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금어 묵묵히, 뜻밖에 황송히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10일 차

by 달여리
칼다스데레이스~파라메요(≈29.9km)


이상하다. 잘 자다 새벽 3시에 깨서는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오히려 푹 잔 건지 머리는 개운했다. 눈을 감고 한동안 시간을 보냈고, 핸드폰을 깨작거리며 엄한 기분을 날렸다. 아무도 없으니 마치 싱글룸과도 같아 어찌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5시에 어기영차 침대에서 일어났다. 넉넉히 씻고 채비를 마쳐 5시 50분께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밤사이 비가 많이 왔다보다. 방금 그친 것처럼 바닥이 온통 축축했다. 강가라 그런지 공기가 상당히 차가웠다. 먼 길을 가다듬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둠을 뚫고 부지런한 닭들이 울어왔다. 개들도 덩달아 짖어댔다. 어느 마을에나 흔히 있던 새벽의 소란이었다. 그 익숙한 감각으로 마을길을 걸어 올랐다. 마지막 가로등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머리에 랜턴을 달고 칠흑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불빛에 비치는 걸 보니 적게나마 비가 내리긴 내리고 있었다. 배낭커버를 씌우고 우비까지 꺼내 입었다.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흙길이라 모처럼 공중 생쑈를 했다. 시골길인 듯한데, 어둡기만 해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사소한 소리에도 괜히 무서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문득 사라지곤 했다.

<축축한 이 길이 하루 종일>

갈팡질팡도 없이, 29.8km 지점인 파라메요(Faramello)까지 가기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우연히 일찍 일어났고 덕분에 일찍 출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흔쾌함이었다. 아마 2시쯤이면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오늘 멀리 가면 갈수록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내일의 길이 짧아지니 차라리 수월할 터였다. 먼저 힘들고 나중에 쉽자. 당장이 힘들 뿐 어차피 거리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멀리서는 바람 소린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낮은 계곡 소리였다. 흙길이다가 아스팔트, 그러다 다시 흙길로 이어졌다. 배가 잔뜩 고팠지만 갈만한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건이 될 때마다 사두는 귤이 아직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비는 오락가락했다. 숲을 지날 땐 나무에 맺힌 물방울이 비처럼 떨어져 날씨를 가늠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어둠에서부터 성큼성큼 커다랗고 검은 개가 다가와 순간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꼭 달려들 것만 같았으나 조심조심 별 탈 없이 옆으로 비켜설 수 있었다. 눈도 못 마주쳤다. 그럴 의도가 없었을 녀석에게는 괜스레 미안하지만, 솔직히 등골이 오싹했다.

<안녕? 오늘의 마스코트>

도로를 건너고, 도로를 따르다, 고가로 도로를 넘는다. 비가 좀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행운이. 마침 문 연 bar를 만났다. 새벽 5시 오픈이라는 안내간판만을 믿고 순례길에서 빠져 큰 도로가로 나가보길 잘했지. 8시였다. 따끈한 카페콘레체와 초코레또를 시켰다. 도장(sello) 마저 화물차 모양인 거 보니 운송업 아저씨들의 메카가 아닐까 추측이 됐다. 겉보기와 달리 북적이는 곳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대게는 주문을 하지도 않고 척척 메뉴를 받았다.


앞으로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예보가 아무래도 틀렸나 보다. 꼴을 보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내 올 것 같았다. 창밖을 노려보며 20분을 쉬었다. 다음 길은 깊은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짙은 안개가 피었다 사그라들었다. 세찬 비가 점점 잦아들더니, 그쳤다 말았다 했다. 날씨에 장단을 맞추듯 적당히 눈치를 봐가며 우비를 벗었다 입었다 그랬다. 대부분의 복장이 비에 젖었다. 어쩔 수 없는 심정도 죄다 눅눅했다.

<모든 것을 머금은 물기>

산길을 내리락 오르락. 작은 계곡을 건너기도 웅덩이를 넘기도 했다. 또닥또닥똑똑똑. 낙엽 위로 수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얄궂은 음악 같았다. 궂은 날씨에도 새들은 어김없이 지저귀며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습기를 머금자 숲의 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먼발치서 들리는 희미한 전동톱 소리. 흙 밟는 발과 틱탁거리는 등산 스틱. 헉헉대는 숨소리와 바스락거리는 몸의 소음들.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마저 음파처럼 퍼진다. 걸음만 있던 새벽밤이 어느새 사라지고, 푸른 아침이 또렷이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흐려, 날이 밝아오는 데까지는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비가 그쳤다. 햇빛은 없어도, 막 개인 공기의 유난한 상쾌함이 있었다. 갓 마을로 들던 참이었다. 초입께 벌초 작업 중이신 아저씨들이 돌이라도 튈까 잠시 작업을 멈춰주셨다. 부에노스 디아스, 무차스 그라시아스! 축축한 풀내음이 마냥 익숙하다. 희멀건 연기를 뿜어대는 어느 공장의 스산함이 마을의 중심처럼 자리 잡아 눈길을 끌었다. 골목은 구석구석 낡고도 정겨웠다. 이따금 마주치는 주민들은 모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주었다. 희미하게 빛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회색 구름에 대비된 그 풍경이 묘한 색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좋아하는 뉘앙스의 장면이었다. 진한데 흐리고, 선명하면서도 음울하다.

<연기, 물기, 습기>

골목을 내려 철로를 넘고, 굴다리를 지나 Ulla강도 건넌다. 완전히 그친 줄 알았던 비는 시도 때도 없이 다시 내렸다.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벗었던 우비를 입느라 끙끙대야 했다. 이미 젖은 우비를 다시 입기란 점점 더 힘겨워졌다. 다 젖었단들 그렇다고 우비를 안 입을 수도 없었다.


내천을 따라 조용한 산책길을 걸었다. 건너편으론 마을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10시 15분, 문 연 Bar를 만나 다시금 쉬어 간다. 두 번째 휴식엔 역시 콜라지. 얼음컵과 함께 주문했다. 다리가 어쩐지 삐걱거렸다. 천막 처진 야외 테이블에 앉아 두 다리 쭉 뻗어 탄산을 벌컥 들이켰다. 그 자세로 20분을 쉬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회복이 되긴 됐다.


살짝 더 걸어 나가자 아주 번화한 거리가 나왔다. 간판을 확인해 보니 여섯 번째 마을 Padrón이라는 곳이었다. 어느덧 18.9km 지점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아직 11km나 남았다. 웬만한 가게들은 다 있을 만큼 큰 도시 느낌이었다. 여기서 산티아고까지가 25km 정도. 나머지는 내일 걷고 그냥 여기서 멈춰버릴까 하는 생각이 유혹처럼 번뜩였다. 아침의 선뜻한 결심이 무색토록 마음이 한없이 흔들렸다. 망설이며 번화가를 배회했다. 관광안내소와 성당에 들러 도장(sello)를 받았고 축축한 벤치에 앉아 얼마간 멍도 때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한참 젓다, 하지만 결심한 듯 끄덕.


이왕이면 더 가자. 오늘 마저 걷고 마지막인 내일 쉬엄 걷자.

<멈칫했던 Padrón을 지나 길을 마저 잇는다>

조용한 마을 골목길. 시끄러운 도로도 한동안 따라 걸었다. 슬쩍 햇빛이 비치기도 했지만 잠시뿐, 비는 계속 오다 말다 했다. 눈에만 어렴풋이 보이는 희미하디희미한 무지개가 핀둥 만둥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작은 골목을 요리조리 지그재그로 통과했다. 길이 고요하니 좋긴 좋았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 흘렀다.


12시 5분. 철로를 따라가다 만난 A Escravitude 마을의 성당이 근사했다. 문이 닫혀 있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동네에 몇 있는 음식점들은 어쩐 일인지 모두 평점이 형편없었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일단 조금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몸도 힘든데 맛없는 걸 억지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왼쪽 허벅지 뒷근육이 자꾸만 올라오려 해 걷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힘 빼고 걷기에 더없이 집중했다. 숲을 걷고 계곡과 마을을 지나는 동안, 허벅지는 간당이며 애간장을 태웠다. 덕분이랄지 배고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혼미한 몸처럼 마음처럼>

그 와중에도 열심히 검색해 식당을 한 군데 찾아뒀다. 12시 50분, 드디어 그 식당 앞에 도착했다. 오늘 목적지까지는 겨우 30분쯤 남은 거리였다.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숲길이라 그 한가운데 위치한 알베르게에선 어떤 식당도 슈퍼도 기대할 수 없었다.


메뉴델디아와 맥주를 시켰다. 와, 무슨 오징어먹물밥 같은 게 애피타이저로 나왔는데 너무나도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에스타 무이 델리시오소!” 진심으로 엄지척을 내어 보였다. 메인 메뉴로 나온 스테이크도 아주 맛이 좋았다. 허겁지겁 먹었더니 배가 금세 부르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을까, 웬걸 맥주는 공짜로 주시겠단다. 그럴 때마다 스페인 분들이 지으시는 표정이 있다. 이를테면 "나만 믿어~" 그런 느낌이다. 긴 길에 대한 오늘의 보상은 미소 띤 맥주의 형태로 왔다. 왜인지 자꾸만 이렇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보답할 길도 없는데 그만 황송할 일만 늘어간다.


Te amo, España!!

<마지막 숲길, 빛 없이도 어쩐지 모든 장면이 선명했다>

으차차, 한참을 쉬었다 걸으려니 뼈마디마디가 다 쑤셨다. 1시 반에서야 식당에서 나왔다. 골목을 지나자 길은 금방 숲으로 들었다. 비슷비슷한 풍경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듯 걸었다. 분간이라야 이따금 나오는 비석의 숫자 정도뿐이었다. 하마터면 한참을 지나쳐 아예 산티아고까지 갈 뻔했다. 방향을 놓쳐 더 갔던 길을 되돌아, 무사히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2시 10분. 호스트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숙소는 아주 깔끔했고, 숙박객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3유로 건조기를 돌렸다. 침대 시트를 깔고 침낭을 폈다. 60분 건조 알람을 맞춘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슈욱하고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고, 잠깐이지만 단잠에도 빠졌다. 건조는 아주 잘 됐다. 아예 혼자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뒤늦게 서양 여자 아이 한 명이 왔고 그걸로 끝이었다. 배낭에 있던 인스턴트 식품으로 저녁을 간소하게 해결했다. 깊숙한 숲 속이라 딱히 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시간은 더디고 귀하게 흘렀다. 바깥엔 아직 비였다. 헐빈한 숙소가 왠지 아늑하게 느껴졌다.


산티아고까지 단 14.4km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먼 옛날에 있었던 일 같기도 하고, 일상처럼 늘 해왔던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낯섦보다 익숙함이 큰 지금의 마음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설렘'에 가까웠다. 걸음이 끝난다는 감정은 아무래도 후련함이 된다. 다행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큰 탈은 없었어서. 이렇게 웃을 수 있어서. 마지막 걸음까지 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직 그래도 하루가 남아서.



2024.11.26.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10일 차(누적거리 242.6km)

오늘 하루 49,774보(30.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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