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걷는 길, 모두 이미 지난 일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7일 차

by 달여리
뚜이~레돈델라(≈31.8km)


간만에 푹 잘 잤다. 아무도 없는 방이 이토록 편한 건지. 일찍 잤고, 일찍 일어났다. 갈 길이 멀어 일찌감치 출발했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여섯 시에 나왔다. 밤사이 비가 왔는지 바닥이 축축했다. 잘 잔들 피곤했다. 새벽의 조명처럼, 눈깔이 어쩔 수 없이 발갰다.


원래 28.4km 지점인 Saxamonde 마을까지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음이 갑자기 바뀌고 말았다. 거기서 3km만 더 가면 소도시라고도 부를만한 큰 마을이 나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31.8km 지점인 레돈델라(Redondela)까지 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듯했다. 사실 딱히 고민하지도 않았다. 길을 나서면서부터 자연스레 목적지는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국경을 넘어오며 시간도 손해 봤다. 강을 건너는 그 짧은 사이, 1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 거다. 오늘의 여섯 시는 어제의 다섯 시와도 같았다. 핸드폰 시간이 자동으로 반영되지 않아 어젯밤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마터면 1시간 늦게 오늘을 시작할 뻔했다. 먼 길이 그만큼 급박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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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서서히 스며든 아침의 빛>

엉덩이에 힘을 빡 주고 나섰다.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은 당찬 의지의 표면 같은 거였다. 어둡다해도 마을의 골목까진 가로등이 있어 괜찮았다. 뚜이(Tui)의 끝자락을 붙잡고 끝까지 늘어졌다. 얼마 제대로 보지도 못한 이곳을 이렇게 빠져나가려니 아쉽긴 아쉬웠다. 며칠을 머물러도 괜찮을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새벽이라도 꾹꾹 눌러 눈에 담았다.


곧 랜턴이 필요한 칠흑의 길로 들어선다. 드디어 순례길 비석도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비석은 스페인에만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밭길도 걷고, 산책로도 걷는다. 어두워 길의 분간이 잘 가진 않았다. 하늘에 구름은 많았지만 군데군데 별이 보이기도 했다. 방향 표식은 적절히 자주 나타났다. 비석이 나오면서부터 길을 걷는 게 훨씬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완전히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고새 잊었는지 컴컴한 숲길이 다시 무서웠다. 그러는 사이 고가도로도 넘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8시, 걷다 보니 Os Eidos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어둠에 지쳐갈 그즈음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만 바라보다 그만 표식을 놓쳐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241123_A1_032(edit2)(resize).jpg <빛이 있던 하늘의 흔적>

스산한 공장지대를 길게 통과한다. 다리가 많이 아파 이제 좀 쉬고 싶었다. 마땅한 곳이 없어 절망하던 그때, 때마침 문 닫은 bar 앞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거기 배낭을 풀고 쉬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아침노을 맛집. 헛헛한 이 길 위로 환히 핀 분홍빛 하늘, 그 알록달록한 공기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가득 차 올랐다.


입김이 폴폴. 넋 놓은 감상에 순간, 품이 너르게 퍼진다.


15분을 쉬었다. 더 쉴 수도 있었지만 추워서 더는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서둘렀다. 당장에 몸을 데워야 했다. 길디 긴 공장지대를 벗어났다. 육교로 철로를 건너고 고가도로 아래도 통과해 한 마을로 들어섰다. 유레카! 9시 15분, 드디어 문 연 bar를 만났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다시 20분을 쉬었다.

241123_A1_052(edit2)(resize).jpg <다시 만나 반가워, 비석>

오늘 길의 네 번째 마을인 O Porriño는 도시라고도 할만했다. 웬만한 상점들은 다 있는 듯, 카페도 많아 여기서 식사나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아 보였다. 먼 레돈델라까지 갈 것도 없이 이 마을에 머물러도 좋았을 것 같았다. 여기가 16km 지점이었다. 그러니까 길의 절반 정도를 온 셈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치장으로 한창이었다. 느릿한 그 풍경을 뒤로하고 재촉하듯 길을 이었다. 문 열린 성당 두 군데를 들어가 봤지만 모두 도장(sello)가 없어 아쉬웠다.


고가도로를 빙그르르 돌아 넘자, 길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작은 동네 골목이 나왔다. 시끄러운 도로에서 빠지더니 숲이 울창한 아스팔트 길로 들어선다. 차들이 한 번씩 지나다니곤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다. 뒤에서 햇빛이 비쳐왔다. 웬일인지 이만하면 오늘도 날씨가 괜찮았다.

241123_A1_047(edit2)(resize).jpg <또다시 100km 지점을 통과한다>

10시 40분, 100km 지점을 어느새 통과했다. 나름 새로운 기분. 이제 포르투갈 해안길도 100km만 남았다. 사실 다리는 더 이상 걷지 마라 내내 말하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상태가 안 좋기도 했다. 우선 양쪽 발등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왼쪽 허벅지 뒤쪽 근육도 자꾸만 올라왔고, 특히 오른쪽 무릎의 측면이 많이 아팠다. 남은 길, 부디 잘 버텨달라고 애원하듯 부탁했다. 앞으로 4일만 더 가면 된다. 그러곤 푹 좀 쉬어야지. 그래, 그동안 넘칠 만큼 충분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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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풍경들>

골골거리며 걸었고 당이 모자란지 급 콜라가 당겨 왔다. 앉아 쉬지 않고서는 더는 안 될 즈음, 다시 빛 같은 bar를 만날 수 있었다. 휴, 11시 20분. 레몬을 곁들인 콜라와 얼음이 목을 촉촉이 적셔 준다. 근처 성당에서는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경건한 노랫소리를 슬쩍 엿들으며, 신발에 쌓인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 주었다. 다리를 흔들고 주물며 근육도 최대한 풀었다. 안쪽 주방으로부터 맛난 냄새가 연신 풍겨와 덩달아 배가 꼬륵거렸다.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20분만 쉬었다 간다.


오르막을 오른다. 한적한 도로길 그리곤 잠깐의 숲길. 마을과 산책길. 한 번씩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낙엽이 와르륵 흩날리곤 했다. 어쩌다 보니 자주 생각에 잠겼다. 대체로 과거와 과오에 대한 것들이었다. 반문과 반성이 반복됐다. 지금 길 위의 시간이 그랬다. 현재의 나도 이미 지난날에 속했다.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상념 속에서도 다리는 선명히도 아팠다.

241123_A1_077(edit2)(resize).jpg <가을>

12시 50분. 아주 전망 좋은 위치에 벤치가 떡하니 있었다. 멀리 강이 보였고, 산마다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이 언덕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처음 오늘의 목적지였던 Saxamonde였다. 그 말인즉슨 여기서부터 3~4km 정도만 더 가면 된다는 뜻. 조금만 힘내자. 양손을 어깨 위로 크로스, 스스로 스스로를 토닥였다.


앉아 있자니 또 춥다. 결국 10분밖에 쉬질 못했다. 차라리 어서 가자. 힘겹게 올라왔던 길을 이제 내려간다. 마을을 향해, 목적지를 향해, 아래로 저 아래로. 그 풍경만은 예뻤다. 어디선가 쾅쾅 터지는 폭음이 계속 들려와 설핏 무서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앞선 마을을 무심히 지나며 골목 사이를 흘러간다. 무념무상으로 그저 걸었다. 등산 스틱이 내는 그 규칙적인 소리에만 단지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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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풍경>

불현듯 길이 갑자기 확 번화해졌다. 아, 여기가 바로 레돈델라(Redondela)였다. 다른 곳에 비해 평이 나쁘지 않아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2시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배가 너무 고파 곧바로 나갈까 했지만, 온 김에 샤워랑 빨래까지 하고 개운하게 나서는 게 나을 성싶었다. 초스피드로 모든 걸 끝내고 나니 2시 반이었다. 건조기는 누군가 사용 중이라 일단은 건조대에 널어만 두고 나섰다.


식사는 근처 케밥집에서 해결했다. 맛있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뭔가 많이 지쳐 보였는 거니, 서비스로 큼직한 비프랩 같은 걸 하나 더 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거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몇 번을 물었다. 덕분에 저녁거리까지 해결이 돼버렸다. 그냥 들고 가려고 했더니 아예 정성스레 포장까지 해주신다. 와, 감동. 6.5유로에 두 끼를 해결하는 행운이었다. 감사하다고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먼 길 걸은 보람이 케밥의 형태로 왔다.

241123_A1_087(edit2)(resize).jpg <전망 좋은 벤치>

돌아오는 길, 못 참고 아무 bar에나 들러 생맥주도 한잔했다. 왜 이렇게 목이 마른 지 뭐든 계속 마시고 싶었다. 마트에서 귤과 탄산음료, 주스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벌써 4시였다. 건조기가 비어 돌렸다. 이제야 누워서 쉬어본다. 온몸이 꺼지는 듯 내려앉았다. 잠에 들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자버리면 정작 밤에 잠이 안 올지도 모른다.


한 번쯤 더 나갔다 왔다. 골목을 잠시 구경하고, 안내소와 성당에서 도장(sello)도 받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즐겁다. 아, 맞다. 오늘은 토요일. 주말의 풍경이란 어디고 크게 다르지가 않다. 아직 배가 불러 선물로 받은 비프랩은 내일 아침에 먹기로 했다. 사둔 탄산음료는 먹지 않고 냉장고에 잘 넣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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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철길이 지나가는 도시, 레돈델라>

그간 걸어왔던 나날 중 아마 오늘이 가장 먼 거리를 걸은 날이지 않을까 싶었다. 또 하려면 하긴 하겠지만, 확실히 이 정도는 내게 무리였다. 지금의 배낭이 과연 몇 kg까지 불었을지 궁금했다. 못해도 16~17쯤은 되지 않을까. 미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이고 지고 끌고 메고 다닌 이 기념품들을 귀히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아무래도 욕심이겠지. 아니, 아니야. 아마 그때쯤이면 이 힘듦은 죄다 희미해져 버리고 난 이후일 게 분명하다. 사실 육체적 힘듦 따위야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저녁이 밤으로 넘어가는 동안 내내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예보가 계속 바뀌고는 있지만, 내일과 모레는 궂은 날씨로 굳혀지는 모양새였다. 어쩌겠어. 마음을 비우고 담담히 맞이하는 수밖에. 눈이 자꾸 감겼다. 오늘도 무조건 잘 잘 각이었다. 모두의 동의 후 10시에 불을 껐고, 억지로 뜨던 눈을 이제 대놓고 감았다. 몸이 끝 간 데 없는 바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잔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 깊숙했고 온통 껌껌했다. 텅텅 빈 알베르게에 침대 삐걱대는 소리만이 여기저기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2024.11.23.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7일 차(누적 170.4km)

오늘 하루 57,358보(35.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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