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5일 차
카스트로헤리스~이테로데라베가(≈11.19km)
역시나 다리가 아파 자주 깬 밤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듯 발목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자다 깨다, 6시에 완전히 일어났다. 바로 짐을 다 챙겨 나왔다. 조식을 먹고 슬슬 준비 마쳤다. 오늘은 다음 마을까지만 가볼 생각이다. 하필이면 그마저 멀어 11km는 가야 했다. 7시 반에 출발했다. 괜찮아, 괜찮아. 최대한 여유로운 마음으로 길을 시작했다.
성당의 주홍빛 불빛, 하늘의 별빛.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이 지워가는 밤의 잔흔.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과 소리로만 존재를 알려오는 도마뱀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리지만 꼼꼼히 걸음을 디뎠다. 생생한 이 고통도 이왕이면 오롯이 느끼려고 노력했다. '걷기'를 있는 그대로 체감하려 한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8시 종소리가 뒤따라왔다.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 이토록 많은 순례자들이 묵고 있었던가, 비슷한 시간에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마치 라디오를 켜놓은 듯한 대화소리가 뒤로부터 들려왔다 앞으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날이 점차 밝아온다. 눈앞에 낮고 넓게 펼쳐진 구릉이 오르막으로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파스텔톤의 하늘이 분홍이었다 주홍이 된다. 노란빛 태양의 힘을 받으며 정상으로 띄엄띄엄 올랐다. 땀이 많이 났다. 오르막에서는 정강이가 그나마 덜 아파 다행이었다. 오르긴 금방 올랐다. 넓은 평원이 갑자기 확 펼쳐졌다. 역시나 산티아고순례길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향하는 길, 뒤로부터 비쳐오는 빛이 아침의 그림자를 길게 아주 길게 만들었다. 평평하나 높다란 길을 따라 걷는다. 허하고 환하다. 메세타 평원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곤 하는 바로 그 길이었다.
그동안 만나본 한국의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쨍쨍한 햇빛보다 흐린 날씨가 걷기 더 좋다고들 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빛이 가득한 날씨가 더 좋았다. 보는 풍경도 그렇지만, 걷는 기분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빨래 마를 걱정을 안 해도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순례길의 한여름을 경험해보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더운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 앞으로도 되도록 흐리지 않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내일부턴 비 예보가 계속 있지만, 부디.
내리막 직전 확 트인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9시, 그곳에 가방을 던져놓고 한동안 쉬어간다. 뷰 맛집이 따로 없었다. 물 한 모금만으로도 에너지가 충분해진다. 구릉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는 게 보였다. 넓게 이어진 빛, 밭과 숲이 아름다운 색조를 반사시키고 있었다. 지평선 가까이엔 안개가 아직 남았다. 여유도 이런 여유가 없다. 정해진 길이 평소보다 짧으니, 마음에 조급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시간과 금전적 여건만 된다면 꼭 이 정도(10km)씩만 걸어가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꼼꼼히 마을과 길을 살펴보면서 말이다. 다리가 아파 얻게 된 이 너른 상태가 감사하기까지 했다. 고통은 뭐... 됐다.
길 가에 앉아 그렇게 20분을 쉬었다. 더 쉴까, 아니 이제 그만 내려갈 때가 됐다. 오르막과 달리 내리막에서는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갔다. 한 땀 씩 겨우 발을 내디뎠다. 조심조심 그러다 찌릿찌릿. 저 멀리 마을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바닥에는 봉긋봉긋 솟은 개미집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라 해야 할까. 꼭 마음을 닮았다. 그래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황량한 사막 같은 장면이었다. 느린 만큼 더 풍경에 가까워졌다.
다 좋은데 웬 파리들이 너무 많았다. 온몸이 근질근질, 아무리 흔들어봤자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10시 10분, 길 중간에 뜬금없이 놓인 푸드캠핑카를 만났다. 다시 또 쉬어간다. 완전 대자로 뻗었다. 비싼 콜라 한 캔을 사 마셨다. 세요(sello)를 부탁했더니, 도장 대신 펜으로 어설픈 사인 같은 걸 해줘서 어이가 없었다. 어쩌겠어, 그냥 함께 웃었다.
며칠씩 자주 봤던 서양 여자아이가 멀리서부터 계속 지켜봤던 건지 다리가 괜찮냐고 물어왔다. 사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모두 다 그리 말을 걸었다. 아유오케이? 한껏 절뚝이며 거의 멈춘 듯이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였지만, 스쳐가는 그 호의들이 내심 참으로 고마웠다.
10시 50분, 좀 더 걷다 만난 Ermita de San Nicolás de Puente Fitero에서는 우연히 아름다운 음악을 마주했다. 잠시 쉴까 싶었던 것 뿐인데,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가 보길 참 잘했다. 알베르게도 함께 운영하는 이 성당에선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간식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한 순례자가 기타를 들었다. 헝가리 음악이라 소개한 그 음률이 마음에 닿았다. 며칠 전부터 길 위에서 자주 마주쳤던 어느 부부셨다. 내내 다정하게 걷던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브라보! 힘껏 박수를 쳤다. 나중에 말을 걸어 연락처까지 물어보았다. 찍은 영상을 후에 따로 보내드렸다. 덕분에 힘이 났다고 잊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다리가 많이 아팠고 그만큼 상당히 지쳐 있었다. 뜬금없이 만난 이 음악이 정말 크나큰 위로가 됐다.
황톳빛 강을 피테로 다리(Puente Fitero)로 건넌다. 강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수확된 (아마도) 감자가 밭 가장자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을 느낌 물씬한 나무숲을 스치듯 걷는다. 새소리가 환영의 인사처럼 재잘댔다. 가깝고도 내게는 먼 오늘의 목적지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 마을에 드디어 도착했다. 11시 반, 이르게 길이 끝났다. 11km도 결코 쉽지 않았다. 힘들었다. 고생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래, 잘했다. 휴. 안도의 큰 숨.
미리 예약해 둔 숙소는 딱 마을의 입구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서 식사나 간식을 즐기고 가는 듯했다. 아무리 걷기가 아파도 마을 구경은 못 참지. 체크인은 1시부터 가능하다고 해 배낭을 벗어두고 어기적어기적 동네 산책에 나섰다. 슈퍼에서 빵과자를 두 개 사 먹었다. 기어코 찾은 bar에서 맥주 한 잔도 마셨다. 롹스피릿 가득한 이 Bar Tachu의 세요(sello)가 아주 이뻤다. 올라, 올라. 하교하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동네 검은 고양이가 자꾸만 졸졸 따라와 뭐라도 된 양 기분이 좋았다.
한국을 좋아한다는 숙소의 주인장과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며 한바탕 웃었다. 시간에 맞춰 체크인을 한 뒤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세요(sello)를 바로 찍어주지 않고 순례자 여권(Credential)을 먼저 거둬가길래 의아했는데, 나중에 보니 실링 왁스 밀랍 인장으로 멋들어지게 찍어줘서 놀라웠다. (정성이 필요한 만큼 식사만 하는 손님에게는 세요를 찍어주지 않는단다. 숙박을 해야지만 받을 수 있는 귀한 세요였다.) 양해를 구하고 그 과정을 사진으로 몇 장 찍었다. 내 크리덴셜엔 친히 한글로 본인의 이름까지 써서 준다. 괜히 감동이었다. 인스타를 교환했고 조만간 사진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다리가 멀쩡했으면 그냥 지나쳤을 마을이었다. 오늘 만난 음악도 세요도 모두 행운 같았다.
그렇게 날씨가 좋았으면서, 4시가 조금 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빨래를 거뒀다. 아직은 덜 말라 축축했다. 일단은 침대에 걸어두지만 아무래도 빨래가 마를 것 같지가 않았다. 다행이랄까 비가 오래 내리진 않았다. 하지만 잔뜩 흐린 하늘은 내내 눅눅했다. 더군다나 이상할 정도로 이 동네엔 파리가 정말 많았다.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다 맞이한 오늘의 커뮤니티 식사는 역시나 맛이 좋았다. 빠에야가 아니라 파스타여서 오히려 신선했다. 지난번에 빵과 주스를 사주신 한국인 부부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대구에서 오셨다는 두 분의 한국인을 새로이 만나 반가웠다. 어찌나 살가운지 금세 그들의 행님이 됐다.
내일은 프로미스타(Frómista)까지 14km 남짓을 걸어가 보려 한다. 적당한 알베르게를 찾아 왓츠앱으로 예약도 미리 해뒀다. 비만 내리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하룻밤 사이 다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아지길 기대해 본다. 스트레칭은 큰 도움이 안 되니, 안티푸라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 방에 몰아잔 도미토리는 한없이 습했다. 그리고 밤엔 또 어김없이 끙끙댔다.
2024.10.14.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5일 차(누적거리 334.77km)
오늘 하루 23,906보(15.3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