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음영을 따라, 강 너머 산 넘고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8일 차

by 달여리
레돈델라~폰테베드라(≈20.8km)


6시에 일어났다. 배낭을 다 꾸린 후 어제 받은 비프랩으로 두둑한 아침도 먹었다. 스트레칭까지 충분히 마치고선 7시 10분에 출발했다. 바깥공기가 훅하니 후덥지근해 놀랐다. 물론 그보다야 온도가 훨씬 낮았겠지만 마치 여름날의 열대야 같은 분위기였다. 눅눅하고 둔탁한 공기 아래, 오늘의 길이 시작된다. 어둑했고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다.

241124_A1_009(edit2)(resize).jpg <어스름 길>

알고 보니 레돈델라(redondela)는 비고(vigo) 바로 옆 동네였다. 산티아고에서 포르투로 버스를 타고 넘어갈 때 스리슬쩍 겉보기가 아름다워 눈여겨봤던 마을이었다. (비고가 포르투갈인 줄 알았는데 스페인이었네!) 모르긴 몰라도 차를 타고 가면 10분이면 족할 거리 같았다. 분명 부엔까미노앱 상에는 포르투갈 해안길이 비고를 지나간다 되어 있었더랬다. 여러 갈래 길 중 하나인 듯했다. 하지만 까미노닌자앱을 따라온 지금, 이미 비고로 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굳이 찾아보니 비고를 통과하는 순례길은 갈라시아 정부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었다고 한다. ‘비고(b-go)’라 이름 붙인 이 비수기의 여행에서 비고(vigo)란 이름의 마을을 걸어서 지나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은유적이고도 직설적인가! 그러며 혼자 설레어했던 그때 그 버스가 무색하도록, 돌아간다.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헤어진다, 언젠가 올 지 모를 다음 기회에. 이번엔 쿨하도록 아디오스!

241124_A1_008(edit2)(resize).jpg <강과 마을이 보이는 풍경>

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숲길은 아주 컴컴했다. 랜턴을 켰다 껐다 했다. 길은 전반적으로 높이 오른다. 언덕의 마을들을 통과해 어딘가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딴생각을 하다 엉뚱한 길로 들기도 했다. 습했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후끈했다. 11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느낌의 기후였다. 온통 비의 기운이 스몄다. 바다의 짠내음도 어렴풋했다. 금방 땀이 많이 났다. 짙푸른 빛이 시야를 조금 틔어준 뒤로는 랜턴 없이 음영을 따라 걸었다. 나무 사이로 저 아래 넓은 강이 보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하늘 위로는 비행기들이 자주 지나다녔다.


한 번도 안 깨고 분명 잘 잔 것 같은데 하품이 연신 나왔다. 걸으면서도 잠이 쏟아졌다. 아마도 발갰다, 눈두덩이가 데인 듯 뜨거웠다. 입을 크게 열어젖힐 때마다 몸이 따라 휘청거렸다. 그러다 낙엽에 가려져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하마터면 코 깰 뻔하기도 했다. 순간 화들짝 잠이 깬 줄 알았는데, 어김없이 또 하품이 터져 나왔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강과 마을이 예뻤다. 그 산을 내려와 8시 45분 Arcade 마을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보인 cafe에서 카페콘레체를 시켜 먹었다. 배낭 내린 홀가분 한 몸. 무릎 보호대를 벗었더니 땀이 흥건해 축축했다. 20분을 쉬어간다. 흐려서 아직 어두운 감이 있었지만, 해는 진작에 다 떴다.

241124_A1_015(edit2)(resize).jpg <푸르고 습한 풍경, 걷는 동안 날이 밝았다>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간다. 그 김에 마을을 샅샅이 구경했다. 꾹꾹 참았던 비가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비의 형태는 아니었다. 한가로운 강가를 돌다리로 건넜다. 건너편 마을 Ponte Sampaio의 골목을 돌아, 위로 위로 더 올랐다. 곧 숲길이 나왔다. 아니, 산길이었다.


아무래도 이 산을 넘어가는가 보오. 등산에 가까운 길의 행태였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비를 대비해 입은 긴 바지가 더위와 습기를 더 북돋았다. 숲에선 유난할 정도로 땅 위 공기가 멎었다. 바닥은 고요한데 하늘만 분주했다. 굉음을 내며 나무를 흔드는 저 거센 바람이, 무섭도록 야속했다. 10시 반 드디어 산에서 빠져나왔다. 도로가 나왔다. 잠시지만 약간의 햇빛 뉘앙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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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강>

숲을 나오니 막혔던 바람이 그제야 세차게 불어왔다. 낙엽이 한정 없이 떨어지고 날렸다. 날은 갑자기 심상찮게 변했다. 스산하고 거칠었다. 좀 전의 햇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어둑해졌고 음산해졌다. 어디선가 짙은 유칼립투스 향이 실려왔다. 바람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습하고 또 더웠다. 그 와중에도 배가 고파 어제 먹고 남은 귤 두 개를 마저 까먹었다. 시큼했고 촉촉했다. 손이 더 끈적거렸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버려진 마을이랄지, 낡고 외진 길이랄지. 한편으로는 화물 컨테이너들이 녹슨 채 잔뜩 쌓여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축사에선 역한 분뇨 냄새가 진동했다. 작은 송전탐이 옹기종기 모인 곳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숲도 밭도 아닌 '그냥 길'을 걸었다. 날은 풍경조차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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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풍경>

웬 Bar 안내 간판이 보이길래 길의 방향에서 잠시 빠졌다. 목을 좀 축이고 간다. 깔리무초를 시킬까 하다, 그냥 콜라와 얼음만 시켰다. 11시 15분, Ganderón 마을이었다. 이제 길은 4km 정도 남았다. 챙챙챙챙. 바람에 차양막이 큰 소리를 내며 연신 부대끼고 있었다. 콜라만 시켰더니 빵까지 같이 주셔 감사했다. 꽤 많은 주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친절했고, 정겨웠다. 30분을 쉬었다.


비가 조금씩만 내렸다. 특별할 것 없는 길을 마저 걸었다. 마주치는 분들과는 대체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로터리를 통과했다.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철로 아래를 지났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 폰테베드라(Pontevedra)에 도착했다. 기차역도 있는, 한눈에도 꽤 커 보이는 동네였다. 12시 반.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짐을 풀자마자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숙소 건조기가 비싸 건조는 근처 빨래방에서 따로 해결했다. 하필 일요일이라 마트가 모두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오래 가지고 다닌 짜파게티를 늦은 점심으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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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4_A1_088(edit2)(resize).jpg <오락가락 길의 풍경을 넘어 오늘의 목적지까지>

여즉 바람이 많이 분다. 늦오후부터는 빗방울도 더 굵어졌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다, 슬슬 저녁 식사를 위한 온라인 식당 탐방에 나서본다. 그러다 콜롬비아 음식을 판다는 곳을 알게 됐다. 오, 콜롬비아라니!! 생각지도 못한 부류라 갑자기 급 호기심이 생겼다. 개중에 Sancocho라는 메뉴가 너무 궁금했다. 꼭 갈비탕이나 삼계탕처럼 생겼다. 군침을 삼키며 겨우 시간을 견뎠다. 7시께 이 비바람을 뚫고서라도 그 식당으로 향해야 했다. 와, 입구에서부터 노래가 흥겨웠다. 하마터면 춤이라도 출 뻔했다.


기운이 났다. 누워 쉬었다고 힘이 좀 생겼다. Sancocho는 사진과 달리 감자만 잔뜩 든 국이었지만, 맛만은 괜찮았다. (후에 찾아보니 Sancocho란 원래 고기가 주재료인 수프로, 지역에 따라 닭이나 소고기, 생선을 중심재료로 뿌리채소를 곁들여 푹 고아 만든단다. 전형적인 해장국 스타일. 그러니까 이 집의 메뉴가 굳이 채식 스타일이었거나 아니면 주인이 비양심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메뉴판에 사용된 이미지 등을 고려해 볼 때 두 번째일 가능성이 높았다.) 와인도 한 잔 곁들였다. 붉은 맛으로 오늘을 마무리했다. 쓰고 달았다.


우비로 몸을 최대한 감춘 채 숙소로 뛰어 돌아왔다. 밤이 되자 비는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완전히 폭우로 바뀌어 와장창 쏟아졌다. 다 걷고 나서야 날이 매서워져 다행이었다. 밤이었고, 안이었고, 안전했다. 내일은 어떨지, 이런저런 고민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해안길 크리덴셜도 오늘로 드디어 첫 권을 다 찍었다. 미리 사놓길 잘했다. 남은 3일 동안 새 크리덴셜을 다 채울 수 있도록 분발해야겠다.


몸이 더뎌져도, 마음만은 어제보다 홀가분했다. 걸음의 끝으로 다가설수록, 심리적 짐이 부쩍부쩍 덜어지는 게 분명했다. 이제 더 걸어갈 여력도, 그럴만한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가는 건 물론 속상할 만큼 아쉽지만, 당장의 걸음이 완결된다는 건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잘 마무리해야 된다. 스스로를 도닥이며 자리에 누웠다. 날씨 is 뭔들. 그래, 마지막까지 힘을 내보자고. 고고,


씽!



2024.11.24.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8일 차(누적거리 191.2km)

36,932보(22.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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