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4일 차
비아나두카스텔루~빌라프라이아데앙코라(≈17.7km)
예보 상의 비는 오늘부터였다. 마음에 긴장감이 감돈다.
밤사이 많은 꿈을 꿨다. 다행히 그중에 악몽은 없었다. 10시 첫 푸니쿨라 시간에 맞춰 나갈 예정이라 아침의 시간은 여유로웠다. 더 자고 싶었지만 요란한 알람을 맞춘 포르투갈 부자 덕에 여섯 시에 깨고 말았다. 그 와중에 부엔까미노라 서로 인사도 나눴다. 시끌벅적 준비를 마친 그들이 가고 나자 방 안은 우두커니 혼자였다. 누워서 뒹굴뒹굴 한동안 한적한 시간을 적절히 보냈다. 노력해 봤지만 더는 잠에 들지 못했다. 주섬주섬 바람막이를 두르고선 앞마당 마실이라도 나서듯 털래털래 성당 앞 난간으로 한 번 나가봤다. 잔뜩 흐려서 일출이랄 건 없었다. 대신 해무 낀 풍경이 한아름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거기 걸터앉았다. 갑자기 비가 와륵 쏟아져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아주 잠시였지만, 좋았다.
햇반에 참치와 계란을 볶아 8시 반쯤 아침을 해 먹었다. 천천히 준비를 마치고 스트레칭도 길게 나눠 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은은하니 포근했다. 하루 더 머물 걸 그랬나, 약간 후회가 들 정도였다. 비는 고새 그쳤다. 9시 반, 우비를 미리 꺼내 배낭에 걸치고서 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성당에 다시 한번 들렀다. 훤한 풍경은 아침이 밝아옴에 따라 때때로 변해 가고 있었다. 10시에 딱 맞춰 오픈한 푸니쿨라에 올라탄다. 이제 이 산을 내려갈 시간이다. 길을 떠날 타이밍은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온다.
어제 왔던 길을 정확히 되돌아갔다. 순례길에 합류해 걷기 시작한 게 10시 20분. 매번 컴컴한 새벽에만 걷다가 이 시간에 길을 시작하니 기분이 어째 좀 이상했다. 거리도 '겨우' 17km 남짓. 자칫 땀도 안 날까 걱정이 된다며 혼자서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몸은 이상할 정도로 무겁고 피곤했다. 푹 잤는데도 하품이 계속 나왔다.
길은 걷기 좋은 해안 방향을 버젓이 놔두고 언덕 쪽 마을로 빙 돌아 올라가게끔 이어져 있었다. 굴다리를 두 번 통과했다. 약간의 오르막을 굽이굽이,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가 안 오는 게 어디야. 뒤쪽 마을까지 오르니 도로가 한적해지며 거리는 한층 조용했다. 건물들로 가려진 시야가 드러날 때마다 왼쪽으로 트인 먼바다가 코앞처럼 보이곤 했다. 그래, 바로 이것이 해안길의 클라스. 거리가 먼들 어쨌든 바다는 바다다.
짠 내, 낮은 들판, 이어지는 돌담, 그리고 말없이 누운 바다까지. 문득 제주도가 떠오르는 풍경의 길이었다. 올레길과도 닮았다. 바람에 실린 공기마저 어디선가 익숙했다. 돌담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지나는 마을마다 숨 죽인 듯 가만했다. 인기척 하나 없이 닫힌 창과 문들 사이로 축축한 기운이 잔뜩 고여 있었다. 날씨 탓인지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모든 게 끈적거렸다. 짙고 또 한층 어두웠다. 아직 오전인데도 하루가 이미 저물어가는 것만 같았다. 시작의 너스레는 이미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계곡을 건너 흙길 숲길로 접어든다. 발밑의 감촉이 바뀔 때마다 걸음의 리듬도 조금씩 달라졌다. 오늘따라 길은 유난히 배배 꼬인 듯 꼬부랑거렸다. 큰길로 시원하게 이어지기보다는, 이리저리 잔길로 빠지며 순례자를 자꾸만 시험에 꾄다. 방향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걸었다. 언제부턴가 부슬비까지 내리다 말다 했다. 우비를 입을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맞고만 있을 수도 없을 정도의 애매하니 귀찮은 비였다. 애먼 카메라만 넣었다 뺐다 했다. 물에 젖으며 몸은 조금씩 조금씩 더 무거워져 갔다.
무언가 태우는 매캐한 냄새, 벌초 작업을 마친 눅눅한 풀 내음. 와락 짖어오는 사나운 개들, 후다닥 도망가는 갖은 무늬의 고양이들. 잠깐씩 햇빛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축축 처지던 몸이 갑자기 생기가 돌곤 했다. 마침 순례길 표식의 타일을 벽면에 부착하고 계시는 주민 분이 계셨다. 왠지 모를 친근감에 서로가 서로를 반가워하는 표정. ‘올라’와 ‘봉까미노’, ‘오브리가도’만으로도 상당한 대화가 가능했다. 양해를 구하고 작업하시는 뒷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담았다. 결코 베베 꼬이지 않은 그 순수한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철로를 건너 좁은 마을길을 따라 내려왔다. 힘든 김에 도장(sello)이라도 잔뜩 받고 싶은데, 오늘 만난 작은 성당들은 죄다 문을 열지 않아 속상했다. 어제 8km쯤을 더 걸어왔다면 머물렀을 Carreço 마을에 도착했다. 12시 20분, 이 마을에 드디어 문 열린 bar가 하나 있었다. 배낭부터 냅다 벗고 놓고 뛰다시피 들어갔다. “두 유 헤브 어 스탬프?” 더 이상 못 참을 것 같았다. 수혈이 시급했다. 와인 한 잔과 레몬 펩시 그리고 얼음컵을 시켰다. 깔리무초를 안 팔면 직접 제조해 먹지 뭐. 오랜만의 영롱한 자줏빛. 따로 시켜 만들어서까지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징하다, 징해. 피식.
30분을 쉬었다. 느지막이 출발했는데도 마치 새벽부터 걸은 것 마냥 엄청시리 피곤했다. 걸음은 거리보다 시간일까. 몸이 기억하는 시간대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겐 일찍 걷고 일찍 쉬는 리듬이 더 맞는 셈이었다. 오늘은 푸니쿨라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하지만 모처럼 즐긴 아침의 여유는 참 좋았는데...), 내일부터 남은 일정 동안은 평소처럼 되도록 일찍 출발하기로 마음을 아예 굳혔다. 깔리무초 수혈로 그나마 에너지를 보충했다. 앞으로 2시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된다. 여전히 부슬비는 오는 둥 마는 둥, 그친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아주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곁을 지나갔다. 아까 건넜던 철길을 다시 건넌다. 휴식으로 채운 씩씩함도 잠시, 골목과 돌담을 지나며 이어진 오르막이 계속되자 이내 풀이 죽고 말았다. 숲길이 반복됐다. 바다는 저만치 두고 어딜 자꾸 넘어가려는지 모르겠다. 몸이 더뎌갔다. 그래서인지 길이 더 힘겨웠다. 높다란 나무들은 죄다 유칼립투스였다. 젖은 낙엽으로 바닥이 뒤덮여 넘어질 정도로 상당히 미끄러운 구간도 더러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팠다. 아침에 삶아 온 계란 두 개를 연달아 까먹었다. 못 참고 사과도 하나 베어 문다. 계곡을 지나고 산도 넘는다. 아주 가파르진 않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아니면 몸 상태가 이미 한계를 넘은 걸지도. 오후 2시, 드디어 하산이 시작된다. 작은 마을을 통과해 건넌다. 오늘의 목적지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길은 괜히 빙빙 돌아 이상한 샛길을 들었다 나며 인내심을 자꾸 테스트해댔다. 힘은 힘대로 부치는데, 부러 길을 돌아가는 것만 같아 부아가 났다. 지쳤다. 정말 많이 지쳤다.
갈매기 소리가 가까워진다. 길이 확장되며 확 번화해졌다. 2시 45분, 빌라 프라이아 데 앙코라(Vila Praia de Âncora)로 닿았다. 다 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감부터 쏟아졌다. 길이 비교적 멀지도 않았는데, 곱절은 힘겨웠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졌다. 포르투갈해안길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
벌써부터 한창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있는 성당 앞을 지난다. 좁은 골목 사이를 관통해 기차가 지나갔고, 흥에 겨운 포르투갈 아저씨들은 어디서 왔느냐며 난데없는 포옹 세례를 퍼부우셨다. 친절하게 숙소 위치까지 알려주셔 그대로 길을 따랐다. 골목의 끝, 드디어 바다가 보였다. 파! 그제야 잊혔던 웃음이 트여 나왔다. .
숙소는 바로 바닷가 앞에 있었다. 오픈 시간인 3시에 맞춰 도착했으나 아무도 없어 30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얼른 샤워와 빨래를 했다. 숙소에는 따로 건조기가 없었지만, 다행히 바로 근처에 코인세탁방은 있었다. 씻는 사이 비가 많이 내렸는지 거리 곳곳에는 물 웅덩이로 가득했다. 세탁방에 들러 건조를 돌려놓곤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산책하듯 구경했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어느 가게에서 물건들을 만지작만지작, 간신히 사치욕을 참았다. 어쩐 일인지 웬만한 식당들은 죄다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마트에서 간단히 저녁거리를 장 봐왔다.
바싹 마른 옷가지에 기분이 좋아진다. 처음 사본 토마토 밥은 오묘하지만 먹을 만은 했다. 저녁 무렵 슬그머니 바닷가로 나가봤다. 멀리 가지도 않고 바로 코앞이 모두 바다였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일몰은 없는 일몰을 바라봤다. 바람이 차고 습했다. 하루를 거기서 마무리했다.
숙소에는 나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여덟 시도 채 되지도 않았는데 다들 자는 분위기. 나는 눈을 감고 음악을 오래 감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힘들었던 오늘을 복기했다. 매우 피곤한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걸음은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를 풀 방법이 당장에는 없었다. 걱정이다. 길의 한가운데, 어떻게든 감당해야 한다.
그나마 장대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딱 오늘만 같기를. 화창한 날씨로의 호쾌한 변덕을 기대하며, 피로의 뜬금없는 호전과 남은 길을 스스로 응원하며. 그렇게 나도 잠을 청해 본다. 음악을 끄지 않은 채로 코오.
2024.11.20.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4일 차(누적거리 96.0km)
오늘 하루 33,093보(2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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