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3일 차
부르고스~오르니요스델카미노(≈20.86km)
다섯 시 반 기상. 기계 같은 동작으로 준비를 마쳤다. 아침은 어제 사둔 냉동식품으로 해결했다. 막 출발을 하려는데 발의 감촉이 이상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신발을 벗어 봤더니, 양말에 난 커다란 구멍 두 개가 그 원인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갈 수가 없어 두꺼운 등산 양말을 덧대서 신었다. 하긴 양말을 살 때가 되긴 됐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출발을 한다.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거리는 밤처럼 어두웠다. 꽤나 정성 들여 스트레칭을 했는데도 아픈 정강이는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통증에 초장부터 자주 멈춰 서야만 했다. 그냥 하루를 쉴까, 계속 고민이 됐다. 부르고스(Burgos)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걸 핑계 삼아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우선은 계속 길을 나아갔다. 복잡한 마음으로 망설이기만 했지, 결국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했다.
한 시간쯤 걷자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사라졌지만 이제 길의 분간이 가능할 정도의 빛이 있었다. 8시 반 마침 만난 벤치에서 잠시 쉬어간다. 아파서 더는 안 되겠다. 정강이뿐 아니라 발목까지 그랬다. 맞다, 그새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두꺼운 양말을 이중으로 덧대 신으면 발목 앞쪽에 무리가 간다는 걸 위클로웨이에서 톡톡히 경험했으면서도 까맣게 잊었다. 이 발목 통증은 아침에 새로이 신은 그 양말 때문인 것으로 추측이 됐다. 보통은 발의 습기 조절이나 물집 방지 등을 위해 얇은 발가락 양말과 두터운 울 양말을 이중으로 신으면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내게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발가락 양말 하나만 신고 내내 걸어왔던 터였다.
서둘러 양말을 벗었다. 신발 끈도 평소보다 느슨하게 풀었다. 발목을 돌려 근육을 최대한 이완시켜 주었다. 이미 왼쪽 발목이 살짝 부어 있었다. 하물며 오른쪽 정강이는 더 아팠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아침부터 힘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쏘냐. 1시간 넘게 걸어온 길, 되돌아가느니 더 나아가보는 게 나았다. 안티푸라민을 꺼내 잔뜩 발랐다. 하루의 무사를 기원하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싸한 연고 냄새에 코끝이 찡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 있는 몇 군데 알베르게를 찾아 왓츠앱으로 연락했다. 다들 자리가 없단다. 부킹닷컴에 나오는 숙소도 모두 매진이었다. 일찍이 길을 끝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거점이 없어 난감했다. 공립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지만, 최근에 빈대 이슈가 발생해 아무래도 거긴 내키지 않았다. 고민을 해봤자 답이 안 나왔다. 그러는 사이 부르고스로부터는 더 멀어졌다.
어쩔 수 없다. 원래 부르고스 다음의 목적지로 생각했던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까지 가는 수밖에, 더 이상 다른 수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걸으면서 숙소를 수소문하는 건 참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맴돌기만 할 이 고민을 그만하고도 싶었다. 차라리 이제라도 결심을 하고 길에 더 집중하는 게 나았다. 견디며 어떻게든 걸어가 보자. 그런 마음으로 요르니요스 델 카미노의 한 사설 알베르게에 예약 문의를 남겼다. 빠르게 답이 왔다. 마침 침대가 딱 하나 남아있단다. 됐다. 이제 시간의 제약 없이 천천히라도 가 닿으면 된다. 먼 길을 가야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구름이 깊은 오늘은 붉은 일출 따윈 없었다. 빗방울이 좀 떨어졌지만 군데군데 파란 하늘도 보였다. 들판 길을 걷고 고속도로와 강도 건넜다. 굴다리를 지난 뒤엔 고가를 넘었다. 해가 뜨긴 떴다. 습해서 조금 더운 느낌이 있었다. 망설이다 꾸역꾸역 이만큼이나 와버렸다. 어느덧 10km를 넘게 걸어왔다. 첫 번째 마을 Tardajos에 도착했다.
마침 초입에 활짝 열린 bar가 하나 있었다. 당장 더는 못 걸을 것 같아 커피 한 잔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회포를 풀었던 둘 중 떠나지 않은 하나를 여기서 우연히 만났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리가 아프다고 괜스레 그에게 투덜거려도 보았다. 초반에는 무척 힘들어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외려 쌩쌩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들어보니 오늘 아침에도 나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단다. 부러웠다.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가 쫀득한 하리보를 위로처럼 건넸다.
넉넉히 쉬었다. 속도를 맞출 수 없으니 그 친구에겐 먼저 가라고 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 곁을 걸었다. 10시 20분, 두 번째 마을 Rabé de las Calzadas을 지난다. 마을 끝자락에서 만난 Ermita de la Virgen de Monasterio 성당에서는 수녀님의 뭉클한 기도까지 받았다. 고통의 걸음 중이라 감동의 크기는 더 컸다. 언어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진중한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마에 닿은 감촉이 따스했다. 목에 걸어주신 소박한 목걸이가 아주 귀한 보석처럼 느껴졌다. 그라시아스, 무차스 그라시아스. 그 이상 더 드릴 말씀이 없었다.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송전탑을 이은 고압전선의 방향을 따랐다. 들판은 무심한 돌로 가득했다. 죽은 해바라기 밭도 무더기도 모두, 어딘지 앙상하고 허전한 분위기였다. 풍력발전기의 낮고 위압적인 소리가 윙윙 자꾸만 울려왔다. 바닥에 돌멩이가 많아 걷기는 더 힘들었다.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발끝을 밀어 스트레칭을 해줘야 했다. 황량한 그 길은 끝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부디 마을이 지면 위로 확 떠오르길 바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의 풍경은 묵묵히 한결같았다.
언덕의 고비를 넘자, 갑작스레 구불구불 내리막길이 나왔다. 그 끝에 멀리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가 보이기 시작했다. 빈 밭에선 분뇨 냄새가 확 끼쳐왔다. 새소리 가득한 나무는 한껏 재잘거렸다. 생각보다 남은 길이 멀었다. 평지나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겨웠다.
얕은 냇물을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12시 10분, 마을에 도착했다. 더딘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랐다. 속도는 고통과는 무관한가 보다. 어쩌면 체감은 몸보다 마음의 상태에 따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힘겨웠던 오늘의 길은 이걸로 끝이 났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는 바로 초입에 있었다. 예쁜 세요(sello)를 받으며 체크인을 마쳤다. 때마침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 마지막엔 운이 좋았다.
샤워와 빨래 후 휴식. 구멍 난 양말을 꿰매긴 꿰맸는데, 이미 거의 누더기 수준이다. 산토도밍고나 부르고스에서 진작 사둘 걸 그랬다. 세 개 챙겨 온 발가락 양말이 모두 다 엉망진창이었다. 등산용품점이 있는 마을이 어서 다시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때까진 이걸로 견뎌야 한다.
며칠간 정리하지 못한 사진 파일을 모두 외장 하드로 옮겼다. 하루치의 글을 쓰고 매일의 로고도 그렸다. 심한 냄새가 나겠지만 염치를 불고하고 안티푸라민을 다리에 잔뜩 발랐다. 이런저런 일을 하고 나니 벌써 두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되도록 다리를 쉬게 하는 게 좋겠지만, 마을 구경을 참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비도 그쳤겠다 결국 골목 탐방에 나섰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공립알베르겐지 성당인지 앞을 기웃기웃, 마을의 공동묘지도 공손한 자세로 살포시 구경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작은 bar가 있어 습관처럼 들어갔다. 기어코 맥주를 한 잔 시켰다. 익숙한 올드팝이 흘러나와 정겹고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운 Bar에서 나오고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환한 골목이 기분을 환기시켜 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남은 시간은 침대에 누워 가만히 휴식을 취했다. 커뮤니티 저녁 식사 메뉴는 역시 빠에야였다. 유쾌한 대화들이 있었고, 다 알아듣지 못한 많은 말들도 있었다.
밤이 내리자 어설픈 반달이 뜬다. 순간, 생장을 출발할 때 봤던 새벽의 그믐달이 떠올랐다. 그새 시간이 흐른 게 문득 실감이 났다. 이 다리의 고통도 그 흔적의 일부였다. 피식 웃었다. 그러게. 시작할 때는 몰랐던 것들을 지금은 아주 많이 알게 됐다. 아직 한창 길 위였고, 더욱이 아득히도 남았다. 어쩌랴. 통증은 오롯이 나의 것. 여기까지 왔음에, 오늘의 무사에 그저 감사를 할 수밖에.
일주일쯤 지나면 뜰 보름달을 기대했다. 아픈들 내일도 잘 걸어가겠지. 하루씩을 기다려 우선 보름달부터 만나자. 먼 먼 산티아고를 꿈에 그리느니, 당장 다가올 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그때도 피식 웃기를. 고통도 통증도 결국엔 모두 다 지나갔음을 추억할 그 미래가, 마치 지금인 양 미리 그리웠다.
2024.10.12.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3일 차(누적거리 304.11km)
오늘 하루 35,177보(21.6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