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9일 차
칼사디아데라쿠에사~사아군(≈21.33km)
어둑한 침대 사이를 걸어 나가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가 않다. 5시 반에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한 뒤 짐을 모두 챙겨 1층 공용공간으로 내려갔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슈퍼문은 방향만 바꾼 채로 여전히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날씨가 상당히 추워졌다. 긴 바지에 바람막이와 경량 패딩 조끼까지 껴입었다. 오늘도 동키로 배낭을 보낸다. 20km가 넘는 긴 거리지만, 덕분에 차림이 가벼워져 심적 부담은 덜했다.
6시 40분,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숙소에서 가장 먼저 길을 나섰다. 처음엔 절뚝거리며 걸었지만, 통증에 익숙해질수록 조금씩 제 박자를 찾아갈 수 있었다. 슈퍼문은 거들뿐 헤드랜턴에 시야를 의지한다. 마을을 금방 벗어나 도로 옆 흙길을 따라 걷는다. 며칠 동안 이어진 그런 비슷비슷한 길이다. 신발은 어느새 뽀송뽀송 다 말라있었다. 덜 아프라고 느슨하게 풀어둔 발목의 끈이 오히려 불편해 다시 단단히 고쳐 매야했다.
오늘도 힘 빼기 연습의 연속이다. 여전히 쉽지가 않다. 걷다 보면 무심결에 힘이 또 들어가 있었다. 잊지 않고 의식해야 했다. 지난밤 사이에도 역시 다리가 아파 자주 깼었다. 처음엔 오른쪽이 심했는데, 이제 왼쪽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뒤로는 우주처럼 밝아오는 서광이 있었다. 걷는 방향 내내 얼굴을 마주한 둥그런 달도 있었다. 점점이 박힌 별. 랜턴 빛에 반짝이는 이슬.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가득, 홀로 나긋이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적절히도 평온했다. 고요에 마음을 기댔다.
8시 5분, 레디스고(Ledigos) 마을에 도착했다. 통증과 달리 걸음은 빨랐나 보다. 마침 문을 연 알베르게 겸 bar가 있었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달래고 간다. 20분간의 꿀 같은 휴식. 따스한 곳에 있다 나오니 공기는 더 춥게 느껴졌다. 하늘에 낀 어둠이 어느덧 사그라들었다. 분홍빛 하늘과 누런 들판, 그 위로 뜬 선명한 달이 아름다웠다. 동그란 일출과 여남은 달이 동시에 있다. 등으로 부드럽게 떠미는 따스한 햇살과 방향을 인도하는 커다란 달, 그 묘한 에너지가 온몸에 전달된다. 아침마저 함께 여는 슈퍼문에 길은 위로를 받는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얼굴의 표정에는 따사롭게 온기가 돌았다.
9시, 두 번째 마을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에 도착했다. 지붕 위엔 조잘거리는 새들이 한가득 몰려있었다. 날이 맑았다. 햇빛이 선명해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몸에도 슬슬 열기가 올랐다. 아직 입김은 폴폴 났다. 땀이 나기 시작해 입었던 꺼풀을 하나씩 벗어 가방에 넣었다. 날이 밝아올수록 달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오래도록 윤곽은 분명히 남았다. 결국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은 사진처럼 풍경으로 기억에 남긴다.
9시 50분, 세 번째 마을 Moratinos를 스치듯 지난다. 아픈 만큼 두 가지의 갈림길 중 더 짧아 보이는 도로 옆 샛길로 걸었다. 왼쪽으로 보니 저 멀리 들판 사이로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보였다. 이 길엔 사람이 없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모처럼 최백호의 「바다 끝」을 몰래 들었다. 이따금 차가 쌩하고 지나갔다. 달이 없는 하늘이 허전해 자주 올려다보지는 않았다.
10시 15분, 마지막 마을 San Nicolás del Real Camino에 도착했다. 어느 bar에 들러 또 한 잔의 커피로 여유를 가진다.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선명했다. 가만히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빛의 그림에 넋을 잠시 놓았다.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갔다. 스쳐가는 미소는 덤, 서로를 알든 모르든 올라(Hola)와 부엔까미노(Buen Camino)로 인사를 나눈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부엔까미노(Buen Camino)가 이제는 제법 입에 익었다. 그 인사가 가진 힘을 느낀다. 천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순례길의 역사, 그 오랜 시간 조성된 길 위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산티아고순례길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문양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다양한 상징들이 있다. 그것이 이 길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30분 정도를 쉬었나, 도로를 따라 난 오솔길을 걷는다. 저기 저 도로 너머 사아군(Sahagún)이 보이기 시작했다. 숲길로 들자 곧 자그마한 푸엔테 성모성당(Ermita de la Virgen del Puente)을 만난다. 성모상이 일으킨 기적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문이 닫혀 내부로 성모상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예전에는 순례자 병원이나 나병 환자를 위한 시설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란다. 순례자들에게는 프랑스길의 중간지점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길의 절반을 이미 넘었다.)
걸어 걸어 사아군으로 들어간다. 철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자 공립 알베르게가 바로 나왔다. 12시 5분 도착. 동키로 보낸 배낭도 이미 잘 도착해 있었다. 말씀이 많으신 데다 동작까지 느리신 직원분 덕분에 체크인을 하는데 30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나를 포함해 단 두 명 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낡았지만 시설은 나름 괜찮았다. 샤워부터 하고 빨래를 널었다. 휴식도 취하지 않고 바로 길을 나섰다. 먼저 갈 곳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중간 증명서(half-way certificate)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공식 문서는 아니지만, 프랑스길의 절반을 걸어왔다는 걸 확인하는 일종의 '기념품'같은 거였다. 안내된 지도를 따라 발급처인 Santuario de la Peregrina를 찾아갔다. 다리가 아파 절뚝이면서도 어떤 의지를 내비치듯 천천히라도 걸었다. 가는데 10분, 발급엔 5초 남짓 걸렸다. 3유로였다. 이게 뭐라고, 기분만은 유쾌했다.
돌아오는 길 마을을 둘러 마트에도 들렀다. 사과 등 간식거리를 샀다. 곧장 알베르게로 향하지 않고 골목을 더 구경했다. 적당한 Bar로 들어가 늦은 점심과 함께 맥주도 한 잔 마셨다. 여기서 받은 세요(sello)를 마지막으로 어느덧 생장에서 받은 순례자 여권(Credential)의 빈칸이 꽉 찼다. 걸은 지 10일쯤 지난 벨로라도(Belorado)에서부터 열심히 찍기 시작해 이렇게 채워졌다. 처음부터 부지런히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좀 아쉽긴 했다. 생장의 첫 숙소에서는 아예 세요(sello)를 받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알베르게의 주인장은 왜 물어보지도 않았을까. 보통은 체크인 시 순례자 여권부터 보여달라고 한다.) 중간 증명서에 더해 꽉 찬 크리덴셜까지,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새로운 순례자 여권(Credential)을 채워 나갈 차례다. 그건 부르고스(Burgos)에서 진작에 사 두었다.
다리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 고생 중이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예정된 길을 그대로 걸어 나갈 작정이다. 내일은 18km 정도다. 동키로 배낭을 보내기 위해서는 목적지의 숙소를 미리 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픈들 어찌어찌 걸어갈 수는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제 대도시 레온(León)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거기 한의원이 있다던가, 정 안되면 치료를 받던지 해야겠다.
이제 3일만 가면 된다. 조금만 더 참아 보자.
2024.10.18.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19일 차(누적거리 405.66km)
오늘 하루 40,989보(28.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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