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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뚝절뚝 메세타, 저녁에는 비빔밥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4일 차

by 달여리
오르니요스델카미노~카스트로헤리스(≈19.47km)


다리가 아파 새벽에도 몇 차례씩 깼다. (아마도) 밤새 끙끙거렸다. 특히 오른쪽 다리는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이토록 상태가 안 좋아질 줄은 몰랐다. 맘 편히 걷겠다고 어젯밤 미리 숙소를 예약해 버리는 바람에, 얄짤없이 오늘은 19km를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난감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찍이 뜬 눈으로 멀뚱이다 결국 다섯 시에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엉기적 이층 침대에서 겨우 내려와 짐을 모두 챙겨 나왔다.


길게 아주 길-게 스트레칭을 했다. 준비된 조식을 천천히 챙겨 먹으며 쓸데없는 여유를 좀 부려보았다. 사실 그건 여유라기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운 것이었다. 스트레칭으로 나아질 다리의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을 했다. 예약한 숙소 비용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루를 쉬어야 하나. 허나 여긴 체크아웃 뒤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는 아주 작은 동네였다. 한나절을 바깥에 멍하게 앉아있느니, 고통스럽더라도 조금씩 걸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결국 일곱 시 반에 배낭을 멨다. 절뚝이며 그래도 길을 시작한다

<새벽 안개의 걸음>

골목의 가로등을 벗어나자 곧 언덕 사이로 길이 오른다. 안개 낀 어스름 위로는 새벽 별이 총총 반짝였다. 아직 어두웠지만 앞서가는 랜턴 요정들이 있었다. 검었던 하늘도 점차 푸르게 옅어졌다. 뒤따라 오던 사람들은 모두 순식간에 앞서 저 멀리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다.


별이 사라진 자리, 몽환적 서광이 자리했다. 어느새 붉은빛이 연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뒤로 당겨지는 풍경이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뭐, 어차피 더뎠다. 도무지 빨리 걸으래야 걸을 수가 없었다. 가려진 언덕의 능선과 나무의 줄기가 서서히 드러난다. 어렴풋이 윤곽선이 깨어났다. 줄곧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만 슬로우로 되감기듯 뒤로 멀어졌다. 위클로웨이를 마치고 나서 도착한 리버풀 공항에서 좀체 걷지도 못했던 내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다. 그리 위안을 했다.

<해가 떠오른다>

언덕을 다 올랐을 즈음 해가 떠올랐다. 모두는 일제히 뒤로 돌아섰다. 바짝 가라앉은 안개가 해돋이를 받치듯 낮게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시간의 흐름을 그저 바라본다. 갈래진 빛이 그늘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대지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이제야 살아있는 장면이 된다. 아직 남은 안개들이 땅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고통에도 걷길 잘했다. 이걸 보려고 시간도 속도도 그랬나 보다.

<빛의 평원>

부엔까미노(Buen Camino). 발걸음이 지나칠 때면 고개를 돌려 인사를 나눴다. 느리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외국 분도, 더러 한국 분도 계셨다. 9시 5분. 마을이라고도 하기엔 너무 작은 Arroyo San Bol 곁을 지났다. 그래도 5.7km를 걸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 사이를 주홍빛 흙 자갈길이 계속 뻗어나갔다.


부르고스(Burgos)에서부터 시작된 메세타(Meseta) 평원이 기다랗게 이어지고 있었다. 레온(León)까지 약 180km를 이 넓고 평평한 고원지대를 통과하게 된다. 크게 세 번 정도 풍경이 변주한다고 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프로미스타(Frómista)까지는 황량한 들판을 가르는 이 짙은 흙길이 반복될 예정이었다. 이후 사아군(Sahagún)까지는 평야와 농경지가, 레온(León)까지는 단조로운 시골길과 도로길이 번갈아 펼쳐진다고 한다. 메세타 평원을 걸어간다는 건, 당분간 제대로 된 그늘은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걷기가 점점 더 힘들었다. 도무지 못 걷겠다 싶을 그즈음에서야, 드디어 진짜 마을이 나타났다. 온타나스(Hontanas)는 그 자체로 내겐 빛 같았다. 더군다나 마을이 참 이쁘기까지 했다. 10시 10분. 마을의 초입에 있는 Bar에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 사 먹었다. 걷는 이 모두가 여길 거쳐가는 듯 대부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아주 길게 30분 간 휴식했다. 옆 테이블의 한국 친구들과도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더 이상 일어나기 싫을 만큼 편했다. 그만 멈추고 여기서 묵고 싶었다. 어쩌랴, 한숨처럼 배낭을 끌어당겼다. 다시 출발하려니 정강이가 아주 비명을 질러댔다. 모른척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팠다. 정강이가 이런 식으로 아픈 건 난생처음이었다. 찾아보니 무리한 운동 때문이란다.

<고통 속 빛이었던 온타나스 마을>

여기서부터 우연한 동행이 생겼다. 어제의 위로 같던 하리보. 피레네 산맥의 끝자락을 함께 한 뒤 우연히 숙소까지 같았던, 벨로라도에서도 부르고스에서도 따로 식사와 맥주를 나눴던 바로 그 친구였다. 자주 마주치고 만난 사이, 서로 말은 놓지 않았지만 형, 동생 사이쯤이 됐다. 날아가듯 걷더니 어찌된 일인지 그도 물집이 잔뜩 생겨 지금은 발바닥이 너무 아프단다. 나의 보조를 맞춰주어 고마웠다. 더는 걷기 힘들 정도였기에 그가 아니었다면 아예 주저앉아 버릴지도 몰랐다. 덕분에 더딘 걸음이 그래도 어떻게든 나아갔다.


지금은 이러저러한 상념보다 현재의 고통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빈 사이사이를 농담 같은 대화로 채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땡볕 아래 그림자만 짧아져 갔다. 그 많던 순례자들도 어느새 다 사라졌다. 느린 둘만 외로이 걸어갔다. 한쪽은 초록 풀밭, 한쪽은 회색 돌밭인 길이다. 분명 좋아할 만한 풍경인데도 시선이 잘 안 갔다. 그만큼 걷는 행위 자체에 온 정신을 쏟아야만 했다.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운 길>

12시. 기진맥진 마침 만난 나무 아래 잠시 쉬어간다. 배낭이 천근만근. 바닥에 앉는 것조차 자세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종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을이 멀지 않기를 기대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Antiguo convento de San Antón이라는 유적지가 나왔다. 여기 알베르게도 겸하고 있었다. 또 한 번 쉬어간다. 기부금을 내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쉰들 어차피 가긴 가야 한다.

<유적지 Antiguo convento de San Antón>

나무가 줄줄이 선 길의 끝, 아! 드디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다. 바로 오늘의 종착지. 산 꼭대기에 새워진 부서진 성곽이 인상적이었다. 환대처럼 그림자가 빛났다. 흔들렸다.


도착했다.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주변의 풍광과 잘 어우러졌다. 외지면서 아늑했다. 조용하지만 편안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Colegiata de Santa María del Manzano 성당에 들어가 구경을 했다. 숙소는 마을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시 40분쯤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12시 반 전에는 도착했으려나. 온몸이 녹초가 됐다. 무엇보다 다리가 만신창이였다. 정강이가 욱신거렸다. 절뚝임은 더 심해졌다.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다>

씻고 빨래를 하고 간단히 식사를 했다. 다리가 이 모양이면서도 역시 못 참고 약간의 동네 구경을 해본다. 문을 연 다른 호텔에서 맥주도 한 잔 마셨다. 날이 더워 금방 땀이 흘렀다. 오늘 묵는 알베르게는 한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저녁으로 나온다는 비빔밥이 기대가 됐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앉아 남은 오후의 시간을 편하게 보냈다. 다리를 뻗자 기운이 녹진히 흘러내렸다. 늦오후가 되면서부터는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빨래는 진작에 다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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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산책과 Albergue Orion, 점심의 김밥과 저녁의 비빕밥>

비빔밥은 먹을만했다. 푸짐한 밥에 힘이 났다. 여기 묵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알베르게의 한국 분들도 저녁 드시러 꽤나 오셨다. 고추장에 와인이 의외로 어울렸다. 그나저나 내일의 다리가 걱정된다. 정강이와 발목을 아무리 정성 들여 스트레칭해 봤자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내일도 걷긴 걸을 거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여기서 9.4km 떨어져 있다니, 적어도 그 정도는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머물지 말자. 못해도 한 마을씩은 나아가보자는 게 일단의 결심이었다.


밤은 또 금세 찾아왔다. 피로도 마찬가지다.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 다리의 상태는 여전히 글쎄다.



2024.10.13.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4일 차(누적거리 323.58km)

오늘 하루 38,333보(24.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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