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1일 차
포르투~빌라두콘드(≈28.4km)
6시에 겨우 일어났다. 짐을 챙겨 준비를 서둘러 마쳤다. 일주일 가까이 순례길을 걷지 않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순서가 있었다. 덕분에 일어난 지 채 30분도 안돼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눈이 발갰다. 사실 더 자고 싶었다. 하품을 크게 한번 내쳤다. 어영차, 배낭이 참말로 묵직했다. 타닥타닥 타닥. 스틱은 내 맘도 모르고 경쾌하도록 바닥을 울려댔다.
새벽의 거리는 텅 비어 스산할 만큼 한산했다. 어제 그토록 복작했던 토요일밤의 포르투 거리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까지 밤을 끝내지 못한 몇몇 젊은이들만이 그 증명처럼 길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빈 웃음을 흘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묵었던 호스텔에서 15분쯤을 걸어 포르투 대성당(Sé do Porto)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포르투갈 해안길의 시작점이다. 포르투에 머무는 동안 일상처럼 자주 왔었더랬다. 그 친숙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의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조명이 켜진 성당을 슬쩍 한 번 올려다봤다. 그리고선 가야 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똑바로 섰다.
다시,
시작.
이제부터 새로운 순례길을 걸어간다. 어떠한 감회도 아직은 없었다. 몸이 한층 무겁게 느껴지는 건, 배낭 때문일까 상태 때문일까. 이 무게감. 막상 걸으려 하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왔던 것 같기도 했다. 새 길 다운 새로움보다는 익숙해진 장소, 익숙해진 걸음, 익숙한 하루의 출발에 더 가까웠다.
계단을 내려 골목을 가른다. 도시의 굴곡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다. 곳곳의 작은 성당들을 하나씩 훑어가는 길이었다. 도심지라 그런지 표식이 잘 눈에 띄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까미노 닌자(Camino Ninja) 앱 GPS에 의지해 걸었다. 벌써부터 날이 새파랗게 밝아오고 있었다. 가로등도 충분하겠다, 랜턴은 처음부터 쓸 필요가 없었다.
포르투갈 해안길(Caminho Português da Costa, 다만 브런치북 제목은 글자수 문제로 '포르투갈길'이라 표기했다.)은 포르투갈 포르투(Porto)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대서양을 왼편으로 낀 채 북쪽으로 향하는 약 250~280km의 포르투갈 순례길을 말한다. 명칭은 하나지만 선택하는 세부루트에 따라 조금씩 길이 다르며, 대체로 해안길을 따르는 전반부와 내륙길로 합류하는 후반부로 나뉘게 된다. (나의 경우엔 Camino Ninja 앱 상의 포르투갈 해안길 공식 루트를 따랐다. 총 257km다.) 걷는 양에 따라 대략 10~14일 정도 소요된다. 바다와 인접한 만큼 변덕스러운 날씨로 악명(?)이 높다.
성 야고보의 시신이 돌배를 타고 들어온 물길을 육지에서 따라 걷는 길. 한마디로 일종의 마중과도 같은 순례다. 오랫동안 잊혔던 이 길은 2016년 재정된 <갈리시아 문화유산법(del patrimonio cultural de Galicia)>에 등재됨에 따라 드디어 공식 순례길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제야 길이 정비되고 표식도 하나둘 세워졌다. 그러니까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은 나름 ‘신상’ 순례길인 셈이다. 고저가 심하지 않아 걷기 편하다. ‘힐링 길’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포화 상태가 된 프랑스길의 피로감,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욕망 또한 포르투갈 해안길의 인기에 한몫을 단단히 보탰다.
7시가 넘자 거리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 길게 이어진 어느 쇼핑 거리를 눈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나가는 차에서 갑작스레 “부엔까미노”란 외침이 들려왔다. 순간 어색하고 낯설어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부엔까미노, 부엔까미노... 중얼거렸다. 걸음이 습관처럼 익숙해졌구나 생각했는데 그 마법의 문장이 힘을 발하기엔 아직 조금 부족했나 보다. 일요일 아침 거리는 한산했고, 순례자는 여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아직 높게 떠 있었다. 희미한 갈매기 울음소리는 이곳이 여전히 포르투(Porto) 임을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물집의 뉘앙스가 발바닥에서 스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걸음은 절로 앞을 내디뎠다. 나름의 구력이 생기긴 생겼나 보다. 고통이 두렵기보다 대담함이 먼저였다. 도심을 지나면서부터는 노란색 페인트칠 화살표가 드문드문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GPS가 필요할 정도긴 했지만, 길의 방향을 재차 확인받는 듯해 확실히 안심은 됐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았다. 시내권 도로를 따라 인도길을 오래 걸었다.
8시. 딱 쉬고 싶을 타이밍에 커다란 마트 DIA를 만났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스페인과는 달리 일요일인데도 문을 열었다. 이것저것 구경을 좀 했다. 에그타르트와 사과, 콜라와 페퍼민트 사탕을 샀다. 아침을 여기서 해결하고 간다. 발과 다리도 좀 쉬어줘야 했다. 무엇보다 애정하는 SMINT 사탕을 살 수 있어 좋았다. 거의 3유로 정도로 꽤 비싸긴 하지만, 내겐 거의 걸음의 필수품과 다를 바 없었다. 이걸 먹으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른다. 가방을 다시 메고 길을 나서며 사탕을 입에 하나 털어 넣었다. 산티아고의 맛, 페퍼민트 향이 입안에 화 퍼졌다. 상쾌했다.
포르투갈 해안길임을 알리는 큰 철제 간판을 만났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길이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다양한 색의 페인트와 갖가지 모양의 타일로 장식된 집들. 골목골목이 특히 예뻤다. 대체로 도로를 따라 도시를 걷는 길이었다. 나무가 울창한 로터리 공원을 통과해 고가도로도 지나고 철길도 넘었다. 길은 점차 한적해져 갔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시골 마을 풍경으로 들어섰다. 길 위에 순례자라곤 나 밖에 없었고, 덕분에 고요한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이삼일 후부터는 일주일 넘도록 내내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토록 날이 좋은 날, 햇살을 한껏 누려야만 했다.
근방에 좋은 산책로라도 있는 건지 러닝과 라이딩으로 주말을 즐기는 주민분들이 꽤 있다. 희한한 새소리와 쓰러진 전신주, 커다란 개들의 몸짓과 하얗고 희미한 구름들. 포르투갈 국기가 새삼 낯선 순례길이다. 꽤 더웠다. 그래도 흐린 그늘보다는 밝은 태양이 더 나았다. 팔 토시를 벗었다. 끈적끈적, 진작부터 땀을 많이 흘렸다. 비행기가 하늘을 연신 지나다녔다.
10시 10분, 세 번째 마을인 Moreira da maia을 통과한다. 공항(Aeroporto Francisco Sá Carneiro)이 있을 정도로 은근 규모가 큰 ‘도시’였다. 여기까지 12.4km쯤 걸어왔다. 아직 갈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묘지도 지나고, 성당도 지난다. 웬 관중들이 모인 축구장도 있었다. 삑 휘슬소리에, 와 함성소리. 머리에 닿을 듯 말 듯, 축구장 뒤편으로 이어진 활주로에선 비행기가 쉼 없이 뜨고 졌다. 아예 자리 잡은 커다란 렌즈들이 그 궤적을 따라 좌로 우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헤이 포르투갈 사진 아저씨들, 올라! 나도 그들을 따라 몇 장의 비행기 사진을 재미 삼아 찍어 보았다.
11시가 넘어가자 다리가 급 피곤해진다. 다시 쉴 타이밍이 왔다. 하지만 벤치도 카페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돌길이라 무엇보다 발바닥이 불난 듯 많이 아팠다. 이런 돌길에도 차들은 아랑곳도 없이 전속력으로 지나다녔다. 굉음 같은 그 소음에 귀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차오르고 있었다.
고속도로 같은 곳으로 덩그러니 나와 그 곁을 따라 한동안 걸었다. 건너편으론 분명 휴게음식점들이 보이는데도, 도무지 건너갈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듯 아득히 멀었다. 쌩쌩 달리는 수많은 차들의 복잡한 움직임. 높다랗게 세워진 초록 나무들에 시선을 그나마 의지했다. 못참고 한 번씩 귀를 틀어막았다. 등은 이미 축축한 땀으로 죄다 젖었다.
11시 55분. 내리 세 시간 반을 걸었다. 이런 곳에 쉴 곳이 나올 리가 없다고 절망하던 바로 그때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딱 DIA가 나타났다. 오, 나의 구세주! 무슨 아울렛처럼 조성된 곳이었다. 여기 가녀린 횡단보도가 놓여 있었다. 넓은 도로를 건너 텅 빈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아주 큼직하고 깔끔했다. 아예 여기서 점심까지 해결해야겠다 싶었다. 욕심을 부려 오렌지주스에 비프랩과 치킨윙까지 샀다. 오늘따라 왜 이리 주스나 콜라가 땡기는지 모르겠다.
허겁지겁 금방 다 해치웠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화장실까지 해결했다. 쉬었더니 발바닥이 아주 딱딱해진 느낌이었다. 쉬었다 걷는 첫길이라 그런지 힘이 많이 들었다. 오늘은 이제 그만 걷고 싶다 생각했다. 갈 길이 7km 정도 남아있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 여기서 멈출 요량도 없다. 힘 없어도 힘을 내보기로 했다. 이미 알고 있다. 침대에 누운 자리, 돌이켜 이 길을 즐겁게 회상할 거라는 걸. 이미 걸음을 끝낸 미래의 나로 지금을 본다. 그래, 현재의 고통은 그저 추억일 뿐이다.
이름이 해안길인데 도대체 바다는 언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길은 계속 도로를 따라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유칼립투스 이파리에서 진한 향이 났다. 큰 도로에서 빠진 길은 마을과 골목으로 들었다 나길 반복했다. 인도가 양방향 모두에 있는 게 아니라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쉼 없이 옮겨 다녀야만 했다. 여전히 돌길이 많았다. 발바닥은 정말인지 열일 중이었다.
열 번째 마을 Areia에 도착했다. 왼쪽 아래 멀리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1시 반,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 들러 또 한 차례 쉬어간다. 또 콜라를 시켰다. 얼음에 레몬까지 부탁했다. 동네 맛집인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주인장은 내게 순례길을 걷느냐고 물어왔다. 몇 마디 대화와 어색한 웃음들. 남은 얼음에 물까지 덤으로 담아 벌컥벌컥 두 잔이나 들이켰다. 땀을 많이 흘리긴 했나 보다. 하긴 길이 많이 덥긴 했다. 좀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열기도 식당 그늘 아래 금세 다 식었다. 이곳의 11월 가을은 그런가 보다. 빛은 여름처럼 뜨겁고, 그늘은 가을답게 추웠다. 나는 여즉 반바지 반팔 차림이었다.
지침을 달래줄 도장(Sello)라도 차라리 여럿 받고 싶은데, 어찌 성당은 하나같이 약속한 듯 문을 굳게 닫았다. 길은 잊을만하면 소란했다. 투둘투둘한 길 위로 차만 다니지만 않는다면, 골목은 더 예뻐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곧 바다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넓은 강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오늘의 목적지 빌라 두 콘드(Vila do Conde)로 들어선다. 28.4km. 아, 잘도 걸어왔다.
2시 10분 오늘 묵을 알베르게 앞에 도착했다. 아뿔싸, 3시 오픈이란다. 앞에서 계속 기다리긴 싫고, 혹여나 선착순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먼저 왔다는 걸 표시라도 해두고 싶은데 알베르게가 너무 길가에 위치해 있다 보니 배낭을 놔두기엔 다소 께름칙했다. 이 더러운 걸 누가 가져가겠어,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등산화를 입구에다 벗어 두었다. 촉이 다 닳은 등산스틱도 그 곁에 세워뒀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싶었다.
웬걸 숙소 바로 뒤편으로 주말의 벼룩시장이 펼쳐져지고 있었다. 재밌어 보이긴 한데, 힘들어 구경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장자리의 식당에 들어가 맥주부터 한 병 시켰다. 거의 원샷을 했다. 어김없이 캬~~가 절로 튀어나왔다. 맨발의 열기가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3시에 딱 맞춰 체크인을 했다. 놓아둔 등산화와 스틱이 무색할 정도로, 다른 순례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샤워와 손빨래를 하고 짐까지 정리하고 나니 딱 1시간이 지나있었다. 옥상이 있어 좋았다. 유난히 짙은 늦오후의 빛깔 때문인지, 아니면 그 옥상과 주변의 분위기 때문인지, 먼먼 기억인 파키스탄 라호르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조금 기분이 좋았고, 약간 감상에 젖었다. 잠시 마음이 거기 널브러져 있었다.
로비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삼십 분을 녹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동네 구경은 해보고 싶기에, 마음을 다잡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까 제대로 못 본 벼룩시장을 낱낱이 구경하고, 성당(Igreja Matriz de São João Baptista de Vila do Conde)에 들러 도장(sello)도 받았다. 반대편의 길을 올라 Aqueduto de Santa Clara라는 유적지도 가봤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전망이 확 트여 멋졌다. 힘들고 귀찮았는데 와보길 진짜 잘했다 싶었다. 너른 강과 그 끝의 바다가 보였다. 마침 해는 수평선 가까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마무리는 저 태양과 함께였다. 성벽에 앉아 그저 멍하게 장면을 바라봤다. 해는 5시 15분쯤 졌다. 색채의 그 다이나믹한 변조처럼, 하루는 그렇게 확실히 저물었다. 이것으로 오늘이 끝났다.
돌아오는 길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 와 저녁을 해 먹었다. 이상할 정도로 또 탄산이 당겨 이번엔 환타를 사 왔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데 오늘따라 왜 그런지 모르겠다. 깔리무초를 안 먹어서 그런가. 아니,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그때 숙소에서 맛있게 타 먹으련다. 깔리무초가 없는 이 포르투갈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당분간 금지다.
늦게 넌데다 해가 빨리 진 터라 빨래가 덜 말랐다. 건조기를 돌렸다. 1유로로 금액도 쌌다. 사실 포르투갈 해안길에서는 되도록 건조기는 매일 쓸 생각이었다. 오래 비가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빨래 건조에 더 이상 전전긍긍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설 채비를 대충 해둔 뒤 침대에 누워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숙소에는 숙박객이 몇 없는 듯했다. 내가 묵은 2층 도미토리방에도 나를 포함해 겨우 3명뿐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다. 덕분에 별 대화 없이 시간을 홀로 느긋이 보낼 수 있었다. 모두가 일찍에 잠자리에 든다. 9시 반쯤 불을 끄고 나도 잠을 청했다. 모처럼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들었다. 피곤하긴 진짜 피곤했던 모양이다. 더웠던들 오늘은 날이 참 좋았다. 앞으로 다가올 연속된 비가 걱정되긴 하지만.
2024.11.17.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길
1일 차(누적거리 28.4km)
오늘 하루 49,783보(3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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