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아무래도 오늘 밤은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11일 차

by 달여리
파라메요~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14.4km)


일찍 나설 필요도 없는데 6시에 깨고 말았다. 길이 짧으니 마음은 한결 여유로웠다. 행여라도 다른 분이 깨실까 조심조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스트레칭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적당한 때에 맞춰 짐까지 모두 들고 나왔다. 천천히 준비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8시께 출발했다. 마지막이라는 홀가분함이 발걸음의 무게를 덜었다. 온통 축축했지만, 비는 진작에 그쳤다. 아직은 어두웠다. 숲이었고, 깊숙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랜턴을 끄고 빛의 변화를 즐겼다. 숲 사이 작은 마을의 어귀, 이른 아침부터 나와계신 어르신들께서 활기찬 '부엔까미노' 인사를 해주신다. 푸르디 푸르른 아침, 어느덧 하늘에 분홍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진짜 마지막'일 길 위의 스페인 아침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딱히 달랠 바가 없어, 괜히 애먼 사진만 더 담았다. 하늘만 바라보다 번번이 길을 잘못 들었다. 그럴 때마다 친절히 안내해 주시는 동네분들이 계셨다. 연신 감사 인사를 드렸다. “데 나다(De nada/천만에요).” 아, 이토록 다정한 굴림의 말이 있었던가.

<마지막 길 위의 아침, 안녕>

분홍빛이 옅어지며 하루는 낮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하늘엔 눈썹달이 아직 걸려있었다. 보름달은 마중의 표정, 눈썹달은 배웅의 표정을 닮았다. 나도 찡긋 눈인사로 마주했다. 그래, 이번의 헤어짐은 쌍방으로 하자.


철로를 건넜다. 포르투 해안길 내내 함께 해온 이 철로는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게 분명했다. 마을을 지나고 숲길을 걷고 약간의 언덕을 올랐다. 어느덧 남은 km 수는 10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태양도 산을 올라 고개를 내밀었다. 영 흐린 날이 아니었는데도, 수줍은 듯 완전한 빛을 내어주진 않았다. 아침의 노란빛이 그리웠다. 하지만 날은 이미 진즉에 다 밝았다.

<철로를 만나고 따르는 길>

상큼한 풀벌레 소리, 심술궂은 까마귀 울음소리. 그 고즈넉함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자동차의 소음과 이따금 철컹이는 기차의 울림. 투둘투둘 작은 돌멩이들이 자꾸만 신발 안으로 끼어들었다. 햇빛이 살짝씩 비칠 때마다 기분이 떠올랐다가 흐려지면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걸음이 날쌘 건지 시간이 잽싼 건지, 성큼성큼 순식간에 산티아고로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지날수록 아쉬웠다. 힘들던 건 아주 싹 다 잊었다.


식당이 있다는 안내 간판을 보고 길에서 살짝 빠졌다. 9시 20분, 카페콘레체와 또르띠아로 든든히 아침을 해결하고 간다. 아무래도 이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면서 더는 또르띠아나 초코레또를 사 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걷지 않으면 이마저도 마지막일지 몰랐다. 갓 나온 또르띠아가 뜨끈히도 촉촉했다. 텁텁해 딱히 좋아하는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한 음미하며 먹었다. (말하자면 예의의 제스처랄까, 사실 마지막이어도 이것만큼은 딱히 아쉽지가 않았다.)


여기가 바로 산티아고 직전의 마지막 마을인 O Milladoiro였다. 이제 8km 정도가 남았다는 뜻이다. 잠시 쉬었다고 고새 뻐근해진 다리를 끼익끼익 이끌며 길을 천천히 나아갔다. 번화한 것도 잠시, 숲으로 든다. 숲길은 이내 마을과 마을 사이 골목으로 이어졌다. 어랏, 벌써부터 저기 저 언덕 너머로 산티아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감정이 출렁였다. 아마도 그건 ‘아~’와 ‘아!’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모호하고도 선명한 감각이었다.

<저-어기, 벌써 산티아고>

별것 없는 변두리 도로길인데도 어쩐 일이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와 눈을 맞춰 인사를 나눴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그래서 의외로 고요했다. 골목에서 쉬던 회색빛 고양이가 총총총 달려오더니 콩하고 코인사를 해준다. 너무 못 그려서 오히려 매력적인 벽화가 있었다. 햇빛은 여전히 감질나도록 아주 잠깐씩만 고개를 내비쳤다.


먼발치로 보이던 산티아고가 슬슬 풍경을 따라잡는다. 다시 철로를 건너고, 계곡을 넘어 숲길을 지났다. 산티아고를 걸어서 빠져나갔던 피스테라 연장길을 역순으로 따라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테이프를 감듯 시야에 희미한 두 줄이 생긴다. 향해 간다. 돌아간다. 그것은 원점일까, 목적지일까. 끝은 늘 시작과 맞닿는다. 하지만 내겐 아직 ‘끝’으로만 보인다.

<천천히 산티아고로 다가서는 길>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굴다리를 통과했다. 4km도 채 남지 않았다. 큰 도로를 고가로 넘어 서서히 도시의 끄트머리로 들어섰다. 이미 두 다리는 산티아고 땅을 밟고 있었다. 평일 오전 거리의 한가로움은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리가 익숙했다. 아, 이쪽 방향에서 들어오는 거였구나. 연장길까지 완주한 뒤 테이크아웃 피자를 먹었던 그 알라메다 공원(Parque da Alameda) 곁을 통과했다. 이제 저 골목만 지나면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여기서 잠깐. 잠시 멈추기로 했다. 어쩐지 붕 뜬 감정이었고, 추슬러 상태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셨다. 오래 쉬진 않았지만, 뜨끈하고 쓴 그 국물이 마음의 흐름을 한 가닥으로 차분히 잘 가다듬어 주었다. 한 땀 씩 걸어, 11시 반 산티아고 대성당에 ‘다시’ 도착했다. 반가웠다. 얽힌 마음과 감정은 이미 내려앉았고, 그래서 가벼웠다.


이번 걸음이 이걸로 다 끝났다.

<산티아고의 가을>

순례자 사무실로 찾아가 완주증을 받았다. 미리 생각해둔 기념품 몇 개를 더 샀다. 점심 메뉴는 진작에 결정해두었다. 그 맛있던 한식당 누마루에서 이번엔 잡채를 먹어 보기로 했다. 오늘은 일부러 먼 길을 걸어 다른 지점으로 가봤다. 조금 일찍 도착해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데, 마침 사장님께서 가게 안에 계셨던 건지 상냥하게 말씀을 걸어오셨다. 알고보니 지점마다 메뉴가 달라 분식 위주인 여긴 잡채를 안 판단다. 순간 낙담하는데, 어차피 갈 길이라며 차에 타라는 사장님. 걸어가면 30분은 족히 걸리는 그 거리를 황송하게도 그리 얻어타고 갔다. 4일 후인 12월부터는 비수기라 두 달간 문을 닫으신다고 하신다. 이리 먹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제 타이밍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잡채 또한 정말 맛있었다. 일순간 뭔가가 해소됐다.

<다디달고 다디단 그 잡채>

산티아고에서 계속 묵었던 예의 그 숙소를 이번에도 잘 예약해 두었다. 3시 체크인에 맞춰 장을 보러 갔다. 한인 마트에 들러 라면을 샀고, Gadis 마트에서 거하게 음료와 먹거리까지 마련했다. 양손 가득 무겁게 3시 반 체크인을 완료했다. 집에 온 듯 편했다. 더욱이 지난 마지막 숙박과 똑같은 층에 똑같은 위치와 배치의 방이었다.


빨래와 건조가 무료니 마음껏 활용했다. 세탁기 세 번에 건조기 세 번. 배낭과 신발만 빼고 빨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빨았다. 약간의 말 못 할 참사가 벌어졌지만, 여기서 말은 안 하련다. (사실 아내의 선물로 주려고 암스테르담 미술관에서 사둔 에코백의 프린팅이 다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위클로웨이에서부터 지금까지 비에 젖다 말았다 반복했더니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데도 덩달아 더러워져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암스테르담은 이번 여행의 첫 장소였고, 에코백은 가장 오래 길 위를 버틴 기념품이었다.)


느지막이 저녁을 잘 차려 먹고, 깔리무초도 레몬을 곁들여 정성껏 타 먹었다. 휴식의 시간은 늘 쏜살같다. 벌써 밤이 되어 바깥은 온통 어둑어둑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맘껏 틀어 놓을 수 있어 좋았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아무리 땡겨도 리듬에 맞춰 혼자 막춤을 흔들어 재꼈다. (놀랍겠지만, 실제로 췄다.) 그러다간 부러 발라드 따위를 틀고선 쓸데없는 감상에도 젖곤 했다. 생각이 깊어져도 뭐 오늘만큼은 내버려 두자. 아무렴 끝났으니. 앞으론 솜털 같은 여행만 남았다. 끝나니 더 보고 싶었다. 혼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길다.

아니, 길었으면 좋겠다. 끝 간 데 없이

늘어지고 늘어져, 시작을 다시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기억의 저편으로 훌쩍 건너가

처음의 걸음 위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잠에 들지 않아도 꿈속일

딱 만큼.




2024.11.27.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11일 차(누적거리 257.0km)

오늘 하루 30,658보(20.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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