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0일 차
사아군~엘부르고라네로(≈18.18km)
메모장에 ‘누나 생일’이라고 미리 적어 두고 잤다. 덕분에 일어나자마자 잊지 않고 카톡 축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잠에 쉬이 들지 못한 밤이었다. 자긴 잤다. 다만 보기 싫은 얼굴들이 잔뜩 떠오르는 악몽이 난데없이 계속 됐다. 왼쪽 발목의 통증 때문에라도 자주 깼다. 눈을 뜰 때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기억나는 시간만 1시 21분, 2시 43분, 4시 13분, 4시 51분. 부단히 자려고 노력했다. 밤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다 여섯 시 반쯤 겨우 일어났다. 이런저런 준비와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벌써 일곱 시가 넘었다. 7시 20분 즈음 서둘러 출발했다. 역시 배낭은 동키로 보내고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달은 아직 둥글었다. 문 연 카페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둘레둘레 골목을 거쳐 강물 소리 다리를 건넜다. 도로 옆 흙길을 걷는다. 마을을 벗어나자 가로등도 모조리 동이 났다. 완전히 검은 어둠. 헤드랜턴을 켰다. 동그란 시야의 시간이 잠시 시작됐다.
빛 반사된 하얀 간판만 어둠 속에 덩그러니 뜬다. 그 표지판에 의지해 길을 나아갔다. 오늘은 어제만큼 춥지 않았다. 똑같이 껴입었더니 금세 땀이 쏟아졌다. 조끼를 먼저 벗었다. 곧 바람막이를 벗고 목에 찬 타프까지 뺐다.
여덟 시가 넘자 서서히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날이 흐려 일출은 딱히 없을 듯했다. 4km 떨어진 첫 번째 마을에서 아침식사를 하려ㅍ했는데, 막상 가보니 길에서 한참 벗어난 위치에 었었다. 추가로 더 걸어갈 여력이나 심적 여유 따위는 지금의 내게 사치와도 같았다. 다음 마을이자 오늘의 마지막 중간 마을까지는 8km 정도를 더 가야 됐다.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는 더 미루기로 했다.
아쉬운 대로 어제 사둔 사과와 견과류를 걸으며 먹었다. 아드득아드득, 다 말라 버린 옥수수밭 옆을 걸었다.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중간중간 놓인 벤치에 잠시씩 쉬었다가 걷길 반복했다. 아침이 밝아온들 날이 흐려서 눈이 침침했다. 빗방울이 몇 번 떨어졌지만, 완전히 비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9시 40분, 고대했던 마지막 중간 마을 Bercianos del Real Camino에 도착했다. 문 연 알베르게 겸 카페가 마침 있었다. 미뤘던 만큼 거하게 시켜 든든히 먹는다. 30분 정도를 쉬었다. 이럴 때 마시는 따뜻한 커피는 참 힘이 된다. 초코레또는 달콤했지만, 차가웠던 또르띠야는 솔직히 맛이 없었다. 그래도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텅 빈 배는 가득 채웠다.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고양이 두 마리가 빤히 쳐다본다.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마주했다. 이리 온 이리 온, 손짓을 알아듣는지 쪼르르 달려와 감동을 받았다. 준비된 템테이션을 조심조심 뜯어 간식으로 내어주었다. 맛있는지 졸졸졸 더 따라왔다. 얄짤없이 세 개씩만 주고 더 주진 않았다. 야옹야옹, 그 소리가 우렁차다. 괜히 입맛만 나쁘게 한 건 아닌지 주고 나서도 미안했다. 아니 더 줄 걸 그랬나.
그저 그런 길의 연속이다. 흐리기까지 해 더 볼품이 없었다. 날이 좋았다면 달랐을까. 날씨 탓인지 길 탓인지 아니면 몸의 상태 때문인지. 어딘가 죄다 우울했다. 그리도 지루했다. 다리가 무진장 아팠다. 하지만 사정한들 길이 절로 다가와 주는 것도 아니다. 멈추면 멈추는 만큼 길은 고스란히 남는다. 길 위의 모든 건 하는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다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썩어버린 흙 같은, 익숙한데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냄새도 진하게 났다. 기차가 띄엄띄엄 지나다녔다. 황량한 밭에 낡은 깃발이 부대꼈다. 도대체 어디까지 스산할 생각인가. 짙은 먹구름이 지표면 가까이 닳을 듯 말 듯했다. 습한 기운은 점차 강해졌다.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자 뜬금없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마을이었다. 11시 50분께 도착했다. 다 걸었다는 안도감에 희미한 미소가 저절로 피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1시 체크인이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등산스틱만 문 앞에 세워두고 동네를 잠시 산책했다. 멀리서 볼 땐 커 보였지만, 아니 조그마한 동네였다. 어찌 한국 라면을 팔고 있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어 괜스레 반갑기도 했다. 캔맥주 하나를 사 마셨다. 골목의 파라솔에 앉아 띄엄띄엄 오가는 순례자들을 무심히 구경했다. 부엔까미노(Buen Camino)라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시간에 딱 맞춰 체크인을 한 뒤 늦은 점심부터 먹으러 갔다. 지역식 메뉴라길래 굳이 시켜보았다가 너무 입맛에 안 맞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배는 얼마간 채웠다. (사실 거의 다 남겼다.) 약간은 슬픈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동네도 대충 둘러본 데다 이제 할 일이라곤 쉬는 것 밖에 없었다. 숙소 로비에 한국 분들이 계서 어쩌다 합석을 하게 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와인도 곁들어 마셨다. 안주로 견과류를 먹었고, 저녁은 그걸로 퉁쳤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더 먼 거리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만하면 다행이지, 그래도 감사했다. 지금의 상태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휴식을 즐기는 게 능사다. 일찍이 침대에 누웠다. 어쩐 일인지 와르르 잠이 쏟아졌다. 천장이 통으로 터 있는 이 알베르게의 특성상 아래층의 정신없는 대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오는데도 그랬다. 웅웅웅, 소음도 자장가처럼. 누군가 주방에서 양파라도 잔뜩 썬 건지 2층에서도 눈이 매웠다. 덕분에라도 자꾸만 눈 감겼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침대는 심히 삐걱거렸다. 코 끝이 찡했고, 꿈은 깊었다.
2024.10.19.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0일 차(누적거리 423.84km)
오늘 하루 31,726보(22.0km)
*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여기까지입니다. 금요일부터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가 바로 이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이 여정을 내내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