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와 열기 사이, 삐딱함과 못마땅의 차이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5일 차

by 달여리
빌라프라이아데앙코라~빌라노바데세르베이라(≈24.9km)


잠을 많이 설쳤다. 비몽사몽 이게 꿈인지 생신지, 온통 헷갈리는 그런 밤이었다. 여섯 시가 넘어 겨우 일어났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멍한 정신에도 곧장 나설 채비를 했다. 모처럼 긴 바지를 꺼내 입었는데 아뿔싸 지퍼가 터졌다. 에이 누가 보겠어? 웃옷으로 대충 덮으면 되겠지, 그냥 입고 나섰다. 훅 불어닥치는 비릿한 바람. 짙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주홍빛 가로등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어두웠고, 조용했다.

<새벽 어둠>

일곱 시 출발. 확실히 눅눅한 공기, 그러나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겉보기와 달리 춥지도 않다. 길은 우선 바닷가를 따라 시작됐다. 얼마 되지도 않아 모든 가로등이 일제히 툭하고 꺼졌다. 딱 걷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만 어두웠다. 멀건 파도가 끊임없이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가 어둡게 빛났다. 그 소리가 시야처럼 길을 이끌었다.


바위 해안이 죽 이어졌다. 건너편 마을 사이로 기차가 한 번씩 지나다녔다. 저만치 백사장이 보이기 시작해 반가웠다. 하지만 하필 길은 바닷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빠진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바다와는 또 이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겨우 달래며 철길 아래 굴다리를 통과했다. 8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첫 번째 마을 Moledo에 도착했다.

<역시나 아주 짧았던 ‘해안’길>

초입께 주민들이 여럿 모인 카페가 하나 눈에 띄었다. 마침 시간도 허기도 아침 먹기에 딱이었다. 크루아상과 에그타르트 그리고 카페라떼를 시켰다. 오, 맛있다. 검색해 보니 구글평점도 꽤 높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모두가 인사를 건넸다. 적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몽글한 호의로 가득한 곳이었다. 따스한 빛깔의 조명이 흐린 아침을 밝혔다. 정겨웠고 정갈했다.


20분간의 포근한 아침식사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작고 조용하고 다정한 이 동네를 로터리를 돌아 천천히 빠져나간다. 한동안 철길 곁을 따라 걸었다. 어느덧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부슬비였던 것이 기어코 장대비로 완전히 바뀐다. 서둘러 우비를 둘러 입었다. 갇힌 습기에 열기가 솟아 땀까지 쏟아졌다.


바다를 벗어난 마을길은 이제 강을 거슬러 오른다. 날씨는 자주 변덕을 부렸다. 와락 내리던 비가 다시 부슬비로 바뀌고, 그칠 듯 말 듯하다 왁 쏟아지곤 했다. 우비를 입을 때면 너무나도 더워 괴로웠다. 잠시라도 비가 소강상태가 될라치면, 그때마다 우비를 벗었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우비의 안과 겉이 똑같이 물로 다 젖어버리고 말았다. 미끌거렸고 끈적했다. 습하기 그지없어 대놓고 찝찝했다.

<강을 거슬러 마을을 통과한다>

9시 즈음, 두 번째 마을 Caminha를 통과한다. 하루쯤 머물러가도 괜찮을 만큼 번듯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구경삼아 성당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난데없이 환한 햇살이 쏟아져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몰려온 먹구름에 어김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바닷가를 에둘러 가는 길, 긴 다리를 넘어 coura 강을 건넜다. 철로는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며 여전히 길의 방향을 잡아주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 빌라 노바 데 세르베이라(Vila Nova de Cerveira)에는 숙소 대안이 많지 않았다. 늦은 4시에 체크인 가능하다는 한 호스텔과 이른 2시 체크인이 가능하지만 다소 비싼 호텔 더블룸 정도가 갈만한 곳의 전부였다. 아무래도 호텔에 묵기엔 돈이 아까웠다. 체크인 시간까지 기다리느라 지치긴 하겠지만 그래도 호스텔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니 굳이 빨리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근처에 도착해선 맛있는 식사라도 느긋이 즐길 요량이었다. 최대의 관심사인 빨래 건조만이 문제였다. 건조기가 부디 있기를. 아무리 찾아봐도 호스텔 정보에 세탁 서비스 관련 사항은 보이지가 않았다.

<길의 풍경들>

마을을 올라 골목골목을 굽이쳤다. 동네분들의 상냥한 인사말들. 추적거리는 비만 아니라면 더 환히 웃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런, 폭우가 쏟아진다. 10시 45분쯤 도착한 네 번째 마을 Lanhelas에 문 연 카페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겨우 몸을 숨겨 테이블에 기댔다. 카페라떼와 에그타르트를 또 시켰다. 빗소리만 가득.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눈을 감고 거기 머물렀다.


40분 정도가 지났을까, 비가 확연히 줄어든 게 보였다. 결심을 굳혀 카페를 나섰다. 길은 숲을 둘러 마을의 뒤편으로 오르도록 나있었다. 은근한 오르막이 계속 돼 금세 숨이 가빠졌다.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약이라도 올리듯 자꾸 오락가락했다. 비의 습기에 몸의 열기까지 더해져 안경마저 뿌예졌다. 뵈는 것도 없어,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모든 게 젖어 어떻게도 물기와 습기를 닦을 수가 없었다.


더 많은 비가 아닌 것에 감사하려 애쓰고 또 애썼다. 괜찮다, 토닥였다. 골목마다 짖어오는 강아지들에 한 번씩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골목골목을 이리저리로 통과하며 조금씩 길의 감각을 잊었다. 방향의 가늠보다 몸의 관성으로 기능했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또 빨래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눅눅한 길의 풍경들>

배가 고팠다. 에그타르트는 허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제 사둔 귤 세 개를 내리 까먹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그게 또 맛있었다. 손에서는 상큼한 스트러스향이 났다. 역시나 끈적끈적.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중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곳에 손을 담가 대충이나마 헹궈냈다.


마을과 잠깐의 숲, 은근히 잦은 오르막을 견디며 골목의 샛길을 걷는다. 오늘도 길이 베베 꼬였다. 지쳐 더욱 그리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프랑스길과는 길의 결이 다르긴 다르다. 5일 동안 걸어온 포르투갈해안길의 느낌은 그랬다. 뭐랄까, 구색을 맞춰 억지로 이어놓은 '길을 위한 길'이랄까. 어쩌면 2016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신상' 순례길의 한계적 숙명일런지도. 안타깝게도 프랑스길을 걸은 바로 다음이라 자꾸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이 힘들어서 마음이 삐딱하진 탓도 있다. 걸으며 연신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스스로도 못마땅했다. 아니 왜 더 걷기로 했더라?


잘 알면서.

<철길과 계속 만났다 헤어졌다>

비슷비슷한 골목과 짧은 숲길을 들쭉날쭉 빗속에 걸었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만 같은 길도 드디어 오늘의 끝으로 당도하고 있었다. 1시 10분 목적지 마을 끝자락 그 즈음, 몇 개의 식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4시 체크인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었고, 꾹꾹 눌러놨던 허기가 폭발하기 거의 일보 직전이었다.


초입께 보인 인도 음식점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며칠 전 군침을 흘렸던 길거리 어느 식당의 카레 냄새가 확 떠올랐다. 카레에 난을 곁들여 맥주도 시켰다. 기본으로 포함된 밥과 튀긴 난까지, 아주 거하도록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점심이라 생각했는데 저녁까지 해결해 버린 느낌이었다. 천천히 음미했다. 시간은 충분했고, 쌀 한 톨 부스러기 하나 남김없이 싹 다 먹어치웠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도 2시 반이었다. 하릴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혹시 몰라 건조기가 있는 코인세탁방도 미리 탐색을 해뒀다. 성당과 관광안내소에 들러 도장(sello)을 받았고, 강변까지 나가 스산한 풍경도 잠시 감상했다. 로터리 근처에 슈퍼가 있었다. 귤 다섯 개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더는 할 일도 갈 곳도 없어 다시 성당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내려놓고 한동안 엎드려 쉬었다. 희미한 쉰내가 오른다. 뼈마디마디에서 쉬이이익 김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3시 종소리가 울려왔다. 아직 한 시간 남았다. 유난히 하루가 길다.

<빌라 노바 데 세르베이라>

4시에 칼같이 맞춰 호스텔로 들었다. 웬걸 멋진 도장(sello)을 두 개나 선사하는 호스텔. 친절한 안내와 공간의 쾌적함이 지친 심산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4명이 같이 쓰는 도미토리 방엔 아마도 연박을 하신 듯 이미 한 분이 주무시고 계셨다. 조심조심 짐을 정리한 뒤,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물어보니 호스텔에 건조기가 있긴 있는데 하필이면 어제 고장이 났단다. 미리 알아두길 잘했지, 건조기를 돌리러 먼 길을 건너 코인세탁방으로 향한다. 이미 다섯 시가 훌쩍 넘었고 흐린 날이 진작부터 저물고 있었다.


16분간의 건조를 기다려 챙겼다. 양말이 살짝 덜 말랐지만 이 정도면 침대에 널어두는 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이미 밤이었다. 끄트머리의 빛이 어렴풋이 어둠에 걸려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밀린 파일들을 정리했고, 귤을 까먹으며 맥주 한 캔을 천천히 마셨다. 하루를 반성했다. 거푸 삐뚤어지려 하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보듬었다.

<하루의 끝>

호스텔 직원분께서 내일은 마을 쪽 말고 강변 방향으로 걸으라 추천해 주신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쪽은 차도 많고 길이 이리저리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단다. 강변이 뷰우-티풀 하다니, 아무래도 추천 따라 그래볼까 싶다. 오브리가도, 무이뚜 오브리가도.(Obrigado, Muito obrigado.)


호스텔 조식이 7시 45분부터. 그것까지 챙겨 먹고 8시 반쯤 비교적 천천히 출발해 보려 한다. 내일부턴 삐딱한 마음이 더 이상 나오질 않길 바라며, 잠을 청한다. 오늘은 부디 푹 잘 수 있길. 이왕이면 또렷하고 좋은 꿈도 꾸고 싶다.



2024.11.2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5일 차(누적거리 120.9km)

오늘 하루 41,021보(26.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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