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라서 충분한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6일 차

by 달여리
빌라노바데세르베이라~뚜이(≈17.7km)


여러 가지 이유로 잠을 설쳤다. 거의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단 한 명이었던 룸메이트 포르투갈 아저씨는 밤새도록 코를 엄청나게 고시더니, 여섯 시에 울린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재깍 잘도 일어나셨다. 물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방의 모든 불을 켜는 바람에 눈이 부셨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아주 개운히 잔 듯한 그 나른한 표정이 얄궂기 그지없었다. 하품이 자꾸 났다. 눈이 감겼지만, 잠에 들진 못했다.


7시에 그가 나간 후, 나도 일어나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침대에 누워 쉬다 7시 45분 조식시작시간에 딱 맞춰 모든 짐을 들고 내려갔다. 메뉴는 평범했지만 푸짐하게 먹었다. 든든히 챙겨 먹고 8시 20분에 길을 나섰다. 하암. 역시 하품이 끊이질 않는다. 오아. 하지만 하늘은 예상치도 못하게 파랬다.

<아침부터 푸른 기운>

화창한 날씨가 더없이 반가웠다. 갑자기 몸부터 마음까지 모든 게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이다. 덕분에 그래도 시작이 된다. 호스텔 직원분의 조언대로 강변을 따라 걸을까 하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내내 강을 보고 걷느니 이런 날 마을을 통과하며 골목마다 맺힌 다양한 그림자를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비가 오고 나서인지 공기가 한층 차가웠다. 신선했고, 시원했다.


시끄러운 도로 곁을 잇던 길은 슬그머니 조용한 골목으로 빠진다. 아니나 다를까 강아지들이 요란하게 짖어왔다. 온몸으로 화들짝 놀라기를 수십 번, 그 뒤를 따르는 민망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된다. 마을 묘지 성당을 지난다. 마침 9시 종이 울린다. 마을을 걷다 도로를 건너고, 한적한 돌길 숲길을 걷는다. 햇빛에 진 그림자가 선명토록 설렜다. 살랑살랑 멈추는 발걸음마저도 경쾌해진다.

<그림자가 짙다>

날씨가 좋으니 웬걸 힘도 펄펄 났다. 알고 보니 삐딱해진 마음은 지친 몸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햇빛이 없어서였다. 날씨가 궂어서였다. 그걸 이참에 ‘다시’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건 걸음 그 자체라기보다 빛 속을 거니는 행위의 느낌일지도 몰랐다. 돌이켜 보면 지속된 우중충함은 늘 기운을 앗아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구겨진 기분을 어쩌지 못하곤 그랬다. 하지만 길은 길일 뿐이다. 날씨 탓으로 길을 원망하지는 않기를, 말캉거리는 이 길 위에서 재차 반성했다.


케일을 수확하는 주홍 조끼 아저씨, 차창을 열고 “봉 까미노”라 인사해 주시는 회색 체크 셔츠의 아주머니. 대문에 기대 골목을 구경하시던 흰머리 할아버지와는 온화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짖어오는 강아지들과는 일부러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때없이 울어오는 닭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풀을 뜯어먹는 양들. 바닥에는 왜인지 죽은 개구리와 도마뱀이 꽤 많았다.

<골목과 마을들>

어느 폐차장을 지난다. 길은 대체로 고요했다. 언제부턴가 철길이 길 따라 다시 나타났다. 작은 계곡을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지도상의 이름은 Igreja. 오예, 문 연 bar가 있었다. 10시 반. 거기서 카페콘레체를 시켜 먹었다. 무심한 표정과는 달리 정성 가득한 커피를 내어주신 아저씨셨다.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선사하는 따봉이 일품이었다. 평생 다시 보지 못할 낯선 이들과의 반짝이는 조우들. 또 한 번 이렇게 진심을 담아 웃고 간다.


이 동네분들은 뭔가 죄다 친절했다. 화단을 가꾸다 말고 손을 활짝 들어 인사를 해 주시는 분, 창밖을 내다보시며 고개를 끄덕 웃어 주시는 분, 지나가며 다정한 목소리로 아침의 기운을 건네주시는 분. 삶의 장소로 돌아간 일상에서 본받아 실천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잊지 않고 이 느낌을 기억해 두련다. 이렇듯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그 장소에 대한 결정적 인상이 되곤 한다.

<풍경들>

햇빛이 쨍쨍해도 덥지는 않았다. 아직 땀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한가로이 주욱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커다란 도로가 나왔고,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로터리를 통과했다. 큰 DIA마트가 떡하니 서있었다. 11시 40분, 때마침 점심시간도 다됐겠다 여기서 식사를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포르투갈해안길의 첫날 점심 아울렛형 DIA에서 먹은 것과 똑같이 사 먹었다. 역시 잘한 선택, 무엇보다 푸짐했다. 배가 든든히도 불렀다. 삼십 분쯤 그렇게 쉬었을까. 다시 길을 출발했다. 이제 1시간쯤 남았다.


로터리를 연달아 통과해 얕은 언덕을 올랐다. 길은 웬 성곽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갑자기 성곽이라니 그것도 신기한데, 그 성곽을 통과하자 번화한 쇼핑거리 같은 게 나와 더 당황했다. 많이 다르긴 달라도 왠지 팜플로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마을 참 예쁘다. 관광지인 듯 사람들로 상당히 북적였다. Valença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기념품 가게들이 몇몇, 생활냄새 가득한 생필품 가게도 여럿이었다. 쏠쏠히 골목을 통과했다. 소란에 즐거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성곽을 따라 Valença>

성곽을 내려가며 마을을 벗어나는 길이, 재밌다. 잔디밭과 유적을 거쳐 어두운 굴을 통과해 아래로 아래로 내린다. 도로가 나왔고, 곧 긴 철제 교량이 있었다. 그 너머로 오늘의 목적지 뚜이(Tui)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너른 강이 멈춘 듯 흘렀다. 교차가 안 되는 좁은 교량을 차들이 때에 맞춰 번갈았다. 위로난 철로로는 다행이랄지 기차가 지나가지 않았다. 차가운 다리를 걷는다. 국경의 강을 건넜다.


포르투갈의 끝을 밟아 스페인의 가장자리로 넘어왔다. (정확한 배분은 아니지만) 11일간의 포르투갈해안길에는 5.5일의 포르투갈과 5.5일의 스페인이 적절히 섞여 들게 됐다. 스페인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어느새 Super Bock이 Estrella Galicia로 바뀌고, 봉까미노(Bom Caminho)가 부엔까미노(Buen Camino)가 됐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오브리가도”에서 “그라시아스”로 입 바꾸기란 정말인지 손쉬웠다. 프랑스길에서 물든 40일간의 스페인 감각이 아무래도 몸에 새겨져 있었다. Back in Spain.


무차스 그라시아스!

<오늘의 목적지 뚜이가 보인다. 반가워, 스페인!>

12시 50분, 뚜이(Tui)에 도착했다. 성당이 있는 중심가까지는 10분 남짓 더 걸어가야 했다. 오늘의 숙소도 바로 거기 있었다. 약간의 오르막 골목을 올랐다. 트인 골목마다 아래로 강변이 있었고, 그 너머로 포르투갈 마을이 선명히 보였다. 우선 체크인부터 했다. 직원 없이 메시지로 전달받은 비번으로 들어왔다. 건물 내엔 아무도 없었다. 샤워와 빨래를 느긋이, 짐 정리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어김없이 동네 산책. 스페인에 오니 다시 시에스타였다. 문 닫은 곳이 많았다. 에잇, 그 김에 나도 문을 닫았다. 저녁거리를 대충 사 와 일단 침대에 누워 좀 쉬었다. 4시가 좀 넘어 성당과 관광안내소 정도를 다녀왔다. 이번 길에서는 되도록 도장(sello)에 집착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사실 이미 많이 채웠다. 멋쩍게 웃으면서도 혹시 몰라 크리덴셜(credential)을 하나 더 샀다. 돌아오자마자 저녁을 먹었다. 숙소에 아예 아무도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이 방은 아직 텅 비었다. 털썩 누워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국경의 다리를 넘어 스페인으로>

오늘 온종일 빛이 있어 걷기 힘찼다. 무엇보다 기분이 더 그랬다. 내일은 긴 거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28.4km. 예보는 역시 비. 하지만 내일도 오늘처럼 날씨가 변덕을 부리길 온 힘을 다해 바라본다. 빛이 아니더라도 비만은 안 왔으면 좋겠다. 아니, 그전에 제발 잘 좀 잤으면 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 방을 쓸 모양이다. 모처럼의 행운. 다행이다. 푹 잘 수 있겠지. 그러니


이른 굿나잇.

마음 같아선 미리 굿모닝.



2024.11.22.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6일 차(누적거리 138.6km)

34,162보(22.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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