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야만 비로소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3일 차

by 달여리
마리냐스~비아나두카스텔루(≈21.7km)


5시 반에 일어나 6시 20분에 출발했다. 긴장 상태로 자는 터라 밤 사이 자주 깨긴 하지만, 알람 없이 일어나는 데는 이제 도가 다 텄나 보다. 어제보다 날씨가 쌀쌀한 듯해 얇은 바람막이를 껴입었다. 바지는… 하지만 여전히 반바지였다. 무릎보호대 정도만으로 아직 견딜만했다. 긴바지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빨랫감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심산이었다. 게다가 반바지가 걷기에 더 편하기도 하고.


3일을 연달아 30km에 육박하는 먼 길을 걸어갈 자신은 사실 없었지만, 일단은 29km 지점을 목표로 삼고 길을 나섰다. 마음이 몸처럼 무거웠다. 밤이 채 지나지 않은 새벽은 캄캄했다. 가로등이 적절히 나있어 그래도 걷기엔 나쁘지 않았다. 멀리 닭 우는 소리, 어디 집에선가 사나운 개가 연신 짖어댔다. 골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마을은 일상을 닮아 아늑하고 한적했다.

<알베르게 벽면의 옛날 감성 낙서들>

이른 걸음이 익숙하다. 어둠은 차차 짙은 푸름으로 번져갔다. 곧 밝아올 날이 진작부터 흐린 뉘앙스였다. 하늘엔 곳곳으로 얼룩이 잔뜩이다. 바닥은 어김없이 돌길이었다. 요란하게 아침을 깨우는 차들이 곁을 훑어가며 번쩍이는 핀 조명을 때리곤 했다. 띠롱띠롱, 아무도 없을 것만 같던 길에 홀연히 나타난 동네 자전거 아저씨. 그 근엄한 표정에서 그토록 정겨운 말투의 아침인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봉 까미노(Bom Caminho)! 웃었고, 눈빛을 교환했다. 오브리가도(Obrigado).


40분쯤 걷고 나자 몸에 열기가 돋았다. 바람막이를 벗어 배낭에 쑤셔 넣었다. 얄짤없이 7시엔 모든 가로등이 꺼졌다. 이미 날이 정도껏 밝아 맨눈으로도 시야는 충분했다. 어스름 아래 낮은 집들 사이의 골목을 통과한다. 동네 구멍가게에 옹기종기 모인 아저씨들이 일제히 날카로운 시선을 쏟아냈다. 무언가를 채집하는 할아버지의 손엔 흰둥이 강아지가 쫄쫄쫄 딸려있었다. 창문으로 고개 내민 할머니와는 난데없이 눈이 마주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봉 디아(Bom dia)." 그래, 이제 포르투갈식 아침 인사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숲길, 돌담길>

돌길이 끝나자 흙길이었다. 짧은 돌담길도 있었다. 7시 40분, 네 번째 마을 antas를 지나자 곧 산길이 이어졌다. 자꾸만 길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긴장이 됐지만 별 수가 없었다. '해안길'이라 해안만 걷는다고 생각했던 건 사전에 제대로 길을 공부하지 않은 안일함이었나 보다. 그러니 산길을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실소했다.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다른 어떤 인공적 소음이나 풍경 없이 새소리와 물소리, 나무와 흙의 향기를 차분히 마주하니 마음만은 한결 평온했다.


포르투갈길은 갈래가 너무 많은 듯해 헷갈렸다. '포르투갈해안길'이라는 하나의 명칭에도, 말하는 곳마다 세부 루트는 조금씩 다 달랐다. 복잡한 거 딱 질색인 나는 그냥 까미노닌자(Camino Ninja) 앱의 Caminho Português da Costa (Official) 루트를 따라서 가기로 했다. 비교하고 자시고도 없이, 토 달지 말고 이 앱이 알려주는 대로만 가는 거다. 네-네- 산을 오르라면 올라얍죠.

<오늘 길 위의 표식들>

산과 계곡을 넘어 다시 작은 마을이다. 약간의 오르막길. 마을을 올라, 8시 반. 언덕 위 성당(Igreja de Santiago de Castelo de Neiva)에서 잠시 쉬어 간다. 도장(sello)도 받았다. 딱 10분간만 숨을 돌렸다. 성당을 지나서는 바로 또 산길로 이어졌다. 아마도 산 하나를 넘어가는 듯했다. 오르막이 험하거나 심하게 힘들진 않았지만, 부쩍 땀은 쏟아졌다. 따라라라따딱. 숲 깊은 곳 외로운 딱따구리 하나. 딩딩 디디딩 띵. 불규칙한 화음의 성당 종소리가 서서히 뒤로 멀어져 간다.


아, 역시 유칼립투스 향이 짙다. 울창한 숲은 포근한 안정감을 갖췄다. 약간의 비 느낌. 공기가 끈적해지더니, 결국 부슬비가 조금 내린다. 숲길과 마을, 다시 숲길. 그리고 도로. 한껏 뿌옜다. 눈길을 끄는 별다른 풍경은 없었다. 9시 반에 도착한 여섯 번째 마을 Chafé. 조용한 시골이라 전혀 기대치 않았는데 여기서 문 연 카페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자타 공인 순례길 공식 아침, 카페라떼와 초코레또빵을 시켰다. 와, 심지어 맛있다. 30분을 쉬었다. 영원의 시간을 보낸 듯 몸은 일순간 걸음을 잊었다.

<식물, 꽃, 고양이>

겨우 엉덩이를 떼 배낭을 멨다. 대체로 시골 마을길이 이어졌다. 산길도 더러 있었다. 초반에 비해 촘촘해진 표식에 더 이상 GPS는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산티아고순례길의 상징이기도 한 비석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아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길은 더없이 한가로웠다. 이따금 마을 주민만 한 번씩, 순례자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하긴 그것도 욕심. 부슬비 정도로 그친 것에 감사하며 묵묵히 앞을 걸어 나갔다.


10시 40분, 일곱 번째 마을 Anha를 통과한다. 마을의 작은 성당(Igreja Matriz da Paróquia de São Tiago de Vila Nova de Anha)에 들러 도장(sello)를 받으며 잠시지만 나지막한 음악도 감상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오르막이 나와 숨이 완전히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허벅지가 미어터졌다. 이러다 꿀벅지라도 될까 걱정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숲과 언덕을 건너 두 마을, 다르크와 비아나 두 카스텔루>

산길을 마저 걸었다. 언덕을 넘어 도로를 따른 완만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저 멀리 바다와 강, 그 강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커다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마을 다르크(Darque)와 아홉 번째 마을 비아나 두 카스텔로(Viana do Castelo)다. 높은 산 위로 우뚝 솟은 성당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하얀 벽과 붉은 지붕. 유럽 마을 특유의 그 분위기란 왜 이리도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건지, 오르막의 힘듦은 고새 잊고 몸이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아니, 내리막이라서 그런가. 룰루랄라까진 아니더라도 발걸음의 리듬이 확실히 붙었다.


도로를 따라 내린다. 먼저 만난 다르크 마을. 어딘지 쇠락하는 동네의 분위기가 서렸다. 건물은 많은데 죄다 텅 빈 느낌이다. 곧 긴 다리를 건너 스산한 강을 건넜다. 차가 많이 다녔고, 공기에서는 짭조름한 맛이 났다. 11시 50분, 그렇게 비아나 두 카스텔루에 도착했다.

<비아나 두 카스텔루>

마을이 컸다. 관광지 느낌이 물씬, 꽤 번화한 거리였다. 기념품가게나 음식점, 갖가지 상점들로 가득했다. 두리번거리기 일쑤. 마치 신식 문물이라도 만난 듯 고개는 연신 춤을 춰댔다. 얼마간 더 걸어가다 못 참고 적당한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낭을 던지듯 내려놨다. 힘이 들긴 들었다. 아무래도 고민이 됐다. 21km쯤을 걸어왔다. 여기서 목표한 대로 8km 정도를 더 걸어갈지 말지에 대한 문제였다.


웬걸, 고민을 시작하자마자 절로 결론이 내려졌다. 순간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명확해지고 만 거다. 이 마을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소문으로만 들은 산꼭대기 성당 옆 멋진 알베르게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30분 동안을 쓸데없도록 머리와 마음을 굴렸다. 에잇. 부킹닷컴으로 알베르게를 예약해 버렸다. 망설임도 끝. 그제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배가 막 고파왔다. 적당한 식당을 찾아가 순례자 메뉴를 시켜 먹었다. 맥주가 술술, 두 병도 너끈했다. 도장(sello)을 채우겠다고 괜히 찾아간 안내센터는 매우 친절했다. 여기서 파는 디자인 상품들이 의외로 꽤 괜찮았다. 결국 쓰지도 않을 노트를 하나 샀다. 그렇게 배낭의 무게가 또 추가됐다.


마트에서 간단히 장까지 본 뒤 알베르게로 향했다. 걸어서는 600 계단인가를 올라야 한다고 했다. 대신 돈을 내고 타는 푸니쿨라가 있단다. 왕복 3유로. 위치 정보가 시원찮은 대도 기똥차게 정류장을 잘도 찾아냈다. 성당으로 향하는 주민분들과 같이 올랐다. 뭔가 포르투갈어로 자꾸 말을 거시는데, 뭔진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아는 거라곤 ‘올라’, ‘봉 디아’, '봉까미노' 그리고 ‘오브리가도’뿐이었다. 서로 웃었고 각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와!


이런 곳이 있었구나. 길을 진작 멈추고 여길 올라오길 잘했다 생각했다. 탁 트인 이곳에 근사한 성당(Santuário do Sagrado Coração de Jesus / Monte de Santa Luzia) 그리고 오늘의 알베르게가 있었다. 성당은 정말 멋졌다. 그동안 가본 몇 안 되는 유럽의 성당 중에도 손에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전망이 더 없다. 오늘 건너온 다리부터 항구와 해변, 마을 그리고 기나긴 수평선까지. 또 한 번 날씨가 맑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동시에 이 순간에 그저 감사했다.

<멈추지 않았다면 못 봤을 풍경>

2시 반 체크인.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곳, 편히도 널널했다. 샤워를 하며 빨래도 했다. 잘 짠 뒤 건조는 기계로 돌렸다. 누워서 한동안 쉬었다. 몸이 노곤했지만, 괜히 성당엘 한 번 더 다녀왔다. 비가 약간 내리기 시작했지만 먼바다는 여전했다. 추웠고, 맨다리에 소름이 좀 돋았다.


앞으로의 날씨가 안 좋다는 예보에 알게 모르게 무슨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걸으려 했던 건 아닌지. 오늘 멈추길 참 잘했다. 덕분에 한숨을 돌리듯 차분히 상황과 상태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 즉흥적으로 하루의 거리를 결정하는 걸 멈추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전체적인 일정을 잡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워서 이리저리 찾아보며 일정을 대략적으로 짰다. 음, 충분히 여유를 가져도 되겠다. (이제야) 이로써 포르투갈 해안길이 총 11일의 여정으로 잡혔다.


여기서 내려가는 첫 푸니쿨라가 10시에 있다고 했다. 그 시간에 맞춰 느지막이 출발할 생각이다. 내일은 비도 온다 하고, 정해둔 거리도 17km 정도니 괜찮다. 빼도 박도 못하게 내일의 알베르게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앞으로 비가 많이 올까? 일단 걸어가 보자. 뭐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2024.11.19.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길

3일 차(누적거리 78.3km)

오늘 하루 37,619보(24.5km)







*설 연휴 즐겁게 잘 보내고 계신지요. 그 귀한 시간에도 이 여정의 길 위로 함께 들어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비수기 4편,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길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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