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바랬나 바다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해안길 2일 차

by 달여리
빌라두콘드~마리냐스(≈28.2km)


알람 없이도 5시에 깨어났고, 귀찮아 모른 척 30분을 더 누워있었다. 어쩌지. 오늘의 목적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대략 이스포센드(Esposende)까지 23.7km를 갈 것이냐, 더 걸어 28.3km의 마리냐스(Marinhas)까지 갈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몸이 허락한다면야 더 멀리 가고 싶긴 했다. 포르투갈 알베르게들이 비교적 늦게 문을 여는 것도 이른 선택이 망설여지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일찍 도착한들 멀뚱히 밖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더 걸어가는 게 나았다. (하지만 힘들다.) 어물쩍 식사까지 마치고 6시 반쯤 나왔다.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지만, 우선은 일찍 출발하자 싶었다.

<새벽 골목>

새벽은 영락없이 부지런한 월요일의 모습이었다. 차도 사람들도 모두 거리 위로 부산스러웠다. 비행기 소리가 났고 아침의 새소리도 들렸다. 수명이 다한 어느 건물의 형광등이 잠시도 쉬지 않고 깜빡였고, 아무도 뛰지 않는 농구 코트는 텅 비어 외로웠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옆을 지나쳐 사라졌다. 아침을 여는 가게들의 셔터소리는 놀랄 만큼 요란했다. 골목골목을 올랐다. 가로등이 많아 랜턴 없이도 괜찮았다. 짙푸른 하늘엔 보름달이 조각처럼 떠있었다. 길은 번화했다 한적해지길 반복했다. 주택가도, 상점가도 적절히 뒤섞여 있어 딱히 심심할 틈은 없었다.


첫 번째 마을 Caxinas는 눈 깜짝할 새 이미 지났다. 엇비슷한 길의 연속이라 마을과 마을을 구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적해졌다 다시 번화해지는 지점에서 구획이 전환되는 게 아닐까 그저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프랑스길에서의 '마을'과는 달리, 사실 '도시 동네'란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들이었다. 서울로 치면 ‘망원동’, ‘합정동’ 뭐 그런 느낌이려나. 여하튼 뉘앙스가 좀 다르다.


집이나 건물마다 외관의 타일과 형태, 색채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데, 그게 어찌나 근사해 보이는지 모른다. 누가 아줄레주의 나라 아니랄까 봐 골목 곳곳이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그런 골목의 낭만이 부러웠다. 덕분에 걷는 재미가, 구경거리가 가득한 걸음일 수 있었다. 두 번째 마을 Povoa de Varzim은 꽤 컸다. 휴양지인 듯, 커다란 광장도 있고 기다란 쇼핑 거리도 있었다.


가로등이 일제히 다 꺼졌다. 7시 반이었다. 10분쯤 더 걸었을까. 문 닫힌 분홍 교회를 지나 드디어 푸른 바다를 만났다. 낮은 하늘이 주홍빛으로 번지며 서서히 달아오르고, 희미한 바다는 말간 파도를 끊임없이 하얗게 하얗게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부터 해안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보다. 해변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걸었다. 백사장 가장자리를 훑어가는 파도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해, 생경할 정도로 바다란 게 실감이 났다. 이토록 길고 하얀 해변은 모처럼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 테라스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아 그저 멍하니 시간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만 그런 호쾌함은 안타깝게도 내게 없다. 말하자면 J인 게다. 아직까지도 오늘의 목적지를 결정하진 못했지만.

<아침, 드디어 바다>

한가로운 사람들의 산책 사이로 근육질 언니 오빠들이 건강미를 뽐내며 습습후후 뛰어다녔다. 의외로 갈매기들은 소리 없이 날았다.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깔이 아침을 은은히 물들여 가고 있었다. 바닷가에 문 연 카페라도 있으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는데, 웬걸 하나도 없었다. (거봐, 휴양지 맞다니까. 죄다 늦게 열잖아!) 데크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바다를 자주 돌려다 봤다. 아침은 극적인 일출 없이 잔잔했다. 구름이 깊었다. 머금은 빛은 죄다 파스텔톤이었다. 그 분위기가 상당했다. 없던 기억조차 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8시 반이 넘자 구름을 뚫은 햇빛이 잠시 비쳐오기도 했다. 순간 바다의 빛깔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테크에서 잠시 빠져 마을의 돌길을 돌아간다. 발바닥이 아팠고, 그럼에도 다행히 물집은 생기지 않았다. 한 번 떠올리고 났더니 커피가 너무나도 마시고 싶었다. 더군다나 배까지 고팠다.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 벌써부터 그랬다. 진작 사놓고도 맛이 없어 여태 안 먹은 에너지바를 하나 꺼내먹었고, 하나 남은 귤도 걸으며 까먹었다.

<그토록 바랬나, 바다>

다시 기나긴 데크길. 모래 더미에서 자란 낮은 풀들이 예쁘다. 파도와 해변이 물안개에 묻혀 아득히 멀어졌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카페가 없더라도 이제는 쉬어야 했다. 9시 40분, 데크길이 끝난 지점의 어느 공터 주차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 시간째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왔다. 끄응차, 배낭을 내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확실히 더 무거워진 게 맞긴 맞다. 하긴 기념품들이 가득이다. 포르투 엽서도 여럿, 렐루서점에서 책도 샀고.


주차장 한편에 모여 서핑을 준비하는 사람들. 신나 보인다. 그들을 구경하다 10시쯤 겨우 엉덩이를 털었다. 잘못 들 뻔한 길을 안내해 주신 동네 아저씨의 친절이 감사했고, 고새 제법 입에 익은 '오브리가도(포르투갈어로 고맙습니다.)'가 스스로도 뿌듯했다. 허름한 풋살장을 지났다. 낡은 미니 골프장도 있었다. 꼭 사탕수수처럼 생긴 물대들이 길 주변으로 길쭉길쭉 잔뜩이다. 분뇨 냄새가 짙은 밭과 식물 농장을 통과했다. 우둘투둘한 돌길이 고약하게도 (안 그래도 고통인) 발바닥을 매우 거칠게 다뤘다.

<숲 마을 묘지 성당, 그 다양한 풍경들>

어느새 몇 개의 마을을 지나왔다. 11시, 조용한 숲 속 돌길을 거쳐 여섯 번째 Apúlia 마을로 들어섰다. 초입에 성당이 있었지만 마침 미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순 없었다. 허기져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 마을에서 뭐라도 꼭 먹고 넘어가야겠다. 아무래도 순례길 방향엔 딱히 뭐가 없는 것 같았다. 지도를 뒤져 결국 600m쯤 떨어진 카페를 하나 용케 찾아냈다. 막상 커피를 시키려니 이제와 안 당겼다. 비파나(Bifana)와 콜라를 시켰다. 우걱우걱 쫍쫍쫍. 아, 살 것 같다. 4유로로 행복과 점심을 동시에 얻었다.


11시 45분. 다시 걸으려 하자 다리가 굳은 듯 뻐득뻐득하다. 금방 괜찮아졌지만, 첫 몇 걸음은 그래서 뻣뻣한 로봇 동작처럼 됐다. 빠졌던 길로 합류해 그대로 골목을 걸어간다. 아까 카페에서 목적지를 28.3km 지점의 마리냐스로 결정했고, 걸으며 여기저기 알베르게와 호스텔을 검색했다. 개중 적당해 보이는 한 군데로 연락해 예약을 잡았다. 바야흐로 길이 확정됐다. 여기서부터 9~10km가 남았다.

<골목, 우연한 빛의 흔적>

마을을 벗어나자 밭길을 건너 숲길로 든다. 유칼립투스 향이 짙게 풍겼다. 길지 않던 그 숲의 끝, 지나온 동네가 조용하고 깔끔했다. 성당에 들러 도장(sello)를 받았다. 간판들이 이쁜 골목을 요리조리 통과했다. 탁 트여 갑자기 너른 강이 펼쳐졌다. 그 넓은 강을 부실한 교량으로 건넜다. 공사 중인지 가장자리로 도보용 비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히 흔들거리는 느낌이라 아무래도 무서웠다. 우려는 기우였지만, 배낭까지 합하면 거의 90km의 무게가 아닌가.


한창 땅을 헤집어놓은 도로 옆을 걸었다. 주유소가 있었고, 중고차 판매장이나 호텔, 레스토랑도 보였다. 바닥도 벽도 죄다 하얀색이었다. 언젠가부터 환히 내린 햇빛이 한껏 반사돼 눈이 꽤나 부셨다. 그렇게 걸어 오후 1시 이스포젠드에 도착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기가 될 수도 있었다. 마리냐스는 4.5km를 더 걸어가야 한다.

<흔들흔들 비계 다리를 건너 마을로>

묘지를 지난다. 어딜 가나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자리한 묘지들이 참 좋아 보였다. 죽음을 가까운 곳으로 이끌어 외려 함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듯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어쩌면 우리의 삶도 조금 더 건강해지는 게 아닐까.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혐오 시설 취급이라니.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건 참 이상하다. 누구나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잊을만하면 갈매기가 한 번씩 울어 여기가 바다 근처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 가만히 집중해 보면 희미한 물 비린내가 공기 중에 살포시 섞여있었다. 어느 성당에 들러 도장(sello)도 받고, 웬 관광지 기념품 거리도 거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초등학교 앞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한 식당 야외 테이블에 서빙된 카레라이스가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하마터면 홀린 듯 거기 들어갈 뻔하기도 했다.


골목만 거치던 길은 잠시나마 이스포젠드의 바닷가 산책길을 맛보게 해 주었다. 썰물이 저만치 빠져있었고, 뭐 그건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산책로가 길지 않았다. 다시 골목으로 이어진 길은 숲길 돌길을 거쳐 마리냐스로 향했다.

<이스포젠드 앞바다>

숙소에 도착하기 15분 전쯤 작은 슈퍼가 있어 살펴봤지만(여기가 유일한 슈퍼다.) 마땅히 장을 볼만한 게 없었다. 그냥 귤이랑 사과, 참치와 레몬 펩시를 샀다. 요 며칠째 계속 귤홀릭 중이었다. 요즘 철이라 그런지 참 싸고 달았다. 나오자마자 어김없이 하나 까먹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못 참고 하나 더. 별 수 없지, 딱히 먹거리도 없고, 오늘 저녁은 사 먹는 게 낫겠다. 장 볼 미련 없이 호.쾌.하.게. 숙소로 향했다.


2시 반 체크인, 숙박객은 나 혼자 뿐이다. 씻고 빨래하고 나니 3시가 넘었다. 빨래는 잠시 널어놨다 일찌감치 건조기를 돌렸다. 슈퍼에서 사 온 참치와 숙소에 비치된 60센트 캡슐 커피로 당장의 허기를 때웠다. 배낭 깊숙이 넣어뒀던 안티푸라민을 다시 꺼냈다. 더 이상 쓸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버리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허벅지가 제일 아팠다. 정강이에도 뚜렷한 통증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 이틀 동안 60km 가까이 왔으니. 몸만 엄청시리 피곤했다. 사실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피로했다.


곧 도착한 독일 여성 순례자분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어디서 왔고 어디 살고 이 길은 처음이니? 뭐 그런 대화들이었다. 그 친구는 간단히 요리해 저녁을 먹겠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쉬다 7시쯤 근처 레스토랑에서 푸짐하게 해결했다. 칠흑 같이 내린 밤이 쌀쌀했다.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잘 때가 다 됐다. 도미토리엔 단 둘 뿐이었다. 평이 좋은 곳인데도, 확실히 비수기는 비수긴가보다.


가까운 성당에서 들려오는 느지막한 종소리가 아름답다. 어쩐지 잠은 잘 오지 않았지만, 어둠만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으규규, 다리의 고통과 몸의 피로는 뒤로 하고 눈을 감는다. 어른어른. 망막에 남은 하루치의 음영이 흐린 기억처럼 얼룩으로 스민다. 거기 하나둘셋 별도 세고, 땅도 세고, 새도 세고, 물결도 세…… 코오—코오—


코—.



2024.11.18.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길

2일 차(누적거리 56.6km)

오늘 하루 44,894보(29.4km)







*여정의 길 위로 함께 들어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비수기 4편,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길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keyword