. 하루를 쉬어가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곳에 연박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일단은 걷자. 걸어보자. 적어도 다음 마을까지는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걷긴 참 많이도 걸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채 반도 안 왔다. 알람은 맞추지 않았지만 늘 그랬듯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거다.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글쎄, 망설일 새도 없이 아침은 또 금방 찾아온다.



2024.10.1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2일 차(누적거리 283.25km)

오늘 하루 48,193보(30.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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