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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가 닿기만 하면 뭐라도 된다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7일 차

by 달여리
프로미스타~카리온데로스콘데스(≈18.41km)


자긴 잔 거겠지. 눈을 떴을 땐 그래도 사방이 고요했다. 비 소리만 가득했다. 그것도 꽤 우렁찼다. 아무도 깨지 않은 방에 홀로 좀비처럼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동작은 늘 같았다. 침낭을 둘둘 말아 한 팔에 끼고, 나머지 팔로는 충전기와 핸드폰을 회수해 배낭을 들고 일단 방에서 나온다. 이번엔 침대에 널어둔 빨래도 거둬야 했다. 다소 눅눅했지만 이만하면 말랐다 치자. 세수와 볼일을 본 뒤 공용 공간에서 짐을 마저 다 싸면 끝. 떠날 준비는 의외로 금방 완료된다. 일어나서 길을 떠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번 다른 건 준비의 여건보다는 결국 의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자레인지로 조리할 수 있는 인스턴트 파에야로 아침 식사를 한다. 한 술 뜨는데 어제 만난 치즈냥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다시 나타났다. 인사인지 냥기척인지, 야옹하며 낭랑한 목소리를 낸다. 호스트가 알려준 녀석의 이름이 '심바'였던가. 어딘가 반려묘 호야와도 닮아 새벽부터 그리웠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그 의자를 냉큼 차지해 버린다. 거기가 따뜻하지? 귀여워서 봐준다. 남은 음식은 그냥 서서 먹었다. 쓰담쓰담. 녀석은 눈을 감더니 금세 잠에 취한다. 그릉그릉그릉.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진다. 그래그래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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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의 살가운 심바와 제주에 편히 있을 반려묘 호야&모무>

쾅쾅쾅. 정신없이 내려오더니 콘센트부터 찾으시는 한 아주머니. 통화를 하시며 갑자기 엉엉 우신다. 순간 얼음처럼 멈췄다.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걸 수 없었다. 영어도 아닌 것이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 수 없었다. 온갖 상황이 상상됐다. 먹던 걸 얼른 치우고, 자리를 피해 복도로 나왔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울음소리는 복도까지 선명히 따라 나왔다.


자는 내내 다리가 아팠다. 뒤척뒤척, 그것 때문이라도 자주 깼다. 정강이에 이어 발목까지 안 좋았다. 딱딱하게 굳은 듯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걱정이 된다. 날씨까지 궂다. 등산화를 신은 뒤 스패츠까지 찼다. 카메라는 아예 배낭에 깊숙이 넣었다. 바깥으로 나와 날씨를 노려봤다. 알고 있다. 비는 한동안 그치지 않을 거고 망설여봤자 소용없다는 걸. 우시는 아주머니께는 속으로만 위안을 건넸다. 매몰찬 듯 배낭을 휙 둘러멨다. 6시 50분 출발이다. 헤드랜턴에 우비까지 뭔가 중무장한 느낌이 들었다. 투투투투 투투투투, 비는 아주 전투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241016_iphone_9866(edit2)(resize2).jpg <시작부터 비>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의 마지막 가로등을 지나면서부터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동그란 시야 안으로 가로진 빗방울이 쉼 없이 비쳤다. 고속도로를 고가도로로 건넌다. 로터리를 멀리 돌아 둥글게 두 번 정도 통과했다. 마주 차가 오면 랜턴빛에 눈이라도 부실까 고개를 숙였다. 흙으로 된 인도엔 물이 가득 차있었다. 가장자리의 풀을 밟으며 최대한 웅덩이를 피해 걸었지만 한 시간도 안 돼 신발은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비가 너무 많은 건지 고어텍스 성능이 아예 죽어버린 건지, 물컹이는 신발에 초반부터 난감했다. 이 등산화의 수명은 이제 다한 걸까. 위클로웨이와 CTC 그리고 여기까지 겨우 800km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 이러니 섭섭하다. 정강이 근육 이상은 신발 밑창이 다 닳아 제대로 된 지지나 보호를 받지 못할 때 나타날 수도 있는 문제라는데, 하긴 정말 신발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7시 40분, 아직 어둠에 잠긴 첫 번째 마을 Población de Campos를 지난다. 도로를 따라 흙길이 이어졌다. 흐린 와중에도 날이 조금씩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슬슬 랜턴을 끌 수 있었다. 왕왕 내리던 비도 점차 주춤해져 갔다. 정강이의 통증이 발목까지 내려와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몇 걸음마다 쉬며 조심조심 발목을 쉬었다. 신발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보기도 했다. 물에 젖은 손이 쪼글쪼글 허옇게 불어있었다.


이 상태로 예정한 18km를 다 걸어갈 수 있을까. 웬만하면 그 거리를 걸어 큰 마을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까지는 가고 싶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거기 스포츠용품점이 있기 때문이다. 문 연 시간에 맞추려면 기착지로 지나는 것보다는 종착지로 머무르는 게 나았다. 새 양말이 필요하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건 절실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걸어가고팠다. 의지를 다시 다졌다.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파도, 일단 가 닿기만 하면 뭐라도 된다.

241016_A1_010(edit2)(resize2).jpg <도로갓길, 비슷한 길의 연속>

8시 40분, 두 번째 마을 Revenga de Campos에 도착했다. 다행이다 문 연 bar가 있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 귀찮아도 신발을 벗어 안티푸라민을 발목에 발랐다. 정강이 쪽이 살짝 부어 있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발의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까. 위클로웨이와 CTC를 거치며 무쇠다리라도 된 줄 알았는데, 그걸 믿고 너무 까불었던 게 아닐까. 돌풍을 만나며 무리를 했고 부르고스(Burgos)로 들어가며 역치를 넘었다. 그래, 그때부터 그랬다. 그렇다면 과신이 문제였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다.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집중하듯 몸의 상태를 온전히 느낄 수밖에, 고통스럽지만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하긴 걷고자 했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생생한 고통' 아니었는가.


9시 10분, 다시 출발했다. 비슷한 길이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세 번째 마을 Villarmentero de Campos도 통과한다. 쉴까 말까 고민하다 이번엔 그냥 이어 걸었다. 절뚝거렸다. 자주 멈춰야만 했다. 비는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그쳐가는 과정이라는 게 분명했다. 한 번씩 슬쩍 햇빛이 비치기도 했다. 그 덕에 안간힘을 더 냈다.

241016_A1_003(edit2)(resize2).jpg <5km, 마지막 힘을 내어본다>

10시 반, 마지막 중간마을인 Villalcázar de Sirga에 도착했다. 도무지 안 되겠는지 그만 여기서 길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차피 어디라도 체크인을 하려면 적어도 12시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할 거 이러나저러나 천천히라도 걸어가는 게 나았다. 마침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그늘막 쉼터가 있어 거기서 쉬어간다. 한숨을 돌리며 정신을 다시 다잡았다. 마을 안으로 100m만 걸어가면 bar가 하나 있다는데, 그까지 갈 여력도 없었다. 배낭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냈다. 비도 거진 그쳤겠다 사진을 찍으면 없던 에너지라도 날까 싶었다. 이제 5km 정도만 더 가면 된다.


15분을 쉬었다. 끝까지 걷는 대신 편한 하룻밤을 보내자 결정했다. 더는 망설이지 못하게 덜컥 싱글룸을 예약해 버렸다. 번잡한 인간들의 틈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것도 좋겠다. 개인 욕조가 있다니 저녁엔 반신욕도 하자 싶었다. 돈은 조금 들지만 그게 마음이 편했다. 목적지는 이렇게 확정됐다. 크게 숨을 한번 쉬고 엉덩이를 뗐다. 혹시나 다리에 피가 잘 돌면 괜찮을까 해 처음으로 무릎 보호대를 벗고 남은 길을 걸어가 보기로 했다. 맨날 반바지차림이라 그 부분만 햇빛에 타지 않아 모양새가 좀 웃기긴 하다. 까맣게 탄 다리에 허옇게 빈 무릎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꼭 한 번씩은 입을 대는 이야기였다. 뭐 상관없지. 이왕 걸은 거 티 좀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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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오늘의 목적지로 다가선다>

비는 그쳤다. 나타날 듯 말 듯 밀당의 햇살이 얄밉기도 반갑기도 하다. 산티아고 순례길 비석이 나올 때면 그 위로 걸터앉아 쉬곤 했다. 사진을 핑계로도 이따금 멈춰 섰다. 만약 누군가 무슨 사진을 찍냐고 물어왔다면, '아니 휴식 중'이라고 답했을 만한 순간들이었다.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을에 닿기까지는 억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만 같았다. 12시 반 입성했다. 종소리로 반겨주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 마을이었다. 숙소로 향하다 만난 작은 bar에서 소시지와 맥주로 점심을 해결했다. 두 군데 스포츠용품점을 찾아갔지만 발가락 양말이 없어 아쉬운 대로 얇은 발목 양말만 두 개 샀다.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빨래를 했다. 침대에 누우니 벌써 2시가 넘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온몸이 녹아내렸다.

241016_A1_059(edit2)(resize2).jpg <Church of Santa María del Camino>

그냥 푹 쉬면 좋을 텐데 뭔가 아쉬워 3시쯤 숙소를 나섰다. 어라, 날씨가 완전히 갰다. 세상이 환했다. 뭉게뭉게 파란 하늘이다. 누워있는 동안 마치 완전히 다른 곳으로 와버린 느낌이었다. 마트 구경을 했다. 치약도 사고 앞으로 만날 길고양이에게 줄 템테이션 간식도 샀다. 사과와 빵과 물도 샀다. 유레카! 지나다 무심코 든 기념품 가게에서 인진지 양말(발가락 양말)을 뜬금없이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두 개를 또 샀다. 오늘 양말에만 41유로나 썼다. 오호라, 갑자기 양말 부자가 됐다. 이러려고 나오고 싶었나 보다.


은행을 돌며 수수료가 가장 낮은 곳을 확인해 현금 출금도 했다. 숙소로 돌아왔다. 누우니 세상 편했다. 베개에 다리를 올려 피를 돌게 했다. 6시 즈음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엘 갔는데 7시부터 영업한다고 퇴짜를 맞았다. 다시 식당을 찾으려니 한도 끝도 없이 귀찮았다. 그냥 마트에서 간단히 게맛살 등을 사 와 대충 해결했다. 이제 숙소 밖은 그만. 이런저런 정비를 하며 싱글룸을 즐겼다. 이게 혼자 자는 묘미지, 음악도 (볼륨은 작지만) 실컷 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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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_A1_093(edit2)(resize2).jpg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

내일은 칼사디아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까지 17km 정도를 가보기로 했다. 안 되겠다 싶어 배낭 동키도 미리 예약해 버렸다. 5일 후쯤 만날 레온(León)에 한의원이 있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조심히 걸어가며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 듯했다. 다리가 호전될 때까지 당분간은 숙소 예약과 배낭 동키를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려 한다.


아프다고 멈추기는 싫었다. 자주 쉬며 천천히라도 나아가려 한다. 걸으며 이 고통만큼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소중하다랄까. 그러니 힘겨움조차 되도록 반가이 맞이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 멋진 길 위에서 울상 짓지 말자. 됐고, 내일은 날이 좋아 사진이라도 실컷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발라당 침대에 누웠다. 두 팔 두 다리 활짝 펴고 휘휘 빈 침대를 아무렇게나 저었다.


혼자 스피커로 듣는 음악이 달다. 외롭고도 편한 이 밤이 부디 길고도 깊기를.



2024.10.16.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7일 차(누적거리 367.27km)

오늘 하루 36,518보(2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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