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8일 차
카리온데로스콘데스~칼사디아데라쿠에사(≈17.06km)
연일 오락가락 날씨. 느지막한 밤엔 또 비바람이 몰아쳤다. 욕조의 특권을 잊지 않고 누렸다. 반신욕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괜스레 아까워 자기가 싫었다. 비 소리에 왠지 더 아늑했다. 널널한 음악이 좋다는 핑계로 열한 시가 훌쩍 넘을 때까지 꾸역꾸역 시간을 보냈다. 다리가 아파 중간에 깨곤 했지만, 밤의 농도가 깊었고 대체로 푹 잘 잤다. 6시 반 알람에 눈을 떴다. 이제 다시 걸을 차례가 됐다.
잔뜩 펼쳐놓은 짐을 챙긴다. 동키로 보낼 것과 직접 들고 갈 것을 나눴다. 6유로를 넣은 봉투를 배낭에 잘 메단 뒤 업체와 확인 메시지까지 왓츠앱으로 주고받았다. 7시 40분 즈음 숙소를 나섰다. 숙소 옆 일찍 문연 bar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커피는 쓰고 빵은 달았다. 날은 흐리고 또 추웠다.
신발이 덜 말라 아직 축축했다. 땅이 젖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내 마을을 빠져나간다. 날은 곧 밝아왔다. 오늘도 도로 곁을 따라 걷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몸의 상태를 제대로 느끼며 걷는 연습을 한다.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지 않고 유연하게 걷고 싶은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이제야 알게 됐다. 무의식 중에 힘을 꽤 많이 주고 걸어왔던 거였다. 아픈 부위에 특히 더 그랬다. 의도적으로 정강이와 발목의 힘을 빼보자 숨겨둔 통증이 마구 몰려왔다. 으윽 아팠다. 하지만 이 통증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러니 아플 거면 차라리 제대로 아픈 게 맞다.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 게 나았다. 힘을 빼고 오롯이 느끼는 것, 그건 꽤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무아지경의 상태가 필요했다.
길은 도로에서 벗어나 황량한 빈 밭 사이로 이어졌다. 내내 잔뜩 흐리더니, 9시가 조금 넘자 결국 비가 내린다. 추웠는데 뭐 잘 됐다. 우비를 꺼내 입었다. 쉬고 싶은데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마을은 아무리 가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부엔까미노앱을 다시 확인해 봤더니 마을 이름이 아니라 'Bar(Carrión - Calzadilla)'라 적혀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좀 전에 그냥 지나친 푸드트럭이 거기였나 보다. 오늘의 유일한 거점을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그것만 믿고 부지런히 걸어왔는데 그만 힘이 쭉 빠졌다. 다리가 많이 아팠다. 비까지 오니 이만저만 마뜩잖았다.
10시 15분쯤 드디어 야외 벤치를 하나 발견했다. 우비 채로 잠시 쉬어간다. 사과 하나를 꺼내 먹었다.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구경했다. 다급하게 달려오신 여성 분께서 급하게 화장실을 찾으시는데 도와드릴 방도가 없어 안타까웠다. 그러게 그러고 보니 오늘의 길은 중간에 화장실조차 하나 없는 구간이었다. 휑하니 숨을 만한 장소도 없다. 저 멀리 달려가는 그녀는 어찌 되었을까. 어쨌든 섭취를 줄여야겠다 싶었다. 엉덩이를 일으켰다. 쉬었다 걸으니, 웬걸 통증이 더 심했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 길. 드넓은 밭과 평야 사이를 걷는다. 반복된 풍경과 축축한 날씨가 우울하다. 햇빛이라도 나면 힘이 좀 나겠는데 잔뜩 찌푸려 춥기만 하다. 몸도 마음도 축축 처져갔다. 11시 15분, 또다시 만난 벤치에서 쉬어간다. 그 바로 옆에는 400km 남았다는 표식이 서있었다. 투덜이던 불평이 하늘에 가 닿았는지 슬슬 날이 갤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지만, 서쪽 끝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구름이 걷혀가는 게 보였다.
다리의 상태가 언제 어떻게 호전이 될지, 아니면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다만 후에 산티아고순례길을 추억할 때면 고통으로 걸은 이 며칠 간의 순간들이 가장 또렷이 떠오를 게 분명했다. 길은 풍경이기도 하지만 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걷다 보니 깨닫게 된 건 ‘산티아고순례길’이라는 하나의 대명사란 건 없다는 사실이었다. 경험을 나눌 수야 있겠지만, 그 경험을 일반화할수록 거기에 간극과 오류가 발생하고 만다. 이를테면 "너와 나는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다."라는 식의 뭉뚱그림이랄까, "산티아고순례길은 이거야, 저거야"하는 식의 아주 무례한 개괄이랄까. 함께 걸어가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이 길의 특성상 그러한 착각에 빠지기 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으로서 개별의 길이 있을 뿐이다. 형태로서의 길은 하나겠지만, 그러니 모두의 순례길은 결국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걸 잊지 않기로 하자. 나의 길은 그저 현재의 상태를 닮았다.
17km가 이렇게 멀었던가. 다리가 고장난 것에 비하면 그래도 빠르게 걸어온 편이었다. 가는 길이 억만 시간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었다. 목적지 마을이 과연 나오긴 할까. 도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풍경이라곤 그저 지평선만 있었다.
12시가 넘자 발끝에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이 열렸다. 그럼에도 해는 나타날 듯 말 듯 완전히 드러나진 않았다. 맑음의 뉘앙스가 곳곳으로 피었다. 그림자가 바로 그 증거였다. 비는 진즉에 그쳤다. 다 좋은데, 마음을 알아줄 리 없는 길은 한도 끝도 없이 자꾸만 길어져갔다.
오늘의 종착지 칼사디아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 마을은 갑자기 나타났다. 평원보다 낮은 지대에 있어 내내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1시쯤 덜컥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바로 있었다. 체크인 전에 커피 한 잔부터 시켜 먹었다. 화장실 걱정을 할 필요가 이제는 없어졌다. 샤워와 빨래, 그리고 휴식. 점심은 CTC때부터 들고 다닌 라면을 뽀글이로 해 먹었다. 잠시 마을을 돌아다녀 봤지만 뭐가 없었다. 그만큼 작고 좁았다.
햇빛이 잘 나더니 오후 늦게 소나기가 내렸다. 아, 속상해. 잘 마르던 빨래가 그만 쫄딱 젖고 말았다. 그걸 걷느라 몸도 흥건해져 버렸다. 한 일이십 분쯤 쏟아졌나, 다시 햇빛이 났다. 마음도 덩달아 오락가락했다. 어쩌라는 건지 뒤늦게 또 비가 왔다. 그러다 확 뜬 무지개. 이토록 선명하고 가까운 무지개는 모처럼이었다. 두터운 먹구름과 대비돼 오히려 더 진하게 빛이 났다.
이게 또 고단했던 하루의 충분한 보상이 된다.
포털 뉴스를 보다 보니 여기저기 슈퍼문 기사로 난리다. 여기도 뜰까, 먹구름이라 어려우려나. 한국과 시간대야 다르겠지만 우주도 달도 하나니까 그래도 괜히 기대해 본다. 근처에서 순례자 메뉴로 푸짐히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해넘이와 달돋이를 우연히 순서대로 본다. 먹구름 사이로 진하게 진 석양도 환상적이었지만,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슈퍼문에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입이 쩍 벌어졌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숨이 멎은 듯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연주하는 기타 음악까지 곁들여졌다. 그렇게 두 번째 보상까지 완벽히 받고 말았다. 일종의 응원이었다. 마음이 한 움큼 푸짐해졌다.
짐을 미리 챙겨둔다. 안티푸라민도 꼼꼼히 발랐다. 내일도 동키를 보내련다. 공립 알베르게로 갈 예정이라 숙소는 따로 예약하지 않았다. 걸으니 또 걸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배낭이 없으니 그래도 걸을만했다. 내일의 목적지 사아군(Sahagún)까지는 20km가 넘는 길, 새벽 일찍 출발하자 결심했다. 그러니 얼른 자야지. 터질 듯 부른 배를 움켜잡고 뒤뚱뒤뚱 잠자리에 누웠다. 아까 본 슈퍼문이 아른거렸다. 머리맡 창가로 그 빛이 환하게 비쳐 들었다. 눈 부시기는커녕 포근했다. 자장자장, 따스한 음악처럼 감은 눈두덩이 위를 은은히 감싸왔다.
2024.10.17.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8일 차(누적거리 384.33km)
오늘 하루 31,322보(19.6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