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햇빛소리리듬, 늘 있고 자주 잊는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9일 차

by 달여리
폰테베드라~칼다스데레이스(≈21.5km)


어둠 속에 울리던 누군가의 알람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벌써 7시였다. 밤사이 내내 우렁차게 내리던 비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아침이었다.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 채비마저 천천히 차렸다. 염원을 담아 창밖을 진득이 노려봤더니, 신기하게도 여덟 시쯤 되자 비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바로 배낭을 메고 우비를 덮어썼다. 8시 5분이었다. 그렇게 오늘의 길이 시작됐다.


푸른 도시가 아름답게 차분했다. 거리엔 월요일다운 활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환히 문 열린 성당에도 들러 잠시나마 구경을 즐겼다. 골목을 살피듯 걸음을 나았다. 강을 건널 즈음엔 다시 비가 많이 내렸지만, 다행히 그 시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다. 걸을수록 폰테베드라(pontevedra)는 꽤 큰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조금씩 변두리로 빠지더니, 슬그머니 차례차례 한적함이 새어 들었다. 나무와 흙을 번갈아 철로를 따라 걸었다. 사람도 차도 확연히 줄었다. 축축한 길이 발밑에서 쉼 없이 사근거렸다.

<푸른 아침, 폰테베드라>

종국에 비가 그쳤다. 아침의 상쾌함이 그제야 와르르 몰린다. 여유로운 콧바람이 싱그러운 공기를 끌어당겼다. 어느새 훌쩍 걷힌 머리 위론 이미 구름도 몇 점 보이지가 않았다. 이제부터 날씨가 풀릴 거라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밤사이 미리 내린 많은 비에 오히려 감사했다. 길의 근심이 순식간에 덜어졌다. 물기 젖은 우비를 탁탁 털어 배낭에 매달았고, 휘휘 허리를 저어 새 출발의 기운을 온몸으로 장착했다.


입에서 입김이 폴폴 잘도 나왔다. 그렇다고 춥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아침의 붉은 기운이 스미는가 싶더니, 밍밍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차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그럴 때면 덩달아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한껏 흔들리곤 했다. 한참 전에 떴을 해가 9시 반이 넘어서야 고개를 내민다. 난데없이 온통 노랗게 물든 풍경이 순식간에 싱그러웠다. 조용했다. 이따금 차들이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마을도 지나야 했지만, 이만하면 대체로 고즈넉한 길의 분위기였다.

<숲과 마을 그리고 무지개>

꽤 긴 숲길을 통과한다. 길 따라 작은 계곡도 나직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나 유칼립투스 향이 넉넉하게 났다. 축축한 바닥에 깊은 웅덩이도 더러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왼쪽으론 도로가 오른쪽으로는 철로가 있는 듯했다. 차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주 가끔씩 기차 소리도 가까이 들렸다. 비는 확실히 그쳤다. 하지만 높은 나무에 맺힌 물방울들이 잊을만하면 비처럼 후드둑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문득 산중에 철로가 눈앞으로 나타났고, 방향 따라 철길을 넘어 건넜다. 인부들은 무언가 작업에 열중이었다. 인사를 건네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잠시 끊어졌던 숲길을 마저 이었다. 숲을 빠져나올 즈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햇빛도 동시에 내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찰나의 무지개가 20초쯤 반짝. 벗었던 우비보다 넣었던 카메라를 먼저 꺼냈다. 비는 10분도 안 돼 다시 그쳤다.

<음지와 양지, 나무와 그 빛깔>

배가 고팠다. 길에 문 연 카페나 바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맛없는 에너지바를 꺼내 먹었다. 이거 어디서 샀더라? 아마 한 달쯤은 되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2개가 남았다. 남은 귤 두 개도 홀라당 까먹었다.


때론 정말 고요했다. 치이이이- 백색소음으로 가득했다. 산들거리다 뚝 멈춘다. 멈추다 와륵, 한아름에 안겨들었다. 한 손에 쥔 등산 스틱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의 리듬을 맞추고 있었다. 잠깐 귀 기울이면 새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늘 있으나 자주 잊었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길에서 생생히 느껴온 지금의 마음들을 앞으로의 삶에서 지속할 방법을 아직까지 찾질 못했다. 어쩐지 초조했다. 걸음은 종종 바닥 위로 삐거덕거렸다.

<시골길과 마을길>

쉬엄쉬엄 가라고, 벤치가 중간중간 꽤 있었다. 하지만 죄다 젖어있기도 했고 괜히 허투루 쉬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카페라도 하나 나올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견디길 잘했지,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카페 안내 간판이 떡하니 나왔다. 누군가가 낙서라도 한 것처럼 300 0m라 적혀있었다. 그것만 보고는 도무지 300m 인지 3km 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뭐. 아, 300m라 다행이었다.


11시. 여기서 드디어 제대로 쉬어간다. 카페콘레체와 케이크를 시켰다. 창가에 앉아 아무렇게나 볕을 쬤다. 다리가 노곤노곤, 아마도 불평을 털어놓는 듯했다. 그렇게 20분을 쉬었다. 뭔가를 입에 털어놓고 나니 그래도 힘이 좀 났다. 이제 남은 길은 10km 정도였다. 조용한 동네였고, 하늘은 비를 완전히 잊은 듯 화창히 맑았다. 뭉게구름 아래 길은 선선했다. 햇빛은 자주 감춰졌다. 걷기에 그지없이 딱 좋았다.

<언제나 반가운, 야자수>

죽은 옥수수 풀이 분쇄되며 촉촉하니 깊은 흙냄새가 났다. 트랙터의 농부와 눈이 마주쳐 서로 가벼운 목례를 나눴다. 미소. 아주 빠르게 걸어오신 아주머니께서 뒤로부터 불쑥 말을 걸어오셔 화들짝 놀래기도 했다. 부엔까메노.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본인은 지금 아침 운동 중이고 곧 가서 점심밥을 해야 한다고 TMI 말씀을 쏟아내신다. 저기 앞 벽화가 멋지니 꼭 사진을 찍으란다. 음. 잠시 고개를 돌렸다 봤더니 아주머니는 이미 저만치 사라진 듯 멀어지고 없었다. 꿈인가. 빠름. 빠름.


햇빛 아래 또 비가 우두둑 떨어졌다. 사진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무지개가 떴다 금방 사라졌다. 걷다 보니 비석의 남은 km 수는 이미 50 밑으로 확 떨어져 있었다. 다리가 진짜 진짜 많이 아팠다.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랬다. 걸을수록 하루치의 한계는 부쩍 더 빨리 찾아왔다. 그간의 고충을 사실 잘 아니 무작정 다리를 나무라진 못하겠다. 사실 미안했다.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해둘걸. 무릎도 무릎이지만, 나중에 골병이라도 들까 걱정스럽긴 했다.

<한적한, 고요한>

긴 숲길 이후부턴 마을 시골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햇빛은 감춰졌다 나길 반복했고, 그러다가도 비가 아주 잠깐씩 내리거나 그랬다. 이윽고 큰 도로가 나왔다. 잔잔함은 사라지고, 갑자기 바빠지며 거리는 한껏 번화해졌다. 여기가 오늘의 목적지 칼다스 데 레이스(Caldas de Reis)였다. 반짝이는 강을 돌다리로 건넜다. 거리의 모든 면이 촉촉했고, 마침 하늘에선 빛이 내려 비쳤다. 이 날씨, 이 분위기, 이 순간이 참 잘 어울리는 동네였다.


성당을 먼저 들러 구경했다. 시장이라도 펼쳐진 건지, 골목으로 이어진 천막 물결 매대 위를 진지하게 두리번거려보기도 했다. 1시 반에 숙소 체크인을 마쳤다. 그제야 성당에 스틱을 두고 온 걸 깨달아 곧장 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참에 관광안내소에서 도장(sello)도 받고, 점심거리도 사 왔다. 이번 숙소에선 세탁기가 공짜라 손빨래하지 않아도 됐다. 심지어 도미토리가 싱글 침대였다. 빈대 이슈도 없는데 왜 숙소평이 나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혼자만 편하게 됐다. 이곳으로 오길 참 잘했다 생각했다. 베란다 옆으로 강이 세차게 흘러갔다. 시원했고 후련했다. 더군다나 이제 밤까지 쉴 일만 남았다.


점심을 챙겨 먹는 사이 또 비가 많이 왔나 보다. 밥을 먹고 나왔더니 골목은 한층 더 촉촉해져 있었다. 숙소에 건조기는 없어 따 빤 빨래를 들고 나왔다. 근처 세탁방에 건조를 맡기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 bar에나 들러 생맥주를 한 잔 마셨다. 사실 깔리무초를 시켰는데 여긴 없단다. 어쩐지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 좋던 맥주도 오늘따라 맛없게 느껴진 건, 아무래도 삐진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영롱한 핏빛 보라가 그리웠다. 달짝쌉싸름한 그 맛이 상상처럼 혀끝에 맴돌았다.

<여긴, 칼다스 데 레이스(Caldas de Reis)>

동네를 살짝 구경하며, 내일을 위한 장도 미리 봐왔다. 내일의 예정 목적지들에 특별히 뭐가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정확히 정하질 못했다. 25.6km 지점으로 갈지 29.8km 지점으로 갈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다 좋은데, 25.6km 지점의 숙소가 15유로나 더 비싸고 심지어 3시 체크인이라는 것 때문에 고민이 됐다. 되도록 먼 거리를 가고 싶지 않은데 여러모로 29.8km가 더 현명한 선택지처럼 보이는 거다. 아마도, 29.8km 지점으로 가게 되겠지. 무슨 선택을 할지 뻔히 알면서도 고민을 일단 해본다. 내일 일어나는 시간과 컨디션을 봐서 즉흥적으로 선택을 하련다. 그러면서도 먼 길을 대비해 일찍 잘 준비를 했다.


포르투갈 해안길도 이제 2일 남았다. 더는 걸음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충분했다. 이만하면 됐다. 다행인 건, 앞으로의 이틀 동안 더 이상은 비 예보가 없다는 거였다. 더할 나위 없다. 마무리를 기다리며 목 끝까지 침낭을 끌어올렸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만큼 강소리가 깊게 울렸다. 잘 잘 수 있다. 꿈결은 강물처럼 이내 너울너울 흘러내렸다.



2024.11.25.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9일 차(누적거리 212.7km)

오늘 하루 38,446보(24.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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